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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건설하라 21세기 사회주의

진보평론  제36호
최세진󰋯미디어충청 편집장

마이클 레보위츠, 󰡔지금 건설하라 21세기 사회주의󰡕, 메이데이, 2008.


광우병 소 수입반대 촛불 집회가 연일 이어지고, 그 집회가 이명박 탄핵을 요구하는 시위로 발전해나가자 경찰은 ‘주동자 사법처리’를 들고 나왔다. 정부와 경찰이 좋아하는 그 ‘주동자’라는 단어는 아마도 운동권에서 ‘지도부’라고 쓰는 용어의 경찰식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올해 5월 거리 시위에서 그 ‘지도부’는 없다. 언론이 쓰기 좋아하는 ‘주최측’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리에는 민중들과 거리의 직접민주주의와 직접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24일부터 진행된 집회에 참가한 민중들은, 당일 집회를 진행하는 ‘대책위’와 무관하게 자체적인 토론과 논쟁을 거친 후, 자발적으로 청와대로 향하고, 시청으로, 광화문으로, 신촌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이를 막는 경찰에 맞서 싸웠다. 이 시위가 밤샘 시위로 이어지자 당황한 경찰이 시위대를 연행하기 시작했다. 5월 27일 현재 지난 사흘간의 시위에서 경찰은 100여명의 참가자를 연행했다. 예전 같으면 소위 ‘지도부’를 수배하거나, 구속하려 안간힘을 썼겠지만, 경찰은 이 시위에서 수배할 ‘지도부’나 ‘주최측’, ‘주동자’를 발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또 이 시위가 어떻게 발전해 나갈 지 현재는 누구도 이야기할 수 없다. 누구도 지도하거나, 이끌지 않는다. 누구도 지도받지 않으며, 아무도 동원되지 않고, 행동 지침도 없다. 시위대 각자는 인터넷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갖고, 거리에서 함께 상황을 판단하고, 논의하고, 결정하고, 집행한다.
경찰은 아직도 “주동자 처벌”을 되뇌고, 우익 단체들은 “좌파의 배후 조종 증거가 있다”고 남의 다리 긁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만일 정말로 좌파들이 이런 집회와 시위를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진즉에 혁명을 했을 것이고, 지난 선거에서 이명박에게 참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시위의 배후는 여중고생들과 민중들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좌파와 운동권은 현재 상황을 따라가기도 버겁다.

집단적 피드백 의사결정 구조 네트워크

이런 시위와 조직 형태는 󰡔이머전스󰡕(스티븐 존스, 김영사), 󰡔링크󰡕(A.L 바라바시, 동아시아),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마크 뷰캐넌, 지호)에 잘 표현되어 있다. 물리학에서 나온 카오스 이론을 사회학에 적용한 이 책들은 공통적으로 “집단 내 각 주체가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집단적 피드백 의사결정구조를 가진 조직 체계가 일원화된 하향식 명령체계보다 훨씬 안정적이며, 효율적이고, 지능적이며, 변화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한다.
그 중 󰡔이머전스󰡕는 국가와 자본에 맞서 다양한 요구를 가진 민중들의 행동양식으로는 집단적인 피드백 의사결정 구조를 가진 조직 체계, 즉 현재의 촛불 시위대 형태가 가장 적절하며, 가장 안정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이야기한다.
<링크󰡕는 ‘알 카에다’의 조직 형태를 언급하는데, 조직 자체가 중앙이 없는 네트워크 조직이라, 흔히 지도자라고 알려져 있는 빈 라덴을 잡더라도 조직에는 거의 아무런 위해를 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5월 24일, 25일, 26일 사흘간 약 100여명의 시위대를 체포했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는 현재의 촛불 시위대를 그대로 표현하는 문구처럼 보인다. 시위대를 체포하더라도 그들 간의 소통구조가 유지되는 한 시위대를 무너뜨릴 수 없다.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에서는 혁명 등 집단적 격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웅이 아니라, 임계상황(스트레스가 극한에 달한 상황)과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주체들의 긴밀한 상호 피드백이라고 말한다. 현재 이명박 정부는 외부로부터의 식량파동과 석유파동이라는 악재에 덧붙여서 내부적으로 쇠고기 수입 고시, 대운하 재개, 교육자율화, 물가인상, 민영화라는 자체적인 땔감을 계속 부어주면서 총체적으로 스트레스가 떨어지지 않도록 유지시켜주고 있고 촛불 시위대는 인터넷과 핸드폰 그리고 집회 현장에서 더할 수 없이 좋은 피드백을 주고받고 있다. 한마디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열린 군중과 닫힌 군중

한편, 시위대의 움직임과 양상은 󰡔군중과 권력󰡕(엘리아스 카네티, 바다출판사)을 참조할 수 있다. 촛불시위대는 󰡔군중과 권력󰡕의 ‘열린 군중’에 해당한다. 열린 군중의 특성은 개방적이고, 폭발적이며, 더 많은 군중이 모일수록 더 강력해지지만, 지속성이 떨어진다. 열린 군중은 순식간에 ‘방전’한 후 흩어진다. 그에 반해 노동조합이나 군대 같은 ‘닫힌 군중’은 폐쇄적이지만, 지속성을 갖는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열린 군중을 닫힌 군중이 받쳐주며 지속성을 유지해주는 것이다. 닫힌 군중이 잠시 조끼와 깃발을 내려놓고 그 열린 군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닫힌 군중이 현재의 집단적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받쳐주며, 한 번의 방전으로 멈추지 않도록 받쳐줄 때야만 이 군중은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때 닫힌 군중 역시 열린 군중 속으로 녹아들어가야 한다. 즉 닫힌 군중이 열린 군중화 되어야 한다. 집회 대오가 닫힌 군중과 열린 군중으로 분열되는 순간, 열린 군중은 즉시 해산해버리고, 결국 닫힌 군중만 쓸쓸히 깃발을 날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지난 2002년 촛불시위의 마지막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당시 닫힌 군중들은 열린 군중과 충돌하며 열린 군중을 몰아내버렸다.

열린 군중이 이끌어가는 사회주의

이 이론들을 좀 더 장기적으로 변혁 운동에 대입해 본다면, 현재의 정치조직의 역할을 다시 고민해 볼 수 있다. 이때 지속가능한 정치조직의 역할은 열린 군중을 생산하고, 그 지속성을 받쳐주는 일이다. 장기적인 정보의 축적과 수집, 교육, 지속적인 선전, 네트워크 유지는 이 지속가능한 정치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정치조직은 열린 군중화 되어야 한다. 정치조직이 폐쇄적일 때 그 닫힌 군중은 단기적으로 효율적이며, 지속가능성을 획득하겠지만, 열린 군중과 함께 국가를 뒤집을 정도의 거대한 군중으로 자라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여 그 단일성과 규율로 권력을 쟁취할 수 있을지라도, 남는 것은 ‘대중과 분리된 깃발’ 밖에는 없을 것이다. 폭발적인 대중이 떠난 후 스스로 열리지 못했던 대부분의 조직들은 그런 길을 걸었다.
사회주의 단계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해 이 상황을 대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는 국가 폭력이 아닌 ‘민중들의 힘’으로 자본과 권력을 해체하도록, 그 열린 민중의 자발적 운동을 지속가능하도록 받쳐주는 역할을 하기 위한 ‘민중들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사회주의를 ‘민중의 힘’이 아닌 ‘당과 국가의 힘’으로 자본을 해체하는 과정으로 보았던 과거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결국 열린 군중을 해산시키고, ‘더욱 강력한 국가’만 남게 되었다. 거기에서는 더 나은 민주주의도, 국가해체의 전망도 발견할 수 없었다.

베네수엘라의 열린 군중과 21세기 사회주의

2004년 베네수엘라의 미디어 활동가인 마르셀로 안드라데가 한국에 왔다. 그는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설명하는 내내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래서 그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은 베네수엘라에서 풀뿌리 공동체로부터 시작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실현되어가고 있다고 계속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각 공동체의 네트워크를 잇는 것은 활동가들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몇몇 활동가에게 정보가 집중되고 있을 테고, 국가나 자본의 개입은 약해졌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작은 권력은 활동가들에게 다시 집중되는 것 아닌가?” 그러자 마르셀로는 “베네수엘라는 지금 활동가라는 단어가 사라져가고 있다. 이미 민중의 수준이 활동가를 넘어섰기 때문에 활동가라는 단어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대답했다.
마르셀로의 그 답변은 2005년 나를 베네수엘라로 이끈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가 말한 현실을 보고 싶었다. 차베스 정권이 탄생하기 이전에 그 정권을 만들었던 베네수엘라 민중운동의 역사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혁명 과정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에서 장기 체류에 실패하는 바람에 끝내 그 바람을 이루지는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에서 만난 민중들과 활동가들은 평생 잊기 힘들 감동과 가르침을 주었다.
그 중에서는 촛불 시위를 보기 전까지는 한국 운동 진영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을 사례들도 수두룩하다. 예를 들자면 암끌라(ANMCLA : Asociacin Nacional de Medios Comunitarios, Libres y Alternativos 공동체, 해방, 대안 미디어 전국연합)의 운영방식도 그 중 하나이다. 필자가 베네수엘라에 있을 당시 RTV와 MBC, KBS에서 베네수엘라로 다큐 촬영을 왔는데, 당시 나는 베네수엘라에서 이들의 중간 연락을 맡고 있었고, 이들은 모두 암끌라의 대표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암끌라는 대표라는 직책이 없다고 답해주면 방송사들은 ‘대변인’이라도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암끌라에는 대변인도 없다. 상근자도 없고, 사무실조차 없다. 암클라는 전체 회원의 수가 몇 만을 훌쩍 넘어가는 거대 조직이지만, 네트워크로서만 존재한다. 모든 결정은 회의를 통해 진행되고, 모든 회원이 곧 집행부이다. 직접민주주의는 암클라에서 그렇게 실현되고 있었다. 몇 차례의 한국 방송사들의 똑같은 요청에 짜증이 난 베네수엘라 활동가들은 “누구도 암클라를 대표할 수 없고, 누구든지 암클라를 대표할 수 있다. 암클라가 궁금한가? 그럼 나에게 물어라”, “도대체 활동가라는 사람들이 왜 모두들 ‘대표’를 찾는가? 정말로 이들이 활동가가 맞는가?”(당시 난 당시 촬영팀원들을 활동가들이라고 소개했었다) 베네수엘라 활동가들의 짜증 섞인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흔히 이 이야기를 하면 “베네수엘라의 그들이 무정부주의자냐”라는 질문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이다. 내가 만났던 베네수엘라의 활동가들은 운동조직은 당연히 그렇게 운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베네수엘라에 지내는 내내 마르셀로의 집에서 숙식을 했는데, 마르셀로는 새벽에도 회의를 하러 가고, 한밤중에도 회의를 하다 돌아왔다. 밤낮없이 계속되는 회의에 찌든 모습은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하루는 마르셀로에게 “우리나라에는 회의라는 말과 회의주의라는 말의 발음이 비슷해서 회의만 자꾸 하다보면 회의주의에 빠진다는 농담이 있다. 회의가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마르셀로 왈 “난 네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다. 같이 계획하고, 같이 점검하는 것이 회의이다. 그런데 어떻게 회의에서 회의주의가 발생할 수 있는가? 그건 아마도 너희의 회의가 잘못된 것일 것이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다른 나라 활동가들 다 “옳거니!” 박수치고 환호했다. 난 그냥 “그 그래. 네 말이 맞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베네수엘라의 운동진영은 이미 혁명 이후의 모습, 열린 군중화 된 정치조직을 그 안에 담고 있다. 모든 이들이 참여하는 회의, 모든 이들이 주체가 되는 조직. 그리고 그 모습을 전체 사회로 확장해나가는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지금 현재의 베네수엘라 혁명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남미에서 현재 진행되는 민중들의 투쟁, 특히 베네수엘라의 민중들의 투쟁은 과거 구소련이나 20세기의 소위 현실사회주의와 그 결을 달리한다.
처음 베네수엘라에 가서는 그저 혁명 그 자체에 열광하다가 몇 달을 보내는 동안 아직도 존재하는 여러 문제를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멕시코, 프랑스 등에서 온 활동가들과 이런저런 문제점들에 대해 토론하다가 “혁명이 시작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베네수엘라에는 빈부격차가 여전하다. 도대체 왜 차베스는 근본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진행하지 않는가? 정말 포풀리스트가 아닐까?” 하는 회의론이 나오게 됐다. 그래서 동네의 아주머니에게 그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이렇게 답변했다. “도대체 왜 차베스가 혁명을 한다고 생각하니? 혁명은 민중들이 하는 거야. 아직 베네수엘라 민중들은 근본적인 혁명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어. 준비가 되면 언제든지 혁명을 할 거야. 차베스는, 음~ 현재 혁명의 대오에서 자기 역할을 그럭저럭 잘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해. 모든 혁명이 똑같다고 생각하지 마. 베네수엘라에는 베네수엘라의 혁명이 있는 거고, 너희 나라에는 너희 나라에 맞는 혁명이 있을 거야.”
한 번은 자칭 차베스주의자(현재 베네수엘라에는 ‘차베스주의’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많은 민중들이 자기 자신을 차베스주의자라고 지칭하고 있다)라는 동네 아저씨에게 “차베스도 인간이니까 언제든지 실수를 할 수 있다. 차베스가 자기 생각에는 민중들을 위한 정책을 실시한다고 하더라도, 민중들이 볼 때는 전혀 민중들을 위한 정책이 아닐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동네 아저씨는 전혀 망설임이 없이 “그럼 쳐야지. 쫒아내야지. 내가 차베스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것은 그의 정책이 좋아서이지, 그가 좋아서 그의 정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중들은 언제든지 차베스를 다시 끌어내릴 수도 있고, 다시 올려놓을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베네수엘라의 이런 현재는 과거 혁명운동의 전통 위에 서있다. 스페인의 식민지배에 맞서 싸울 때 그 투쟁을 이끌었던 시몬 볼리바르, 시몬 로드리게스, 남미에 맑스주의 이론을 소개했던 마리아떼기(José Carlos Mariátegui), 그리고 구 소련식의 사회주의와 미국식 자본주의 모두를 거부했던 체 게바라 등은 모두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강조했으며, 남미 현실과 남미의 민중으로부터 출발하는 혁명을 이야기했다. 차베스가 혁명을 지도하고 있다는 것은 ‘우파들’의 거대한 착각일 뿐이다. 민중은 더 이상 지도를 받지 않는다. 차베스의 지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차베스와 ‘함께’ 혁명을 한다. 민중이 바로 ‘전위’다. 민중들은 그들이 주인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온갖 권력과 자본, 제국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개량주의, 관료주의에 맞서며 싸워나가고 있다.

지금 건설하라, 21세기 사회주의

최근 몇 년간 국내에는 베네수엘라에 관한 책 대여섯 권이 연이어 출판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차베스 개인에 대한 찬양 혹은 차베스가 혁명을 이끌고 있다는 착각으로 가득차거나, 베네수엘라에서 진행되는 사건들의 나열이 주를 이룬다. 그 책들은 과거의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베네수엘라를 읽고 있다. 차베스가 지도하는 혁명은 내가 원하는 혁명도 아니고, 내가 봤던 베네수엘라의 현실도 아니었다.
그러다 󰡔지금 건설하라, 21세기 사회주의󰡕를 만났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지금 건설하라󰡕는 베네수엘라에 관한 책이 아니다. 저자 마이클 레보위츠는 자칭 정통 맑스주의자로서 예전에 󰡔자본론을 넘어서󰡕라는 책을 통해서 맑스의 󰡔자본론󰡕 시리즈의 계획을 완성하고자 시도했고, 당시 레보위츠는 ‘주체로서의 노동계급의 투쟁’, ‘민중의 필요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를 이론적으로 복원하고자 했다. 이 책 역시 그 기획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레보위츠는 이 책에서 맑스의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를 수차례 되새긴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사민주의, 민중이 주체가 되지 못했던 과거의 현실 사회주의 혁명을 비판하며,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의 가능성을 현재 전개되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노동자 자주관리’에서 찾는다. 레보위츠는 생산력 중심의 구 사회주의의 실패한 혁명을 넘어, 민중의 필요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로서 ‘노동자 자주관리’를 제시한다. 레보위츠는 이 책에서 경제 민주주의를 단순한 평등화가 아니라 노동자․민중을 경제의 주체로 만드는 것으로 해석한다. 베네수엘라의 노동자 자주관리에도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가 남아있지만, 그것은 베네수엘라 민중의 몫이고, 레보위츠는 이를 낙관적으로 평가한다.
이 책은 추상적인 이론에서 출발해 구체적인 베네수엘라의 현실 정치로 나아간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특수한 실험을 보편적인 수준의 대안으로 끌어올린다. 이론적 보편성은 ‘남미의 사건’을 ‘우리의 혁명’으로 확장해 연구하고 고민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준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책 내용보다는 번역의 거칠음이다. 본래 이 책은 대중이 쉽게 읽고 토론할 수 있도록 쓰인 책이다. 번역판도 이 취지에 맞춰서 쉽게 풀이되고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누군가 “베네수엘라의 혁명이 우리 시대에 주는 가장 큰 의미는 다시 혁명과 사회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베네수엘라 민중의 혁명은 우리에게 혁명이 다시 가능하다는 희망을 주었고, 이 땅의 촛불 시위는 우리에게 열린 군중의 현실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레보위츠의 시도는 새로운 혁명 운동에 대한 전망을 나눌 수 있는 토론꺼리를 제공해주었다.

자, 여기서 다시 시작하자. 열린 군중과 함께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을…….
 

2008-06-20 16:2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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