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탁류 속의 맑은 물결

탁류가 황포히 흐르는 금일에 있어 한가지 맑은 물결이 새암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캄캄한 밤중에 밝은 등불같이 진정한 공산주의 운동은 백색 테러 시기로부터 오늘날까지 계속 빛나고 있다. 박헌영,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1945.8.20.), 󰡔이정박헌영전집󰡕제2권, 역사비평사, 2004, 51쪽. 이하 󰡔전집󰡕으로 줄임.


박헌영은 8․15 해방 직후에 집필한 글에서 이처럼 썼다.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 지 불과 닷새 뒤에 탈고한 글이었다.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본래 제목보다 ‘8월테제’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이 글은 영향력을 기준으로 보자면 한국 사회주의 역사 속에서 손꼽을만한 상위 문헌들 가운데 하나다.
그는 인상적인 레토릭을 구사하고 있다. 해방 전 10여 년 동안 사회주의자들은 둘로 나뉘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황포처럼 흐르는 탁류다. 탁류란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두려워한 나머지 혁명운동을 배반한 전향자와 운동을 포기한 청산주의자를 가리킨다. 특히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이후에 그들은 투기업과 광산업에 몰려들어 평안한 살림살이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탁류에 섞이지 않는 맑은 물결이다. 마르지 않는 샘으로부터 한줄기 맑은 물이 솟아 흐른다고 썼다. 난무하는 백색테러의 공포를 무릅쓰고 운동에 헌신한 투철한 사회주의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탁류와 샘물’의 비유는 선명한 시각적 대비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효과는 ‘어둔 밤 등불’의 비유로 인해 더욱 증폭된다. 갈길 몰라 헤매는 캄캄한 밤중에 등불과 같은 역할을 행한 사회주의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8월테제는 폭넓게 유통되었다. 작성된 지 한 달 뒤인 9월 20일에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채택했다. 8월테제는 그 모본이 되었다. 이 결정서는 당의 전략․전술론을 명시한 문서로서 해방 직후에 제시된 각종 정책의 이론적 뒷받침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샘물과 등불의 비유는 사람들 입에 널리 오르내렸다. 누가 탁류이고 누가 맑은 물결인가. 이 문제는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재건 과정에서 주류와 비주류를 가르는 기준점으로 간주되었다.
비주류 위치에 처한 사람들은 분노를 터트렸다. 당권을 쥔 박헌영 계열의 사회주의자들이 터무니없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보았다. 일찍이 북풍파 공산그룹의 일원으로 운동권에 입문했던, 경남도당 지도자 박용선(朴容善)의 말을 들어보자. 당권파 인사들은 경성콤그룹 하나만이 탁류 속의 한줄기 맑은 샘이고 어둔 밤의 등불이라고 떠들었다고 한다. 특히 지방 조직을 정돈하기 위해서 파견되어 온 당 중앙의 요인들이 그러했다. 해방 직후 경향 각지에서 공산당 조직 정비가 활발히 이뤄지던 4-5개월 사이의 일이었다. 경성콤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회주의자들을 가리켜 반당분자이거나 쁘띠부르주아적 요소라고 낙인을 찍곤 했다는 것이다.
이정윤(李廷允)의 불만은 더욱 컸다. 서울파를 거쳐 엠엘파 공산그룹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그였다. 그는 사회주의 운동사를 정통과 비정통으로 가르는 행위는 현재 진행 중인 운동을 혼란에 빠트릴 뿐이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그는 경성콤그룹이 무엇인지 이름도 잘 모르겠다고 냉담하게 말했다. ｢중앙 급 지방동지 연석간담회 회의록｣(1946.2.19-2. 21.), 󰡔전집󰡕5, 395-396쪽.

이 비난들은 조선공산당 중앙과 지방의 지도적 인사 50여명이 참석한 연석간담회 석상에서 표출된 것들이었다. 근거 없는 비난을 행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자리였다. 경성콤그룹만이 맑은 샘이자 유일한 정통파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음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논란이 분분했다. 박헌영과 함께 당재건운동에 종사했던 이들이 해명에 나섰다. 권오직(權五稷)은 경성콤그룹이 국제노선을 가장 잘 실행에 옮겼다고 주장했다. 조두원(趙斗元)은 경성콤그룹만이 맑은 샘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지만, 비타협의 견실한 사회주의자들 가운데에서 경성콤그룹이 가장 우수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위 글, 397-398쪽.

어지러운 논란을 잠재우려면 박헌영이 직접 나서야 했다. 그는 8월테제에 적힌 표현을 풀어서 설명했다. 자신은 경성콤그룹만이 어둔 밤의 등불이라고 쓰지 않았음을 상기했다. 나아가 ‘부하 동지들’이 그와 같이 말했다면 그것은 과오를 범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가 말한 탁류란 1937년 이후 합법주의자와 청산파, ‘전향하고 스파이질도 하고 있는 자들’을 지칭한다고 한다. 또한 맑은 물결이란 ‘백색 테러 시대에도 용감히 싸운 조선혁명운동 전체를 규정한 것’이지, ‘박헌영파’만 가리킨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위 글, 399-400쪽.

당내 화합을 위해서는 그와 같이 발언하는 것이 옳았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회의장을 무마하기 위해서 행한 임기응변의 발언은 더욱 아니었다. 실제로 8월테제 속에서 경성콤그룹만을 가리켜 혁명운동의 정통이라고 명시한 구절은 찾아볼 수 없다. 전후 문맥상으로 볼 때 박헌영의 해명은 8월테제의 문면에 부합한다.
하지만 8월테제의 문면을 꼼꼼히 분석해 보면 탁류 속 맑은 물결의 비유는 2중적 맥락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헌영의 해명은 그중 하나의 맥락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의 맥락은 무엇인가. 핵심 구절을 직접 읽어보자. “모든 곤란한 환경 하에서도 어쨌든 국제노선을 대중 속에서 실천하는 진실한 의미의 콤그룹의 공산주의 운동이 비합법적으로 계속했던 것은 사실이다”는 문장이 그것이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1945. 9. 20.), 󰡔전집󰡕5, 56쪽.
우리는 ‘국제노선을 대중 속에서 실천하는 진실한 의미의 콤그룹’이라는 구절에 주목한다. 박헌영이 8월테제를 통해서 드러내고 싶었던 심층 의식은 바로 이 구절에 응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잡지 󰡔콤무니스트󰡕와 국제선 공산주의그룹

출발이 지연된 이유는 제가 경유해야 할 만주의 극도의 비상상황에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만주의 일본경찰이 제 사진을 소지한 채 검문하고 있으며, 제가 중국어를 전혀 모른다는 저의 특수한 상황에 있습니다. … 가능하다면 제가 유럽을 경유해서 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유럽은 최대한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이며, 출발은 더 이상 지연되지 않을 것입니다. Lee-Chun, Statement to the Eastern Secretariat of the ECCI, 1931. 12. 13,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79 л.56 (󰡔전집󰡕1, 119쪽)


박헌영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1931년 12월 13일 모스크바에서였다. 당시 그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하여 코민테른이 직접 설립한,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의 3인 최고 간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또한 각 나라 공산당의 고위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코민테른이 설립한 국제레닌학교의 졸업 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에 대한 코민테른 관료들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상해로 떠날 참이었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현장에서 지도한다는 어렵고도 중요한 임무가 그에게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이미 기관지 󰡔콤무니스트󰡕 발행 사업과 국내 조직사업이 진행 중이었다. 조선위원회 전권위원 김단야(金丹冶)가 1930년 9월부터 이미 그 일을 주관하고 있었다. 잡지 󰡔콤무니스트󰡕는 1931년 3월과 5월에 각각 발간된 바 있었고, 국내에는 김형선(金炯善)을 비롯한 3인의 조직가가 파견되어 있었다. 국내에 잠입한 혁명가들을 중부, 남부, 북부로 관할 구역을 나눈 채 맹활약 중이었다. 선전과 조직, 양대 분야에 걸쳐서 당재건을 위한 기초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박헌영이 가세한다면 호랑이에 날개를 단 기세가 될 터였다.
운동 현장에 임하는 일은 가시밭길에 들어서는 것과 다름없었다. 모스크바에서 상해로 여행하는 일부터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불과 세달 전인 1931년 9월 18일에 일본의 만주 침략전쟁이 불을 뿜었다. 만주는 전쟁터로 화했을 뿐 아니라 일본의 확고한 세력권으로 변했다. 만주가 ‘극도의 비상 상황’에 처했다는 말은 이를 뜻했다. 이 때문에 열차 편으로 모스크바를 떠나 이르쿠츠크, 치타, 만주리(중소국경도시), 하얼빈, 장춘, 북경, 상해로 향하는 장거리 여행 경로는 피해야 했다. 만주리에서 북경에 이르는 중간 경유지가 박헌영에게는 사지나 다름없었다. 만주 일대의 철도를 장악한 일본 경찰은 승객 속에 불온한 이가 없는지 감시하느라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들이 박헌영 사진을 소지한 채 검문하는 데에는 곡절이 있었다. 3년 4개월 전인 1928년 8월,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사건 재판에 계류된 몸으로서 병보석 출감 중에 극적으로 식민지 조선을 탈출했다. 경찰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를 추적했다. 게다가 박헌영은 중국어 회화를 할 줄 몰랐다. 일단 철도경찰에게 의심이라도 받는다면 그 순간부터 그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질 판이었다.
박헌영은 유럽 경유 노선을 따라서 상해로 가기를 희망했다. 발틱해 연안의 항구도시를 떠나 북해, 지중해, 수에즈운하, 인도양, 말라카 해협, 남중국해를 거쳐 상해로 향하는 장거리 해로 여행이었다. 이 여행길은 한국 혁명운동사에서 이름난 길이다. 1919년에 베르사이유 평화회의에 파견된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金奎植)이 밟았던 길이었다. 1921년에는 이동휘(李東輝), 박진순(朴鎭順), 이극로(李克魯) 등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표단이 거쳤던 길이기도 했다. 그때 세 사람은 러시아내전 때문에 막혀버린 육로 대신에 상해에서부터 모스크바까지 해로 여행을 선택했고, 꼬박 세 달이 지난 뒤에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박헌영은 값비싼 경비 때문에 미안해했다. 게다가 동행자가 있었다. 혁명의 동료이자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그의 아내 주세죽(朱世竹)과 동행하는 길이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컸다. ‘최대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경로를 택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박헌영․주세죽 부부가 상해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 1월 25일이었다.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2004, 169쪽. (󰡔전집󰡕 9, 206쪽).
그들이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상해에 도착한 게 위 편지를 쓴 시점으로부터 한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난 뒤였음을 미뤄보면, 그의 요청은 기각된 듯하다. 이동에 필요한 시간이 너무 길다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헌영의 가담은 재상해 󰡔콤무니스트󰡕 발간 사업에 커다란 활력을 가져왔다. 조선공산당 재건 사업의 현지 사령탑을 함께 맡게 된 김단야와 박헌영은 업무를 분담했다. 김단야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앞으로 보낸 보고서의 일절을 읽어보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조정했다. 나는 이춘(박헌영-인용자)을 제외한 다른 조선인 동무들과의 접선을 단절하며, 이춘은 연락원과의 접선, 인쇄 업무, 국내와의 연계, 운송 등 우리 사업의 모든 기술적 측면을 담당한다고. Kimdanya(김단야), Report on the publication of journal "Communist" for Korea, 1934. 2. 8, p.1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94 лл.2-21.


김단야가 업무 일선에서 한걸음 물러나고 박헌영이 그를 대신했음을 알 수 있다. 󰡔콤무니스트󰡕의 발간, 국내 조직과의 연락, 그 밖의 모든 실무를 박헌영이 감당하게 되었다. 1932년 이후 박헌영은 당 재건운동의 현지 업무를 사실상 총괄하게 되었다. 그에 관한 전권을 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박헌영이 참가한 이 공산그룹의 성격을 둘러싸고 역사학계 내에 논란이 일었다. 그 그룹은 화요파에 다름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콤무니스트󰡕는 화요파의 당재건운동 기관지라는 얘기이다. 사회주의운동사 연구의 개척자로 지목받는 김준엽․김창순이 일찍이 이와 같이 말했다. 두 사람은 이 잡지와 관련을 맺고 활동한 사회주의자들 면면에 주목했다. 그들은 “누가 보던지 화요계 그룹”이라는 게 두 사람의 판단이었다.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5,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6, 337쪽.
설혹 그들이 주관적으로 종파주의 배격을 열망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이 화요파 종파주의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오랜 기간 동안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다.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관한 짜임새 있는 논문을 쓴 일본인 학자 호리우치(堀內捻)도 그렇게 분류했다. 堀內捻, ｢1930年代朝鮮共産黨再建運動｣ 󰡔1930年代硏究󰡕 (むくげの會 編, 三一書房, 東京) 1984; ｢조선공산당재건운동｣, 󰡔1930년대 민족해방운동󰡕, 출판부 역, 거름, 1984, 301-305쪽.

이 견해에 의문을 던진 첫 연구자는 우동수이다. 그는 위 견해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우동수의 연구 성과를 보면, 화요파 계열로 알려진 공산당재건운동 참가자들은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 태평양노동조합 등과 같은 국제혁명기관의 직접 지도하에 활동한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고 한다. 우동수, ｢조선공산당재건운동과 코민테른｣,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한길사, 1991, 594쪽.

최규진은 우동수의 착안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구 코민테른문서보관소 소장자료를 섭렵한 바탕 위에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1929-1930년의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와 1931-1933년의 󰡔콤무니스트󰡕 관련자들을 한데 묶어 ‘콤무니스트 그룹’이라고 명명했다. 이 그룹은 지난날의 ‘화요파’ 운동을 계승한 게 아니라 그와 단절했다고 한다. 화요파 전통을 묵수하는 재만주 󰡔불살󰡕 그룹을 배척한 것은 그 보기이다. 최규진에 따르면, 잡지 󰡔콤무니스트󰡕의 발행 주체는 과거의 분파적 전통과 절연하고 코민테른의 지지와 후원 속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 한 국제노선의 지지자들이다. 최규진, ｢‘꼼뮤니스트 그룹’과 태평양노동조합 계열의 노동운동 방침｣, 󰡔역사연구󰡕5, 역사학연구소, 1997; 최규진, ｢‘꼼뮤니스트 그룹’의 당재건운동｣,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성대경 엮음, 역사비평사, 2000.

두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실제에 부합한가? 󰡔콤무니스트󰡕는 화요파 공산주의 그룹의 당재건운동 기관지인가, 아니면 과거의 분파적 전통과 단절된 국제노선의 기관지인가. 우리는 잡지 󰡔콤무니스트󰡕의 설립 경위를 추적하면 이 물음에 답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기원에 관한 성찰이 사물의 본질을 해명하는 단서를 주기 때문이다.
잡지 󰡔콤무니스트󰡕 설립을 주도한 기관은 코민테른 조선위원회였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에 결성된 이 위원회는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의 잠정적인 최고 지도부였다. 조선공산당의 지부 자격을 취소했던 코민테른이 그 재건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이 위원회를 조직했던 것이다. 조선위원회 첫 번째 회의는 1930년 1월 31일에 열렸는데, 이를 감안하면 이 위원회가 결성된 시점은 그 전년도 하반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위원회 첫 회의에 참석한 이는 여섯 사람이었다. 쿠시넨(Куусинен), 미프(Миф), 마쟈르(Мадьяр), 최성우(崔成宇), 박애(朴愛), 박헌영이 그 면면이다. Протокол №1 от 31.Ⅰ.30 г. заседания корейской комиссии Востсекретриата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회의록 제1호), 1930년 1월 31일,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421 л.1 (󰡔전집󰡕4, 383-384쪽).
이들이 곧 조선위원회 위원이었다. 이중 조선인은 세 사람인데, 이들은 ‘트로이카’라고 불렸다. 세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일컫는 러시아어였다. 이 트로이카는 코민테른에 의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지휘하는 최고위 지도부 성원으로 간주되었다.
잡지 󰡔콤무니스트󰡕 설립안이 처음 마련된 시점은 1930년 3월 4일이었다. 이날 열린 코민테른 조선위원회 제3회 회의 석상에서 ｢사업계획안｣이 심의되었다. Протокол №3 от 4.Ⅲ.30 г. заседания корейской комиссии Востсекретриата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회의록 제3호), 1930년 3월 4일,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421 л.3 (󰡔전집󰡕4, 387-388쪽).
이 계획안을 보면, 󰡔콤무니스트󰡕라는 명칭의 월간지를 만들되, 그 출판지는 당분간 블라디보스톡으로 정한다고 되어 있다. 기관지 책임 편집국원으로는 김단야, 최성우, 김정하(金鼎夏) 세 사람을 선임하며, 1930년 5월 15일 이전에 잡지의 첫 호가 나올 수 있도록 조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Практические проедложения,(1930년 3월 4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제3회 회의에 제출된 사업계획안)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421 лл.4-5 (󰡔전집󰡕4, 389-390쪽).

이 계획안은 심의 과정에서 두 가지가 변경되었다. 하나는 출판지 문제였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토인 블라디보스톡에서는 한글 잡지의 출판이 불가능하므로 상해(上海)에서 출판을 시작한다고 변경되었다. Практические предложения по вопросам, подлежащим дополнительному разрешению в корейской комиссии ИККИ,(코민테른 집행위 조선위원회에서 추가로 결정되어야 할 문제들에 관한 사업계획안 :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회의록 제4호 첨부문서), 1930년 3월 14일,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421 лл.9-10 (󰡔전집󰡕4, 395-397쪽).
다른 하나는 잡지 창간호의 발간일 문제였다. 잡지 출간에 필요한 실무적인 준비가 미흡했기 때문에 그 기일은 뒤로 연기되었다.
조선위원회는 잡지 출간을 구체화하기 위해 자금을 배정했다. 1930년 5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잡지 출판에 필요한 예산안은 3,600달러였다. 예산안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콤무니스트󰡕 발간을 위한 매월 경상비는 450달러로 책정되었다. 편집국원 1인당 매달 50달러씩 급료가 지급되고, 비밀 출판소로 사용될 사무실 임대료로 매달 50달러가 상정되었다. 또한 종이, 식자, 인쇄, 장정 등에 지출되는 비용은 매월 100달러, 조선 국내로 잡지를 운송하는 데에 소요되는 예산은 매월 150달러로 책정되었다. 그 밖에 편집국원 3인의 상해 정착을 지원하기 위한 임시 보조금도 책정되었다. 1인당 75달러씩, 도합 225달러였다. Ориентированная смета на издание месячного журнала на корейском языке в Китае,(중국에서의 조선어 월간 잡지 발행에 관한 대략적 예산 :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회의록 제4호 첨부문서), 1930년 3월 14일,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421 л.32 (󰡔전집󰡕4, 398쪽).

잡지 󰡔콤무니스트󰡕의 창간 경위를 보면, 코민테른의 주도적 역할이 두드러짐을 확인할 수 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잡지 창간의 계획안을 냈고, 편집국원을 선임했으며, 출간비용을 제공했다. 코민테른이 일개 잡지 출간에 대해 이처럼 깊숙이 개입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잡지 󰡔콤무니스트󰡕 설립안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더욱 포괄적인 사업계획안의 일부였던 것이다.
코민테른의 사업계획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고위직 조선인들의 면면을 보자. 최성우는 사회주의운동 초창기에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한 경력이 있다. 박헌영과 김단야는 한때 이르쿠츠크파를 거친 뒤 화요파에 몸담았던 이들이다. 박애와 김정하는 잘 알려진 상해파 인사이다. 문제의 요점은 이들이 각 그룹을 대표하는 입장에 서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이들은 과거에 여러 그룹에 몸담았지만, 종래의 분파적 전통과 절연하기로 결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코민테른이 제시하는 노선에 따라 새로운 운동 지평을 개척하려는 탈 종파적 인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조선위원회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29년 이후 이 입장에 서서 사회주의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을 가리켜 뒷날 ‘국제선’(國際線)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콤무니스트󰡕 창간 선언문 중에서 다음 문장이 눈에 띤다. “우리는 … 국제공산당의 지시와 노선을 실지에서 수행하기 위하여 이 󰡔콤무니스트󰡕를 발행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창간선언｣, 󰡔콤무니스트󰡕1, 1931년 3월, 3쪽.
‘국제선’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면모가 뚜렷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국제선의 국내 조직은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갖고 있었는가?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1930년 전후 공산주의 그룹들의 비밀스런 내부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가 드물기 때문이다. 다행히 1932년 7월 현재 국제선 그룹의 대략적인 국내 조직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조선 내에는 20개 안팎의 세포 단체가 조직되어 있었고, 그에 망라된 구성원은 90여명이었다. 김단야, 앞 글, 4쪽.

세포단체의 분포지는 주로 도회지였다. 노동자들의 밀집 지구로 지목되는 인천, 평양, 진남포, 부산, 마산, 목포에는 예외 없이 세포단체가 조직되어 있었다. 세포 단체 1개당 구성원은 평균 4.5명이었다. 경찰의 감시망에 맞서 활동해야 하는 비밀결사의 속성에 비춰볼 때 적은 숫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1920년대 중반 조선공산당 전성기의 조직 역량과 비교해 보자. 1925년 4월 당창립대회 당시 당원 숫자는 130명이었다. Доклад делегата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Партии Кореи тов.Чо-Донхо (Тян-кукво): в исполнительный комитет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го интернационала(조선공산당 대표 조동호가 코민테른에 제출한 보고서), 1925. 12. 25, 7-8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10 лл.162-187.
그로부터 1년 뒤인 강달영 책임비서 시기에도 당원 숫자는 그다지 늘지 않았다. 1926년 3월 현재 조선공산당의 세포단체는 29개이고, 그 속에 146명의 당원이 망라되어 있었다.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 책임비서, ｢조선공산당 현황에 관한 보고｣(1926.3.17),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1,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1932, 36-39쪽.
이로 미뤄보면 1930년 초반 국제선 그룹의 국내 조직 역량은 1920년대 조선공산당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크게 뒤처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숫자만을 대비해 본다면 대략 2/3에 해당하는 조직 역량을 유지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국제선은 조선공산당 해체 이후에 코민테른으로부터 존립의 의의를 인정받은 유일한 공산주의그룹이었다. 코민테른의 직접적인 지도 하에 놓여 있었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그룹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내부에 설치된 조선위원회의 정치적, 조직적 지도를 받았다.
1920년대만 하더라도 모든 공산주의 그룹들은 코민테른으로부터 혁명적 의의를 인정받았다. 초창기에는 상해파, 이르쿠츠크파가 그랬다. 나중에는 화요파, 서울파, 북풍파, 엠엘파, 서상파도 그러한 대접을 받았다. 코민테른은 각 그룹의 통합을 바탕으로 조선공산당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달랐다. 코민테른은 국제선을 제외한 모든 공산주의 그룹을 ‘종파’로 규정했다. 모든 공산그룹들이 반혁명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코민테른은 기존의 분파적 전통과 절연한 기초 위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자 했던 것이다.
국제선은 일개 그룹일 뿐이지 당은 아니었다. 코민테른의 지부로 가입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 사회주의 운동 대열 내에서 조선혁명을 대표하는 지위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국제선은 조선 혁명계 내에서는 당적인 영향력을 자임했다. 그것은 여러 공산주의그룹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그 이상이었다. 코민테른은 1920년대에 조선공산당을 승인했듯이, 1930년대에는 국제선 공산주의그룹 만을 인정했다. 그 때문에 코민테른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국제선은 아직 당은 아니지만 당에 못지않은 수준의 대표성을 갖고 있었다.


3. 국제선과 비국제선

조선에 나와보니 권영태(權榮台)동무와 이재유(李載裕) 동무가 싸우고 있었다. 그 싸움의 원인은 권영태 동무가 국제오르그라고 주장한 데 있으며, 그것은 확실히 권영태 동무가 옳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1939년 내가 대전에서 나왔을 때 경성콤그룹이 있음을 알고 그 속에 들어가 일했다. ｢중앙 급 지방동지 연석간담회 회의록｣(1946. 2. 19-2. 21), 󰡔전집󰡕5, 399쪽.


박헌영은 경성콤그룹에 합류할 당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6년 2개월에 걸친, 생애 세 번째 수감생활을 마치고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한 때는 1939년 9월이었다. 일본이 중국침략전쟁에 나선지 2년이 지났고,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개막한 바로 그 달이었다. 국내외 정세가 요동쳤다. 온 세계가 전쟁에 휘말리고 식민지 조선에서는 총동원정책과 파시즘이 기세를 올리던 때였다. 바로 그때 박헌영은 다시 운동 일선에 뛰어 들기로 결심했다.
지상에서는 그 어떤 반일운동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박헌영의 표현에 따르면, “민족주의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막론하고 과거 지도자들이 혁명투쟁을 거부”하고 있던 때였다. 다행히 그는 지하에서 활동 중인 유력한 사회주의 세력을 발견했다. ‘이관술(李觀述)과 김삼룡(金三龍)이 지도하는 그룹’이었다. 다시 박헌영의 표현에 따른다면, “공산주의 운동에 충실하고 혁명사업을 지속한 유일한 단체”였다. 박헌영, ｢이력서｣(1945.9.), 󰡔전집󰡕9, 220쪽.

위 인용문을 주의 깊게 읽어보자. 권영태가 옳지 못했기 때문에 박헌영이 경성콤그룹에 들어가 일했다고 한다. 두 사실은 박헌영의 의식 속에서는 인과관계를 구성한다. 권영태와 이재유가 다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두 사람은 1930년대 중반에 조선 국내의 비합법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던 지도자들이다. 두 사람의 분쟁은 개인적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그것은 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정치적, 조직적 분쟁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국제선과 비국제선 사이에 존재했던 알력을 가리킨다.
이재유는 ‘19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라거나 ‘당대 최고의 혁명가’라는 평가를 받는 저명한 사회주의자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경성트로이카’, ‘경성재건그룹’, ‘조선공산당재건경성준비그룹’ 등의 비밀 조직을 결성했고, 탄압과 고문에 굴하지 않는 불요불굴의 투쟁을 통해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혁명투사’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금강산인, ｢이재유탈출기｣, 󰡔신천지󰡕 1946년 4월호(6-17쪽) 및 5월호(31, 54-63쪽) ; 김경일, 󰡔이재유연구󰡕, 창작과비평사, 1993, 315쪽에서 재인용.

연구자에 따라서는 그를 가리켜 자주적 공산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코민테른의 사상적 지도는 일정하게 수용했지만 조직적 지도는 거부했던 자생적인 혁명가라고 평가한다. 안태정, ｢자주적 공산주의자 이재유의 혁명노선과 ‘좌익전선운동’｣, 󰡔역사비평󰡕 1991년 겨울호, 123-124쪽.
이 견해는 진실의 일면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재유가 국제선에서 파견된 전권위원의 지도적 역할을 달게 인정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들어서 코민테른의 지도성을 부인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이재유를 포함해서 1930년대에 활동한 사회주의자들이 세계혁명 속에서 코민테른이 점하는 지위와 역할을 부인했다는 증거는 발견된 바 없다. 이재유가 부인한 것은 국제선에 속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전권위원들의 관료적 작풍이었다.
이재유가 국제선 사람들과 불화를 빚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이미 1933년에 재상해 󰡔콤무니스트󰡕 그룹의 국내 전권위원인 김형선과 미묘한 알력 관계를 보였다. 1934년에는 프로핀테른에서 파견된 권영태와 불화를 빚었다. 1935년에는 김승훈(金承塤), 1936년에는 김희성(金熙星) 등과 같은 국제선 사회주의자들과도 긴장관계에 있었다. 김경일, 앞 책, 118-145, 233-248쪽 참조.

이 때문에 이재유는 국제선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파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재유가 검거된 뒤에 그 그룹에 속한 잔류 조직원들과 출옥 후 복귀자들 사이에 이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그 결과 공원회(孔元檜)와 안병춘(安炳春)과 같은, 이재유 후속그룹의 일부 리더들은 이재유가 취한 태도를 파벌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국제선의 지도적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 책, 256쪽.

이재유는 엠엘파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간주된 듯하다. 조선공산당 해체 당시에 당권을 쥐고 있던 엠엘파는 자파에 대한 정체성이 가장 강한 그룹으로 지목받아 왔다. 보기를 들어보자. 국제선 기관지 󰡔콤무니스트󰡕에 따르면 당재건운동 대열 속에는 과거의 종파적 전통을 부활시키려 노력하는 그룹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4개 그룹이 거론되었다. 󰡔계급투쟁󰡕 그룹(엠엘파), 󰡔볼셰비키󰡕(서상파), 󰡔불살󰡕(재만주 화요파), 󰡔레닌주의󰡕(재북경 안광천․김원봉 그룹)가 그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그룹들을 ‘노골적인 종파’와 ‘복면적인 종파’로 구분한 데에 있다. 노골적인 종파라고 낙인찍힌 세력은 엠엘파 하나였다. 그들의 조직적, 정치적 세력이 다른 어느 그룹보다도 더 강력했고, 구성원들의 내적 결속력이 매우 컸음을 시사한다. 明秀, ｢濁流에 逆하야｣, 󰡔콤무니스트󰡕 2․3합집호, 1931.5.

박헌영은 권영태와 이재유의 싸움을 알고 있었다. 출옥하기 이전에 이미 그 알력의 내용과 성격을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중에서 어떻게 그와 같이 내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까. 구체적인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박헌영은 옥중에서 외부세계의 정보를 얻기 위해 힘껏 노력했고, 때로는 믿을만한 사람들을 통해서 자료나 서적도 얻어 보았다고 한다. 감옥이 신입 정치범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정보를 입수하기는 더욱 쉬웠다고 한다. 샤브시나 꿀리꼬바, ｢소련의 여류 역사학자가 만난 박헌영｣, 󰡔역사비평󰡕 1994년 여름, 176쪽. (󰡔전집󰡕 8, 184쪽).

박헌영은 국제선 일꾼 권영태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해했다. 국제노선을 갖고서 입국했다는 이유로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만이 옳다고 전횡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다. 국제선과 그에 속하는 개인은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제노선을 갖고 들어온 사람만이 국제선인 게 아니라, 국제노선에 의거하여 일한 사람이 곧 국제선이라고 판단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박헌영은 출옥 후 경성콤그룹에 기꺼이 가담했다. 이재유와 함께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들이 지도부에 포진해 있는 단체인데도 말이다. 이재유 그룹은 비록 국제선은 아니지만 비타협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워온 공로가 있으며, 특히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이후에 그러했다는 게 박헌영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탁류에 섞이지 않은 한줄기 맑은 물결이었다. 캄캄한 밤중에 빛나는 밝은 등불이었다.
박헌영은 국제선의 전통 위에서 경성콤그룹을 지도하고자 노력했다. 기관지 명칭을 변경한 것은 그 좋은 보기이다. 경성콤그룹의 초창기 지도자 이관술은 일찍부터 등사판 기관지 발간을 준비한 결과, 1939년 9월에 󰡔공산주의자󰡕라는 제하의 기관지 창간호를 간행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런데 머지않아 이 명칭은 변경되었다. 박헌영이 이 단체에 합류한 이후에 󰡔콤무니스트󰡕라고 개칭되었던 것이다. 1940년 5월호부터는 새 이름이 적용되었다. 경성 서대문경찰서, ｢치안유지법및출판법위반피의사건송치서(이관술 외)｣ 1941.9.15 ; 한국역사연구회 편,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총서󰡕 8, 고려서림, 1992, 550-551쪽.
기관지의 제호를 바꾼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경성콤그룹이 1931-1932년에 간행한 잡지 󰡔콤무니스트󰡕의 정치적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는 데에 있었다. 임경석, 앞 책, 191-192쪽.(󰡔전집󰡕 9, 222-223쪽).

그뿐만이 아니다. 박헌영은 코민테른의 혁명전략과 전술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를 조선혁명에 적용하고자 힘썼다. 특히 자신이 수감 중에 열린 1935년 제7회 코민테른 대회의 정책 결정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경성콤그룹 구성원들에게 인민전선 전술을 숙지하게끔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조선혁명에도 그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독교, 천도교 속에 반제적 반전적 색채가 있을 경우 위로부터의 통일전선에 주저할 필요는 없다”고 역설했다. 실제로 그는 조선어학회 핵심 인물인 신명균(申明均)과 회견한 일도 있다. 경성콤그룹의 인민전선부를 담당하고 있던 국문학자 김태준(金台俊)을 통해서였다. 조선어학회와 같은 민족문화단체 혹은 민족주의자 그룹과의 연대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애숙, ｢일제 말기 반파시즘 인민전선론: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26, 2004. 9.

노선의 수용만을 꾀했던 것이 아니다. 단절된 코민테른과의 연락을 재개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그즈음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향하는 여행이 극도로 곤란한 정세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도 박헌영은 조직의 2인자인 이관술에게 영문 위임장을 주어서 삼엄한 조선․소련 국경을 넘게 했다. 이 시도는 이관술이 체포된 탓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코민테른과의 연락 재개를 위해서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