첫 번째 편지 - 다시 저 꽃빛 속으로

작년 늦봄, 감옥에서 나온 날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머리띠를 두르고 하청노동자들 앞에 선 다는 것이 그렇게 설레었습니다. 그 어둡고 무거운 얼굴들이 보고 싶었습니다. 새벽까지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였습니다.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방어진행 버스를 탔습니다. 남목 고개를 넘자 드디어 현대중공업이 나타났습니다. 87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남목 고개를 넘어 시청으로 갔는데 나는 그 길을 따라 현대중공업으로 돌아갑니다.
현대중공업 중전기문까지 오는 담벼락에는 온통 장미꽃이 피어있었습니다. 장미꽃이 경비대들처럼 현대중공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지난 초봄, 죽음을 뚫고 연두빛의 새싹처럼 발화하던 깃발과 구호들, 박일수 열사 정신 계승을 외쳤던 동지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박일수 열사는 동지들의 가슴 곳곳에 뿌리를 내렸을까 장미꽃에 갇힌 절규, 장미꽃에 갇힌 저 담장안의 착취,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는 온전하게 노동자계급의 것이나, 난 착취의 외각 경비초소인 장미꽃이 폭력보다 고통스럽고 두렵습니다).
동해안에서 떠오른 아침햇살은 죽음의 공장을 가로 질러 착취의 외각 경비초소인 장미꽃잎을 지나 현대중공업 중전기 정문 앞에서 집중적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출근하는 하청 동지들은 중전기 정문 앞의 빛나는 아침햇살 속으로 일제히 질주했습니다. 장미꽃보다 장관입니다. 장미가시보다 날카롭고 위력적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 승리하지 못했지만 패배하지는 않았습니다. 저 집단적인 모습들, 저 일사 분란한 행동들 꽃빛입니다. 다시 저 꽃빛 속으로 힘찬 출발, 머리띠를 묶었습니다. 박일수 열사의 비타협적 투쟁 정신을 함께 묶었습니다. 파워그라인더공 임단협 투쟁의 힘찬 함성을 함께 묶었습니다. 또 다시 구속되고 감옥에 가더라도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박일수 열사의 절규와 함께 하겠다고, 우리 하청노동자들의 의지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청노조 사무실에는 박일수 열사의 영정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영정사진은 “열사정신계승” 머리띠를 둘렀습니다. 박일수 열사 살아생전, 함께 술 마시고 논쟁하고 함께 투쟁했던 시간들, 열사의 눈빛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멀리 있으나 이렇듯 가깝게 파워그라인더공 임단협 투쟁에 함께 했습니다.


두 번째 편지 - 미래의 사람들

2004년 5월6일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들은 대표자 회의를 통해 건조 식당에 모이기로 하고 리본 달기를 결정했습니다. 건조식당에는 2-30명이 모였고 정말 긴장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 동지들과 조합원들은 가슴에 리본을 달고 함께 뭉쳐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식당 분위기는 술렁거렸습니다. 리본을 달고 업체에 들어가도 업체 관리자들은 리본을 단 조합원들을 감히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 부서 직영 사무실에서 있었던 부서 안전결의대회 때도 조합원들은 리본을 달고 참여했고 직영 과장은 연설을 하면서 눈치만 볼 뿐 조합원들에게 리본을 떼라고 강요하지 못했습니다.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들은 현장에서의 최초 공개 활동인 리본달기를 하면서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조합원들은 당당하게 업체 게시판에 [조합가입하자. 임금삭감 결사반대]라고 매직펜으로 써놓고 관리자들이 지우면 다시 쓰는 투쟁을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업체에서 조합원들에게 날아든 계약만료 통지서에 대항하여 전체 파워그라인더공 조합원이 업체 항의투쟁을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계약만료 통지를 유보하게도 했습니다. 리본달기, 파워그라인더공 조합원들의 업체 항의 투쟁 등을 통해,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조금씩 회복되어 갔습니다.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들은 임단협 요구안들을 업체로 보내고 교섭을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조합 집단가입과 교섭요구투쟁의 전형들을 만들어나갔습니다. 그리고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들은 현장에서 집단적인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파워그라인더공 티를 제작하고 현장에서 파워그라인더공 조합원들과 함께 티를 입고 일했습니다.
조금씩 현장 활동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고, 현장 동력들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사측은 노골적인 도발을 하지 않고, 오히려 무대응으로 일관하면서 우회적인 방식으로 업체를 치고 들어왔습니다.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 회의에서는 사측의 탄압에 맞서 파워그라인더공 특보 발행을 결정하고 업체에 직접 배포함으로써 공개적인 현장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회의가 열리고 이 자리에서 업체 상황이 공유되고 투쟁 지침이 결정되었습니다. 업체에서 파워그라인더공 특보를 배포하고 점심때에는 30-40여명이 참여하는 중회를 개최하면서 스스로 투쟁 결의를 끌어올리고 공개적인 현장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높여 갔습니다. 이러한 현장 투쟁을 통해 가라앉은 분위기를 회복하고 머뭇거리는 조합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하지만 4월10일 동구청 집단가입 이후, 한 달 동안의 현장 투쟁 부재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복원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미 조합원을 제외한 모든 하청 동료들이 시급 전환 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한 상태였고 조합원들은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회의에서는 재차 파워그라인더공 총회 개최를 결정하고 특보를 통해 이를 파워그라인더공 조합원들에게 알려냈습니다. 사측은 파워그라인더공 총회에 맞서 업체 회식을 잡으면서, 그리고 개별적인 회유와 협박을 통해 총회를 무산시키려 했습니다.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들은 더욱 결연한 의지로 조끼와 머리띠를 두르고 중식 식당 배포를 결정하고 파워그라인더공 총회 성사를 위해 투쟁했습니다. 정말 예전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고 두려웠던 일들을, 대표자 한 동지의 표현에 의하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투쟁을 전개하면서도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들은 정말 신이 났습니다. 파워그라인더공 조합원들, 다른 직종 조합원들과 하청노동자들, 그리고 직영노동자들의 반응은 대단히 뜨거웠습니다.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 동지들의 과감한 현장투쟁을 통해 사측은 공포에 빠져들었고 동구청 파워그라인더공 임단협 투쟁 결의대회에 간 사람들, 사진 찍어 전원 해고하겠다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업체 대표자들이 동구청 입구를 어슬렁거려도 대표자들과 조합원들은 당당하게 돌파했습니다. 80여명의 파워그라인더공 조합원들, 비조합원들이 사측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임단협 결의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오히려 얼쩡거리는 관리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투쟁가를 배우면서 부르고 하청노동자도 당당하게 살고 싶다는 구호도 외쳤습니다. 5월27일 마침내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도 규모와 형식을 갖춘 중식집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들은 당당하게 파업까지 결의했습니다.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들은 대표자회의를 통해서 업체 상황을 공유하고 대응 방침들을 스스로 제안하고 논쟁하고 결정하고, 결정한 것은 반드시 집행함으로써, 대표자회의 스스로의 권위를 강화시켜나갔습니다. 책임 있게 발언하고 또한 결정한 것은 반드시 책임 있게 집행함으로써 대표자 회의는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들이 ‘단결을 학습하고 투쟁의지를 끌어올리는’ 활동하는 기구로 발전하였습니다.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 동지들은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의 미래를 대변하는 동지들입니다. ‘미래의 사람들’입니다. 지금 당장 중공업 모든 하청노동자들이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 동지들처럼 될 수는 없어도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한, 법에 보장되어 있는 권리를 찾고, 임금과 고용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은 시작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투쟁 속에서 중공업 하청 동지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전혀 새로운 힘으로 일어서리란 걸 믿습니다. 모든 중공업 하청 동지들이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 동지들처럼 자신들의 창조적이고 폭발적인 힘들을 보여주리란 걸 확신합니다.
파워그라인더공 조합원 동지들이 예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을 거침없이 해내고 당당하게 만들어가는 모습들 속에서 박일수 열사를 보았습니다. 박일수 열사는 노조 사무실 영정 사진이 아니라 파워그라인더공 대표자들의 모습 속에서, 파워그라인더공 임단협 투쟁의 선두에 섰던 조합원들의 모습 속에서, 하청노동자들의 타오르는 강한 힘으로 살아 움직였습니다.


세 번째 편지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작년 가을,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늙은 하청노동자 한 분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수고가 많다. 도움도 못 주고 미안하다. 하지만 악착같이 가라. 우리는 숨죽이고 있지만 잘 될 거다 ”고 격려해줍니다. 버스가 오고 늙은 하청노동자도 집이 같은 방향이라서 함께 버스를 탔습니다. 10시가 넘은 시간인데 퇴근하는 하청 노동자들이 보였습니다. 저 검고 어두운 얼굴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 한켠이 아파 옵니다. 함께 대화하고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환갑이 가까워오는 나이였는데도 이 분은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모자를 잠깐 벗었는데 머리 숯이 별로 없었습니다. 머리도 반백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늙지 않았다. 젊은 친구들보다 일도 잘해서 업체 사장이 잡는다”고 자랑도 하셨습니다. 한문도 많이 알아서 메모지에다 日新又日新 한자를 적어 놓고 “하루하루 꾸준하게 발전하는 하청노조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술한잔 하자고 한사코 제가 사는 곳까지 따라오십니다. 수퍼에서 캔 맥주와 소세지를 사서 거리에서 맥주를 마셨습니다. 늦가을이지만 환갑이 내일 모레인 형님과 함께 술을 먹는 거리는 따뜻했습니다. 전혀 새로운 삶이 싹트는 놀라운 공간이었습니다. 20십년 차이를 넘어 형님과 한 몸이 됐습니다. “너는 투사다. 그런데 투사가 배가 나와서 되겠냐?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라”고 호되게 비판도 해주십니다. 나서지는 못하지만 후원금을 내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두번 연락할 테니, 너는 한 번만 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님노동자와 술을 먹으면서 제대로 투쟁하지도 못하는데 여전히 하청노조에 대해 신뢰를 보내주시는 모습이 참 고맙고 부끄러웠습니다. 그간 이러저런 외부회의, 연대집회에 참가하면서 자주 조합원에게 연락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사무실 옥상에 올라가면 그라인더 소리가 들립니다. 그라인더 소리가 들리는 지척에 사무실이 있지만 이 사무실이 서울보다도 더 멀게 느껴집니다. 서울에 있으나, 그라인더 소리가 들려오는 지척에 있으나 현장 상황을 잘 모르고 현장감이 떨어지는 것은 똑 같습니다. 그만큼 조합원 동지들과의 소통이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현장 탄압이 심하다고 해도, 조합원 동지들이나 동료분들이 날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고 해도 이 거리를 좁히는 것은 동료들보다 내 몫이 큽니다. 조합원들이 찾아오기 전에 내가 먼저 조합원에게 다가가야 하는데 비대해진 몸은 게을러지고 지쳐있었습니다. 현장 조합원들보다 제가 더 위축되어 있다는 것이 더 치명적입니다. 하청노동자 형님 말씀처럼 “박일수 열사의 정신을 가지고 투쟁하라!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녀라!”는 말씀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찌르고 정신을 번쩍 들게 했습니다.
지금 당장 움직이지는 않지만, 정말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견디는 우리 하청 조합원 동지들, 동료분들은 하청노조보다 백배는 강하고 낙관적이고 희망적입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어두운 길목에서 어떤 책에서도 못 배운 삶과 투쟁을, 하청 동료들에게서 배웁니다.
현장으로부터 배우지 않고, 현장을 조직하지 않고, 현장으로부터 투쟁을 만들지 못하는 노조는 죽은 노조다. 열사의 투쟁지침입니다.

네 번째 편지 - 지금 열사정신은 무엇으로 살아있는가?

2004년 2월14일, 박일수 열사 1주기입니다. 직영활동가 동지들과 하청 조합원들이 열사가 분신한 현장, 그 자리에서 현장 추모제를 진행하려 했습니다. 사측 경비대들과 구사대들은 현장 동지들을 블록 밑으로 밀어 넣고 막아버렸습니다. “저항하면 짓밟아버려라” 경비대장의 지시, 경비대들에게 살기가 느껴졌습니다. 묵념이라도 하기 위해 한 동지가 발언을 하려 하자 경비대들과 구사대들은 동지들을 해산시켜버렸습니다.
병영 같은 통제, 인간적인 숨구멍조차 막아버리는 폭력, 정말 죽을 것 같은 노동강도, 휴지조각으로 전락한 박일수 열사 합의서, 여전히 조합원임을 공개하지 못하고 숨죽이는 하청노동자들, 공장 밖으로 쫓겨나고 블랙리스트에 걸려 취업길까지 막혀 고통당하는 하청조합원들, 여전히 조합원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지 못하는 전국금속노조 현중 사내하청지회…….
박일수 열사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죽어라고 투쟁한 결과가 이것 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 심장에 통증을 느끼게 하고 가슴 속에 들어 찬 울음보를 터지게 했습니다.
참담한 심정을 가지고 솔밭산 박일수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박일수 열사 묘소 앞에 모인, 지역과 전국의 동지들, 모두 무겁고 어두운 표정이었습니다. 박일수 열사는 우리에게 하루하루 투쟁의 동력이자, 쉼터이자 새로운 사상으로 일어서는 원전과 같은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닌가? 과연 열사 정신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말로 외치는 열사정신은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자 우리의 무기력을 변명하는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닌가? 참배를 진행하는 시간 내내 고통스러웠습니다.
모든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전락시키려하고,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려는 자본의 유연화 공세 앞에 과연 박일수 열사는, 우리의 열사 정신은 무엇인가? “자본으로부터 민주노조운동의 정치 조직적 독립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현장으로부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투쟁을 강화하는 것이다. 자본의 공격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것이다” 박일수 열사 앞에 절을 하면서 박일수 열사의 호된 비판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투쟁 동력이 없다는 이유로 상설적인 노사합의기구에 들어가려고 하는 민주노총 지도부, 현자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경비대들과 구사대들에게 깨져도 팔짱 끼고 있는 정규직 노동조합, 투쟁보다는 협상을 통한 마무리와 수습을 먼저 고민하는 노사협조주의 공고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무기력함, 박일수 열사 앞에 우리 모두는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부끄러운 죄인들이지만 죽어도 열사를 꿈꾸지 않습니다. 박일수 열사처럼 죽어라고 현장을 조직하고 현장으로부터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하청노동자들의 절박한 삶과 열사의 절규를 이어 받는 제 행동이, 우리의 실천이, 비록 어설프고 초라할지라도 이 어설프고 초라한 모습에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시간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천의 결과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게, 더 이상 무능력해서 때를 놓치지 않게 하렵니다.
박일수 열사여! 때로는 비판으로, 때로는 새로운 사상으로, 때로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로, 새로운 실천으로 죽음의 공장으로 돌아오십시오. 마침내 자본가들을 공포에 빠뜨릴 하청노동자들에 의한 대중파업 속에서 박일수 열사는 만 오천 하청노동자들의 힘찬 함성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그 날을 위해 전진하렵니다.

2005년 2월 14일 조성웅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