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진보평론 카테고리
편집자의 글
특집ㆍ기획
정세ㆍ시평
발언대
일반논문
기획연재
문화마당
서평
기타
진보평론 참여
독자투고 안내
원고집필요령
정기구독신청
진보평론 자료실

진보평론 > 문화마당 > 목록보기 > 글읽기

 
새로운 삶과 대안을 만드는 사람들:
 브라질 ‘땅 없는 농업 노동자 운동’

진보평론  제36호
박수정󰋯극작가/ 연극 <전태일> 공동창작

<르포>

해마다 4월 17일이면 브라질 북부 파라 주 마라바 엘도라도 카라자스 농민들은 19분 동안 에스S자로 구부러진 도로를 점거한다. 1996년 그날 그 자리에서 죽어간 19명의 농민들을 기리는 투쟁이다. 한 명에 일 분씩 모두 19분 동안 그 투쟁은 이어진다. 그 해, 농민들은 가족을 포함해 3,500명이 살 수 있는 메카세이라 농장을 점거했다. 경작하지 않는 땅이었다. 농민들은 토지수용을 요구하며 주 수도인 벨렝으로 행진을 하였다. 모두 1,500명이 길을 나섰다. 걷기에는 꽤 먼 길이지만 걷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엘도라도 카라자스를 지날 무렵이었다. 전날 야영을 마치고 다시 행진을 시작한 농민들에게 헌병대가 양쪽에서 포위해 들어왔고 총을 쏘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19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땅과 삶을 얻기 위해 투쟁하다 죽은 이들을 브라질 전체로 따지자면 20여 년 동안 천여 명이 넘는다. 이 농민들은 브라질 땅 없는 농업 노동자 운동Movimento dos Trabalhadores Rurais Sem Terra: MST(이하 MST로 줄여 씀) 회원들이다.
그동안 MST의 이야기나 투쟁을 종종 기사로 접하면서 나는 그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 2006년 11월에 브라질 북부 파라 주에 있는 마라바 지역 MST 농민들을 만나게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MST 파라 주 사무소

브라질 북부 파라 주 마라바에 있는 MST 사무실 안에는 국제소농조직인 비아 캄페시나도 함께 있다. 사무실 벽에는 사진과 포스터들이 걸려 있다. 그중 1996년에 엘도라도 카라자스에서 일어난 사건을 찍은 사진을 본다. 나도 서울에서 신문 기사로 엘도라도 카라자스라는 이름을 읽었다. 사진으로 보니 참 기가 막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해마다 그 길을 점거할 것이다.
다른 벽에 사진 액자가 걸려 있는데 눈에 익은 사진이다. 이곳 MST를 방문하게끔 연결해 준 브라질예술교육가협회 코디네이터인 마노와 단이 말했던 기념물이다. 마노와 단이 죽은 19명을 기억하기 위해서 만든 기념물이었다. 책에 실린 사진으로 보았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보았다. 그런데 브라질 북쪽 국경에서부터 죽 내려와 마라바에 이르러 사진을 보니 다르다. 커다란 19그루의 나무들을 세워놓은 사진은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죽은 19명을 상징했다.
벨렝에서 마라바 오는 동안 내 눈길을 잡아끌었던 죽은 나무들이 떠오른다. 사진을 찍고 싶어도 ‘아 찍어야지’ 하면 버스가 앞으로 달려 좀체 찍을 수 없던 죽은 나무들. 그 나무들이 왜 그렇게 내 눈을 끌었을까. 그건 죽었으되 쓰러지지 않고 살아 있는 생명, 죽음도 생명이라는 걸 내게 말해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죽은 것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나는 보았다. 그런데 이 기념물 사진에도 죽은 자들이 그대로 살아 있다.
나는 왜 그렇게 마라바에 오고 싶었던 걸까. 아니 왜 MST 사람들을 보고 싶어 한 걸까. 조직가도 아니고 활동가도 아니고 농민운동을 아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면서. 멀리 남미를 한 바퀴 돌아 찾아온 마라바, MST. 브라질 남쪽 플로리아노폴리스에서 시작해 버스로 국경을 이동하면서 남미를 시계방향으로 돌아 베네수엘라에서 다시 브라질 북부로 들어오기까지 과연 여기까지 내려올 수 있을까, 중간에 포기해야 하는 걸까, 갈 수 있을까 의심하기도 하고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야 하나 생각도 했지만 어쨌든 나는 마라바에 왔다. 다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제대로 통하지 않는 언어로 좌절도 하고 그러겠지만 나는 며칠 이들과 살고 싶다.

MST 기숙사에서 만난 사람들

저녁 7시쯤 한 활동가가 모는 차를 타고 하루 묵을 곳으로 왔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왔다. 와보니 방도 여러 개에 사람들이 많다. 내가 짐을 내려놓은 방에는 스물한 살인 레티시아와 서른 살 헤지나가 있었다. 나를 데려온 활동가가 자기 침대를 내주고 그이는 다른 방에서 잔다고 간다. 누가 이야기를 걸어주고 챙겨주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스스로!
“레티시아, 여기가 어디야?”
“여기는 MST 농경학 학생 기숙사야.”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학생들인 거야?”
“응. 우리는 각자 살던 정착 마을이 있고 공부하기 위해서 여기 마라바에 왔어.”
“모두 파라 주 사람들이야?”
“아니. 세 개 주에서 왔어. 파라 주와 마라냥 주, 토칸칭스 주에서 왔어.”
지도를 보니 마라냥 주는 파라 주 동쪽에, 토칸칭스는 파라 주 동남쪽에 있는데 이 세 주가 마라바를 중심으로 붙어 있다.
“모두 몇 명인데?”
“이 집에서 모두 33명이 지내.”
“대학은 무슨 대학인 거야?”
“파라연방대학UFPA인데 우리가 공부하는 곳은 마라바 캠퍼스야.”
“무엇을 공부해?”
“농업경제학, 농학을 공부하지.”
“이런 교육은 어떻게 시작된 거지?”
“이 과정은 한 기획이야. 파라연방대학과 MST, 정부기관인 ‘토지개혁과 이주 국가협회-인크라’와 ‘토지개혁 교육 국가 프로그램-프로네라’가 협정을 맺어 진행하는 과정이야.”
“그럼 몇 년 동안 공부하는 거야?”
“5년 동안 공부하는데, 지금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2004년부터 공부를 했어. 앞으로 2년 더 공부해야 해.”
“공부하는 사람들 나이는 어떻게 되니? 가장 어린 나이와 가장 많은 나이가?”
“내가 21살로 가장 어리고, 30살도 있고 골고루 있는데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은 48살이야.”
“다른 지역에서도 이렇게 공부해?”
“응. 파라에서 가까운 곳으로는 브라질 동쪽 세르지페 주와 바이아 주에도 있어.”
“기숙사는 어떻게 얻은 거야?”
“이 건물은 임대해서 쓰는 거야. 여기서 먹고 자고, 공부는 대학에 가서 하고. 대학에는 다른 과정도 있고 농경학을 공부하는 다른 그룹들도 있어.”
레티시아는 어려서부터 MST 정착 마을에서 자랐다고 한다. MST 그림이 그려진 빨간 티셔츠를 입고 찍은 어릴 때 사진도 있다. 레티시아의 어머니는 정착 마을 안에 있는 학교 선생님이고, 아버지는 경제 사정 때문에 중간에 회원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물어보기도, 말해준다고 다 알아듣기도 어려워 ‘왜’냐고는 묻지 않았다. 다만 삶에 쉬운 길은 없다는 것을 엿볼 뿐.
사무실, 컴퓨터실, 거실, 방, 마당으로 이루어진 기숙사 곳곳에서 나이 든 학생들은 서로 이야기를 하거나 과제물인 듯 공책을 펴 놓고 무언가를 쓰거나 자료를 읽는다. 그중에는 갓난아이를 키우며 공부하는 부부도 있었다. 린다 부부는 부모님께 큰 아이 둘을 맡기고 이곳에 와서 셋째를 낳아 키우며 공부한다.

공부하는 MST

새벽부터 밖에서 사람들 소리가 난다. 어젯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이야기하던데 함께 잔 레티시아도 헤지나도 보이지 않는다. 새벽 6시, 밖으로 나오니 다들 공책을 들고, 책을 들고 공부를 한다. 부엌에서도 공부하고, 거실에서도 공부하고, 컴퓨터실에서도 공부하고, 마당에서도 공부한다. 모두 말끔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게시판에는 하루 계획표가 적혀 있다. MST 학생들은 하루를 어떻게 지내고 있나.

5시 30분: 일어나기
6시 15분~6시 55분: 독서와 회의
7시~7시 40분: 카페(아침 식사)
8시~12시: 수업
12시 30분~1시 15분: 점심
1시 15분~2시: 일상 업무
2시 20분~6시 20분: 수업
6시 40분~7시 10분: 저녁
7시 15분~7시 50분: 일상 업무
8시 15분~10시: 조정 회의, 규율 회의, 공부 세미나, 회의, 하루를 생각하며 글쓰기와 말하기
11시: 침묵(잠자기)

하루 8시간 수업이면 만만치 않겠다. 그래서 저렇게 이른 아침부터 공부를 하나 보다. 계획표에 적힌 대로 공부하는 모습이 착한 학생들이다. 아침 햇살 아래 공부하는 모습이 참 좋다.
기다란 탁자 앞에 사람들이 빵이 담긴 플라스틱 통과 커피를 담은 보온통과 다른 마실 거리와 컵을 가져다 놓는다. 공부를 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빵은 주시라는 학생이 만든 것이다. 그는 농민이면서 학생이면서 빵 만드는 이인 셈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가볍고 소박하게 아침을 해결한다. 설거지 당번은 부지런히 먹은 컵을 씻고 다른 사람들은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
아침을 먹은 사람들이 하나 둘 가방을 메고 나온다. 레티시아한테 학교가 가까이 있느냐고 물으니 걸어서 15분 거리란다. 나도 따라 나섰다. 조리를 끌고 시골 길을 걷는다. 대학이 있다고 해서 번화가도 아니고 쌩쌩 달리는 차도 드물다. 공부하기에는 조용한 시골이 더 알맞지 않을까. MST 학생들은 무언가 적은 걸 손에 들고 읽으면서 걷기도 하고,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기도 한다.
파라연방대학 마라바 캠퍼스는 작고 아담하다. 대학이라는 이름이 갖는 지나친 권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학교에 오자마자 벤치에 앉아 공부를 하는 이 농민 학생들의 모습에서 나는 그 권위를 본다. 인구 3%가 경작할 수 있는 땅의 3분의 2를 갖고, 지주 1.6%가 46.8%의 땅을 통제하는 브라질 사회. 경작하지 않는 대농장이 있는가 하면, 땅이 없어 일할 수도 집을 가질 수도 없어 떠도는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많은 브라질에서 이들은, 불공평한 땅 분배 문제를 들고 일어나 23~27개 주에 천오백만 땅 없는 농업 노동자를 조직한 MST에서 보낸 학생들이 아닌가. 공부를 해 가방 끈을 길게 늘이는 게 아니라, 다시 정착 마을로 돌아가 브라질과 세계에 대안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경제 모형을 고민하고 실험하는 이들한테서 참다운 권위가 나올 것이다.
강의실 앞, 마당에서 서로 물어보고 토론하고, 한 남자는 아예 바닥에 과제물을 늘어놓고 찾아가며 공부한다. 그 모습에 다들 껄껄 웃는다. 아기 엄마 린다가 셋째 과라이를 안고 온다. 과라이라는 이름은 브라질 원주민인 투피-과라니 말로 ‘해’라는 뜻이다. 과라이도 엄마랑 공부하러 날마다 나온다고 한다. 린다는 수업에 들어가기 전 과라이한테 젖을 물린다. 린다는 아이 때문에 곤혹스러워 보이거나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바빠 서둘러대지도 않는다. 말갛게 싹 씻겨서 옷도 새로 갈아입힌 과라이. 아이를 먼 곳에 떼어놓고 오지 않아도 되고, 아이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거나 미루지 않아도 되는 린다를 보니 그저 모두 자연스럽다. 물론 린다가 수업을 받는 동안 아이를 돌봐줄 누군가가 있다면 한결 낫겠지만.
8시가 가까워오자 다들 교실로 들어간다. 첫 수업을 맡은 선생님이 들어온다. 있다 가라는데 나도 아침부터 움직여야 하니, 인사만 하고 돌아선다. 혼자 돌아가는 길, 마실 나온 아낙네처럼 걷는다. 이렇게 걷는 내가 이상하다. 이 길이 낯설지 않고 오래전부터 걸었던 길처럼 느껴지는 건 도대체 왜일까.

3월 26일 정착 마을

MST 농민들이 사는 정착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름을 미처 묻지 못한 한 활동가가 와서 동행하게 되었다. 아침 9시 30분에 출발한 차는 쭉 뻗은 찻길을 30분 달렸다. 흙벽돌이나 나무판자로 지은 집들로 이루어진 마을. 남자는 클레우지마르라는 사람 집에 나를 데려다주고 다시 차를 타고 간다. 작은 집에는 따로 문을 달지 않은 방 하나와,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작은 공간과, 뒤쪽에 부엌이 하나 있다. 하지만 좁다거나 작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방 벽에는 체 게바라와 빅토르 하라가 그려져 있다. 클레우지마르가 그린 것이다. 바닥은 흙바닥이다. 그런데 흙이 단단하게 다져져서 발에 흙이 묻어나지 않는다. 클레우지마르 아들은 그 흙바닥에서 그냥 논다. 나도 그냥 앉는다.
클레우지마르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작곡가이자 가수이다. 클레우지마르의 부모님도 이 마을에 사신다. 클레우지마르는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해 마을을 이룬 1999년부터 8년째 살고 있다. 아내인 엘리에니는 마을에 들어온 지 2년 되었다. 정착마을에 있는 학교 선생님이다. 두 살 된 아들이 수업 준비를 하는 엄마 둘레를 왔다 갔다 한다. 엘리에니가 학교 수업을 하는 동안은 한 마을에 사는 레이아가 아이를 돌봐준다. 수업은 낮 1시부터 시작한다.
클레우지마르와 함께 집 밖으로 나와 마을을 둘러보았다. 이 마을 이름은 ‘아캄파멘토 3월 26일’이다. 아캄파멘토는 ‘야영지, 진지’라는 뜻이다. 이웃한 집들이 모여 한 그룹을 이루고 한 그룹에 50~60명이 산다는데 모두 13그룹이 있다고 한다. 한 집에 최소 5명이 산다고 하면 한 그룹에 10~12집이 있는 것이고, 마을에 사는 사람은 650~780명쯤 될 것이다. 구경하듯이 마을을 보려고 했던 건 아닌데 클레우지마르가 마을을 한 바퀴 돌자고 한다.
커다란 화덕 위에 철판이 깔려 있는 곳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쓰는 파리냐다이다. 파리냐다는 가루를 내는 곳으로 특히 만조카 가루를 낸다. 만조카는 가슬가슬한 가루인데 브라질 사람들이 음식 위에 뿌려 먹는 것이다.
지나가다 보니 문이 열린 집에서 한 할아버지가 글씨 공부를 한다. 작은 나무 의자에 큰 공책을 올려놓고 볼펜으로 똑같은 걸 한 바닥 가득 쓰는데 아무래도 할아버지 이름이지 싶다. 아가메논 지 수사. 당신 이름을 쓰기까지 너무 오랜 세월을 돌아온 할아버지. 가난은 몸 누일 집도, 일굴 땅도 못 갖게 하고, 자기 이름마저도 쓰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제 할아버지는 몸 누일 집도 있고, 일할 땅도 있으며 읽고 쓰기를 가르쳐줄 선생님과 학교도 있다. MST가 이루려고 하는 것은 이런 걸지도 모르겠다. 자기 이름을 쓸 기회마저 빼앗긴 사람들에게 자기 이름을 쓰게 하는 일 말이다.
첫 번째 그룹에서부터 마지막 그룹까지 도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본다. 혼자 일하러 나가는 아저씨한테 주로 어떤 농사를 짓느냐고 여쭈니 쌀, 페이종, 옥수수, 만조카, 호박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수공업품을 만드는 아저씨가 사진 액자를 들고 자신이 짠 바구니 끈을 머리에 매고 사진기 앞에 선다. 세계 곳곳에서 MST 운동이 벌어지는 현장을 보려고 많이들 찾아온다는데 아저씨도 그동안 사진을 많이 찍어보았나 보다.
갓난아기 딸을 안고 더 좋을 수 없는 아침을 보내는 젊은 부부. 방앗간을 맡아 일하는 집 마당에는 겨가 잔뜩 쌓였다. 야구 놀이를 신나게 하는 아이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조용한 마을을 살린다.
다른 그룹에 있는 파리냐다에서 13살 남자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만조카를 만든다. 아이는 커다란 나무 막대 주걱을 들고 화덕 위 철판에서 만조카를 볶고, 아버지는 볶은 만조카를 가루 낸다. 아이는 언제부터 저 일을 했을까. 13살 아이 손에서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이 먹을 만조카가, 브라질 어느 누군가가 먹을 만조카가 만들어진다.
마을 언덕 위쯤 오르니 정자가 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이 바람이라도 없으면 어떻게 숨을 쉴까. 정자 뒤로 마을 방송국이 있다. 방송국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다. 소박하고 작은 건물이며 “아, 아, 주민들께 알립니다”라는 방송을 할 법한 그런 곳이다.

카를루스 마리게야

마을 들머리 가까이 있는 학교는 2000년 3월 1일에 세워졌다. 낮에는 아이들이 와서 공부하고 저녁에는 어른들이 공부를 한다. 아직 수업은 시작하지 않았다. 좀 있으면 와다다 달려올 아이들을 기다리며 선생님이 교실을 빗질한다.
나무로 지은 학교에는 ‘광대한 사유지가 없는 브라질을 위한 토지개혁’이라는 글귀가 굵은 글씨로 적혀 있다. 같은 건물 다른 쪽에는 어떤 남자 얼굴이 그려져 있다. 차를 타고 마을에 들어오면서도 그 얼굴을 보았는데 대체 누굴까. 클레우지마르한테 누구냐고 물었더니 카를루스 마리게야Carlos Mariguella라고 한다.
1911년 살바도르에서 태어난 마리게야는 공산주의자로, 1934년에 남미에 퍼지기 시작한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맞섰다. 브라질에서는 1930년부터 1945년까지 제툴리우 바르가스 정부가 독재정치를 벌였고, 1964년 카스테우 브랑쿠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군사독재를 저질렀는데, 마리게야는 민족해방동맹이라는 혁명 조직을 만들어 이에 대항했다. 마리게야가 1969년, 죽기 전에 썼다는 󰡔도시 게릴라에 관한 작은 안내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클레우지마르가 이름을 알려주면 내가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유명하고, 체 게바라나 카스트로와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는 브라질 혁명가, 카를루스 마리게야. 그 얼굴을 땅 없는 농업 노동자 운동 마라바 정착 마을 학교에 새긴 건 그 시대에 못 다 이룬 혁명을 이루겠다는 뜻일까. 도시게릴라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우물을 파고, 학교를 세워 새로운 삶을 일구는 이들은 지금 혁명 중이다. 죽음을 뒤집어 삶으로.

화덕과 불가마

마을을 돌아 마지막으로 클레우지마르네 옆집에 들렀다. 인심 좋게 생긴 마리아는 바느질일을 한다. 시장에 내다 파는 수건도 만들고, 장식 덮개나 옷도 만든다. 재봉틀을 써서 만들기도 하고 좀 섬세한 건 손으로 하나하나 바느질을 한다. 시장에서 수건 한 장을 1헤알에 파는데 마리아는 그보다 싼 값에 시장 상인한테 물건을 넘긴다. 5헤알을 주고 마리아한테 수건 5장을 샀다. 마리아가 자꾸 그냥 주려고 하는 걸 내가 마다하는데도 기어코 한 장을 더 얹어준다.
마리아가 점심을 주었다. 음식은 흙으로 만든 화덕에서 만들었다. 닭은 안 보이는데 계속 닭 소리가 나서 찾아보니 불가마 안에 제 집인 양 들어가 앉았다. 불가마를 쓰느냐고 물으니 빵을 구우면 참 맛있다고 한다.
흙으로 만든 불가마와 화덕을 써서 음식을 만드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잘 모른다. 땔 나무를 찾고 나무가 타는 시간을 기다리고 얹어놓은 솥에 든 음식이 끓고 익는 데 드는 시간을 기다리는 일들을 이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잘 모른다. 가스레인지는 밸브를 돌리고 손잡이만 돌리면 불이 켜진다. 그 편리함이라는 눈으로 화덕과 불가마를 바라봐서는 안 되리라.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궁이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불을 때 밥을 지었던 집에서 살아본 나는 아궁이와 가마솥이 만들어낸 많은 이야기를 지녔는데, 가스레인지를 쓰는 내 아이도 나중에 가스레인지에 얽힌 이야기를 가질 수 있을까. 이 마을에서 만들어 쓰는 화덕과 불가마는 가난하기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 쓰는, 돈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없애고 더 편리한 걸로 대체해버릴 도구로 보이지 않는다. 전통과 생태, 환경, 대안의 삶이 화덕과 불가마 안에서 지펴지고 있다.

노래

클레우지마르가 만든 노래는 따로 악보가 없다. 시처럼 적어놓은 노랫말에 기타 코드만 표시해놓았다. 아직 음반으로 만들지 않아 늘 들을 수도 없다. 클레우지마르는 MST 농민들이 시위하고 행진하는 곳이면 기타를 메고 간다. 엘도라도 카라자스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은 19명을 기리는 노래도 만들었다. 클레우지마르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주먹 쭉쭉 내뻗으면서 불러야 할 듯한 노랫말을 무척 부드럽고 애절하게 부른다.

<투쟁을 기억하다>

엘도라도 카라자스, 그이들은 죽지 않는다
싸우는 민중들을 키우는 씨앗으로 다시 온다
그들은 늘 “S(에스)” 굽이에 남아 있을 것이다
투쟁하는 노동자 역사에 뚜렷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누가 폭력을 기억하는가
우리 핏줄 속 끓는 피는
죽어간 카라자스 벗들을 위해 정의를 원한다

투쟁하는 민중은
도움 주는 게바라, 사파타, 베르나르도 마린 안토니오의 이름으로
카라자스 벗들을 위해 정의를 원한다

변혁하기 위해 투쟁하는 곳이면
시골과 도시, 그 모든 지역에서 “S” 굽이는 계속될 것이다
육군대령이 쏜 총에 쓰러진
소년 오지엘을 부른다
해방을 향한 꿈을 안고
땅과 교육을 위해 투쟁한 민중 투사

학살을 명령한 자를 감옥으로!
파라 땅에서 생산하는 노동자
우리는 그만두지 않는다
민중은 하나된 목소리를 이루기 위해 계속 만날 것이다
땅을 뚫고 열아홉 꽃이 핀다
변혁과 계급투쟁 안에서 우리는 굳세어진다.

클레우지마르가 엘도라도 카라자스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노래 부른다. 죽어간 19명은 늘 땅 없는 농업 노동자들 곁에 살아 있을 것이며 씨앗이 되고 꽃 피어날 거라고 노래한다. 오지엘은 아무래도 그날 죽어간 젊은이인가 보다. 오지엘은 더 이상 살아 해방을 꿈꿀 수 없지만, 남은 이들이 그 꿈을 이어가리라.
브라질에서 행해진 불평등한 토지 분배는 농업 노동자들을 이리저리 떠돌게 만들었다. 수출을 우선으로 하는 단일 품목 생산은 당장 굶주리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이 광대한 땅에, 브라질 사람들 모두가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 생산할 수 있는 땅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디 브라질만 그러하겠는가. 내 곁에는 없겠는가.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가난이나 굶주림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일까.
브라질에서 1980년부터 지주나 경찰에 암살당한 농업 노동자와 활동가들이 1,543명이라고 한다. 2001년에는 1월부터 11월까지 23명이 암살당했다고 한다. 한 달에 꼬박 두 명씩 살해당한 것이다. 하지만 살인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엘도라도 카라자스에서 학살을 저지른 책임자들도 마찬가지다. ‘처벌하지 않음’이라는 문제가 남미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이어진다. ‘학살’이 이어졌듯이. 이 문제는 내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동안도 이어질 것이고, 우리 땅을 밟아도 이어질 것이다. 남미에서,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에서, 한국에서.
목숨을 내걸고 땅과 평등과 정의를 구하는 사람들. 부드럽고 여리게만 들리던 노래가 무겁다. 그런데 “S” 굽이는 무엇일까.

루리발 산타나 정착 마을

클레우지마르가 사는 마을을 나와 클레우지마르와 함께 승합차 버스를 탔다. 빈자리를 찾아 클레우지마르는 맨 뒤로 가고 나는 운전기사 옆에 앉았다. 창문을 모두 열어놔도 뜨겁다. 열기가 차 바닥에서 올라오고 천장에서 내려온다. 차 앞 유리로 비치는 햇빛은 눈을 절로 감게 만든다.
한 시간쯤 넘게 달렸나. 클레우지마르가 깨워 일어나니 엘도라도 카라자스다. 찻길 오른쪽 아래 펼쳐진 마을에 높은 막대에 걸어놓은 MST 붉은 깃발이 보인다. 엘도라도 카라자스에 있는 아캄파멘토 루리발 산타나다.
루리발 산타나 정착 마을은 클레우지마르가 사는 정착 마을보다 훨씬 크다. 하지만 클레우지마르 정착 마을이 좀 더 안정되어 보인다. 클레우지마르와 함께 찾아간 집은 마리아네다. 마리아는 자기를 코타라고 부르라 한다.
처음에 내가 MST 정착 마을을 찾아가고 싶다고 했을 때, 마노는 방문은 가능하지만 그곳에서 먹고 자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정착 마을 가까운 곳에 숙소를 구해 머물며 사람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온 이메일에는 마을에서 머물러도 된다고 쓰여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어서 좋지만 조금이라도 불편을 끼치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코타 집에는 방이 넉넉지 않았다. 그건 코타 집뿐만 아니라 정착 마을 어느 집도 마찬가지다.
방 하나와 부엌 하나가 있는 집에 부부와 딸 넷과 아들 하나, 모두 일곱 식구가 산다. 부부가 작은 방을 쓰고, 부엌이 있는 방에는 낡은 나무 침대가 하나 있을 뿐이다. 바닥은 흙바닥이다. 그냥 누울 수도 없는 방이다. 그 부엌방에서 다섯 아이들이 잠을 자야 하는데 어떻게 나까지 잘 수 있을까.
코타가 내게 해먹이 있느냐고 묻는다. 베네수엘라에서 브라질로 넘어온 나는 아마조나스 주 마나우스라는 곳에서 만 원 주고 해먹을 샀더랬다. 그냥 해먹을 사고 싶었다. 코타가 내게 해먹이 있다면 충분히 잘 수 있다고 한다. 침대에서는 큰딸이 자고 나머지 세 아이는 해먹을 걸고 자고, 막내딸은 흙바닥에 얇은 매트리스 하나 깔고 자는 게 이 집 잠자리다. 부엌 천장에 굵은 나무 기둥들이 있는데 거기에 해먹을 걸고 잔다. 내가 마나우스에서 해먹을 샀던 건 이런 일을 예감한 것일까.
코타는 36살이다.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큰딸이 16살이고, 막내딸이 11살이다. 스무 살부터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이겠다. 남편 시머웅은 코타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62살이니 26년 차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잘 어울린다. 별 말 없이 살짝 웃기만 하는 시머웅과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코타. 시머웅은 머리에 딱 맞지 않는 낡은 MST 모자를 썼다. 마치 ‘내겐 MST밖에 없어’ 하는 것처럼.
클레우지마르가 자기 마을로 돌아가고 클레밀디스라는 사람이 코타 집으로 왔다. 26살이지만 MST 활동을 12년째 하는 젊은이다. 클레밀디스와 함께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하러 나섰다. 마을엔 아이들도 많고, 젊은이도 많고, 어른들도 많다.

동생을 돌보는 아이들

여자 아이들이 어린 동생을 하나씩 옆구리에 안았다. 언니나 누나라고 해서 아이들이 큰 건 아니다. 이제 일고여덟 살 난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옆구리를 치켜 올리며 서거나 걷는다. 그래야 어린 동생이 흘러내리지 않는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러고 하루를 보내는 걸까. 그래도 아이들이 씩씩하다. 힘든 기색도 없다. 잠깐 내가 안아줄까 싶어 다가갔더니 어린 동생이 누나한테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두 다리로 누나 허리를 꼭 감는데 엄청난 힘이다. 옆구리에 안긴 동생이 없다면 신나게 뛰어놀 테지만 아무래도 엄마가 혼자 돌보아야 할 아이들이 많은가 보다.
동생을 안은 일곱 살 여자 아이가 자기 집에 가자고 한다. 클레밀디스가 우린 다른 데에 갈 거라고 하니 안 된다고, 자기 집에 가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이 한참을 졸졸 따라오며 자기 집에 가자고 조른다. 말하는 아이 목소리는 단호하고, 얼굴은 다부지다.
아이를 따라 집으로 가니, 젊은 엄마가 아이들을 씻기고 있다. 아이는 엄마와 동생들을 사진 찍어주고 싶었던 거다. 아이 다섯을 낳아 키우는 젊은 엄마. 아이가 어서 엄마를 찍으라고 한다. 저 아이 마음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늘 어른이 아이를 돌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이가 엄마를, 아빠를 돌보기도 한다.
한국 농촌에서는 더 이상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이 마을에는 아이들이 많다. 저 아이들이 있어서 MST 운동은 쉽게 끊어지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운동뿐만 아니라, 외진 시골에서도 삶이 이어질 것이다. 희망이 사라진 시골에서 도시 변두리로 내몰려 거리에서 헤매야 하는 남루한 삶이 아니라, 딛고 선 땅에서 당당한 삶을 이룰 것이다.

마을길에서 만난 사람들

여자들은 우물에서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어 가거나 설거지를 하고, 화덕에서 음식을 끓인다. 저녁을 준비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인데 벌써부터 서두르는 건 왜일까. 코타네는 집 안에 화덕을 만들어두었던데 집 바깥에 화덕을 만든 집도 있다. 어느 집에서는 집 안에 있는 화덕에 불을 피웠는데 연기가 자욱했다. 자욱한 연기 속, 집주인 여자는 참 단단한 얼굴이다. 쉽게 절망하지도 않고 쉽게 들뜨지도 않을 얼굴이다.
고춧가루를 곱게 체에 거르는 여자도 있다. 그 빨갛고 고운 가루를 보니 반갑다. 나라는 달라도 사람들 사는 게 비슷하다. 만드는 방법만 다를 뿐이지 남미 음식이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빵을 만드는 곳도 있다. 두 사람이 열심히 반죽을 한다. 빵을 보관해두는 선반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빵은 흙으로 만든 가마에서 굽는다. 바나나를 익히고 저장해두는 곳에서는 풀빛 바나나가 노랗게 익는다. 흙집에서 익는 그 바나나는 어떤 맛일까. 나무와 흙을 바탕으로 사는 사람들은 나무와 흙을 닮았다.
집 앞에 의자를 내놓고 이웃들과 둘러앉아 이야기하며 뜨개질을 하는 여자들을 만난다. 앉으라고 비켜준 의자에 앉았는데 어미 닭과 병아리들이 나왔다. 어미 닭을 쫓아다니는 어린 목숨들. 사람들은 어미 닭과 병아리를 작은 울타리에 가두지 않는다. 저 맘대로 마을을 다니며 흙을 쪼고, 어미 닭한테서 사는 길을 배울 병아리들을 보고 있자니 목숨 달린 우리들은 다 비슷하다.
한 남자가 연필을 쥐고 공책에 띄엄띄엄 숫자도 쓰고 알파벳도 쓴다. 곁에는 아이를 가진 아내가 있다. 지금은 쓱쓱 쓰지 못하지만 아이가 파란 하늘빛에 눈부셔 할 때쯤이면 아빠는 아이 이름을 또박또박 쓸 수 있을 거다. 농기구를 들고 밭을 일구듯 연필을 쥐고 종이 위를 일구는 남자가 글 농사를 잘 지었으면 좋겠다.
글씨 연습을 하거나 책을 읽는 연습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가슴이 설렌다. 잃어버렸거나 빼앗겼거나 애초부터 막혀 있었던 배움을 되찾는 사람들이기에 그럴까. 조그만 의자에 앉아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두 손으로 브라질의 짧은 이야기책을 펼쳐들어 읽는 나이 든 아저씨를 본다. 저 모습이 아름답지 않으면 세상에 그 무엇이 아름다울까. 공책과 책 앞에 겸손하게 앉은 사람들. 붉은 깃발을 들고 먼 길을 행진하고 시위하는 모습도, 밭을 일구는 모습도, 책을 읽는 저 모습도 모두 MST이리라.

자랑하는 여자

가게를 하는 집이 있다. 집주인이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가니 뒷마당으로 이끈다. 뒷마당에는 닭들이 잔뜩 있다. 그걸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모이를 한 줌 뿌려 닭들을 모이게 하더니 어서 사진을 찍으란다. 사진을 안 찍겠다는 어린 손녀를 어떻게든 찍어주고 싶었는지 닭들 있는 데에 데려다놓으니 아이가 운다. 내가 원했던 건 아니지만 어찌나 아이한테 미안했는지 모른다.
주인 여자한테는 자랑하고 싶은 게 하나 더 있다. 어디서 뭐가 큰 소리로 울어대서 깜짝 놀랐는데 붉은 금강앵무새다. 크기도 엄청 크고 소리도 한 번 들을 때마다 깜짝 놀랄 정도로 크다.
주인 여자가 사진기 앞에서 즐거워하는 동안 흙벽을 짚고 선 남자가 계속 눈에 들어온다. 소리 내어 웃는 주인 여자와 달리 막막한 눈으로 닭도 아니고, 금강앵무새도 아니고, 사진 찍는 식구들도 아니고, 그 어딘가 여기에 없는 곳을 바라보는 남자. 마을을 돌면서 만난 사람들이 그래도 다들 밝고 편안한 얼굴들이었는데 남자는 우울해 보인다. 몸이 고단한 걸까, 마음이 고단한 걸까. 자꾸 남자 얼굴이 눈에 밟힌다.
울던 어린 여자 아이가 집으로 들어가다 문 쪽에 있던 비닐봉지에 담긴 콩을 쏟았다. 울면서도 그 작은 고사리 손으로 얼른 콩을 주워 담는다. 아이도 이 콩이 소중한 먹을거린 줄을 아는 걸까. 할머니나 다른 어른들 모두 아이에게 뭐라 않고 오히려 괜찮다고 달래는데 아이 울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아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나도 콩을 줍는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낯선 나를 피하던 아이가 그제야 바로 나를 쳐다본다. 울음도 조금씩 잦아든다.
클레밀디스가 그만 가야 한다고 해도 주인 여자는 쉽사리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직 자랑해야 할 게 더 있다. 딸이 아기를 낳았다며 사진을 찍어주라고 한다. 밖이 그리 소란스러웠는데도 갓난아기는 푹 잔다. 얼마 안 있어 갓난아기는 잠자는 시간이 줄어들고 당싯당싯 팔다리를 놀리며 방실 웃겠지. 옹알이도 하고 뒤집기도 하고 배밀이도 하고 그러다 일어서고 걸으려고 애를 쓰겠지. 그때마다 할머니인 이 여자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들여 살아 처음 보는 모습처럼 자랑을 하겠지. 모든 목숨 달린 것들을 자랑하는 여자.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이 갓난아기였을까. 여자는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늘을 산다.

밥 한 그릇

금세 어두워지고 낮 더위가 무색하게 저녁 바람이 서늘하다. 아침에 들렀던 ‘3월 26일 정착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왔는데 엘도라도 카라자스 정착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시머웅이 만든 호롱불이 어둔 집을 밝힌다.
코타가 낮에 돌을 골라낸 쌀로 밥을 짓고, 껍질 깐 페이종을 푹 끓인다. 다른 건 넣지 않고 페이종만 넣었다. 낮에 옆집에서 가져온 돼지고기 한 덩이를 잘라 꼬치에 끼워 불에 굽는다. 나무를 지피는 화덕에서 음식들은 한참을 익었다.
플라스틱 접시에 밥을 담고, 끓인 페이종을 붓고 고기도 한 점 얹었다. 탁자에서 밥을 먹기에는 의자가 모자란다. 의자가 넉넉하다 해도 식구들이 다 둘러앉기에는 자리가 좁다. 시머웅이 짠 폭이 좁은 긴 나무 의자에 접시를 놓고 밥을 먹거나 침대에 걸터앉아 밥을 먹거나 다들 자리를 하나씩 찾아 앉는다.
호롱불이 있지만 구석구석 밝혀주지는 못해 사람들은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숟가락을 든다. 집 밖이나 똑같이 어둔 집 안에서 모두 흩어져 조용히 밥을 먹는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밥을 앞에 두고 기도하듯, 명상하듯 한 숟가락 한 숟가락 뜬다.
밥과 콩, 고기 한 점, 이토록 소박한 밥을 먹는 일이 이 세상에서는 왜 그리도 힘든 일이 되었을까. 이 밥을 얻기까지 땅 없는 농업 노동자 운동은 22년 동안 수많은 동지들을 잃어야 했고, 어딘가에는 아직도 홀로 떠도는 땅 없는 농업 노동자들과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을 것이다. 엘도라도 카라자스에서 먹는 이 밥이 내게 자꾸 생각하라고 말한다.

공부하는 밤

저녁을 먹고 난 뒤 시머웅이 씻고 옷을 갈아입고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 책과 공책, 작지만 두꺼운 포르투갈어 사전을 들고 학교로 간다. 옷을 갈아입어도 모자는 여전히 벗지 않는다. 학교로 가는 시머웅은 마치 정갈하게 예배를 드리러 가는 사람 같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지만 하루 딱 두 시간, 저녁 7시에서 9시까지 발전기를 써서 불을 켠다. 그렇다고 마을 모든 집들이 환히 불을 밝히는 건 아니다. 딱 두 곳만 불을 켠다. 학교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텔레비전을 보는 마당이다. 그래서 발전기는 학교와 그 마당 사이에 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텔레비전도 끝난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보는 것보다 불 밝은 곳에서 친구들을 만나 노는 것이 좋아 불 있는 곳을 찾아 나온다.
학교에서는 공부가 한창이다. 마을 사람들은 비디오를 보면서 공부하기도 하고, 서로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공부하는 엄마 다리를 베고 단잠 든 딸도 있다. 다른 교실에서는 잡지에서 그림을 오려 붙이는 일이 한창이다. 한 아주머니는 동물들을 그려 호박씨와 옥수수 알, 콩과 쌀을 붙여 꾸미기도 했다. 손에 물 묻히는 일과 흙 묻히는 일밖에는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머릿속 생각을 도화지에 풀어놓는 시간, 교실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잠든 남자 아이는 그 웃음소리에도 깨지 않는다. 날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버지를 따라 나온다는 아이. 그 시간에 텔레비전을 볼 수도 있고, 친구들과 놀 수도 있고, 집에서 잘 수도 있을 텐데 아이는 왜 늘 학교 가는 아버지를 따라 나설까. 밤에 불 켜진 학교가 아이에게는 다른 세계로 느껴질까. 그 세계가 내뿜는 냄새가 아이는 좋은 것일까. 아이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동무인가.
낮에 아이들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토론하고, 잡지 종이를 오려 그 무언가를 표현하는 어른들. 이 모습이 운동이고 저항이고 혁명이리라. 돈 없는 자는 학문과 예술, 문화에 접근 금지인 자본주의사회에 말이다.
선생님들은 MST의 붉은 티셔츠를 입었다. 선생님들은 멀리 다른 곳에서 출퇴근하지 않는다. 바로 이 마을에서 함께 사는 주민이자 동지이다. 겨우 두 군데 정착 마을을 보았을 뿐이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학교를 크게 지어놓은 걸 보니 MST 사람들이 교육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알겠다.
수업을 마치고 교실 정리를 하는 어린 선생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을을 이룬 지는 이제 3년 되었고, 그전에 다른 정착 마을에 살다가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모두 몇 명 정도 사느냐고 물었더니 1,800명쯤 된다고 한다. 그렇게 많으냐고 놀라니까, 마을을 돌면서 보지 않았느냐고, 한집에 열 명씩만 잡아도 그 수는 넘을 거라고 한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네댓은 되는 집을 많이 봤는데 더 많은 경우 그럴 수도 있겠다.

별을 보며 먹는 망고

수업도 끝나고 텔레비전도 끝나고 윙윙 소리를 내던 발전기도 잠들었다. 이제 겨우 9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마을은 서서히 잠에 빠져든다. 호롱불 하나 들고 야자나무 잎을 엮어 담을 세운 곳에서 몸을 씻었다. 작은 들통 하나에 길어온 물을 페트병 자른 바가지로 떠가며 몸을 씻었다. 이걸로 어찌 씻나 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물이면 충분했다. 쓰고도 남았다. 그동안 내가 흘려버린 물은 도대체 얼마나 많을까.
적은 물로도 몸을 씻을 수 있고, 설거지를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러고 보면 도시는 지나치게 ‘청결’에 얽매여 있다. 더 많은 세제와 더 새로운 세제를, 더 강력한 세제를 만들어 팔고, 사게끔 강요하지 않는가. 부엌, 화장실과 방, 옷, 그릇과 가구를 나누는 다양한 세제들은 사람들한테 쓸고 닦고 빠는 데 더 많은 시간과 힘, 물과 전기, 돈을 쓰게 한다. 내 한 몸 깨끗이 하자고 자연을 더럽히는 일들을 강요당하지 않는가.
코타가 준 망고 하나를 어둔 마을을 바라보며 부엌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먹는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다. 바로 서지도 못하고 의자를 끌어다 앉지도 못하고 딱 이거라는 듯 똥 싸는 자세로 앉아 별 보면서 망고를 베어 먹는데 왜 어쭙잖게 눈물이 날까. 코타가 맛있냐고 묻는데 고개도 못 돌리고 응, 응만 해댄다. 아이들은 내 뒷모습을 보며 저 여자 왜 저러고 앉아 먹을까, 아마 우스울 거다. 나도 모르겠다. 왜 이러고 앉았는지.
도시라면 밤새 불야성을 이룰 텐데, 다른 곳이라면 물을 펑펑 흘려버릴 텐데 어느 한쪽에서 그 많은 불과 물을 쓰는 동안 여기는 잠들어야 한다. 그 불과 물이 없어서 눈물이 나는 게 아니다. 그런 것쯤 간단히 견뎌내는 사람들과 밤이 내뿜는 고요함이 서럽도록 아름다워서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오히려 밤이 밤다운 이곳. 밤늦게까지 공부하게 하지 않고, 밤늦게까지 텔레비전 앞에, 컴퓨터 앞에 정신을 잃게 하지 않고, 밤늦게까지 술 마시게 하지 않고, 배가 부른데도 생각 없이 먹게 하지 않고, 밤늦게까지 괴로워하지 않게 하고, 어둠에 겸손하게 만든다. 호롱불마저 꺼진 집들, 밤은 사람들에게 하루를 마무리하라고 한다. 벌써 아름다움은 다 빼앗겨버린 자본주의 도시들은 빌딩에, 다리에, 나무에 온갖 전등불로 밤을 밝혀 아름다움을 조작하지만, 정작 아름다움과 아름다운 사람들은 늘 이런 곳에 있다.

잠자리

막내 사라가 얇은 매트리스를 부엌 구석에 깐다. 넷째 솔란지의 해먹 옆에 시머웅이 내 해먹을 걸어준다. 첫째 시엘리는 작고 푹 꺼진 침대에 눕고, 둘째 산드리뉘와 셋째 시드니가 내 해먹 아래쪽에 해먹을 건다. 다들 자기 해먹은 자기가 건다. 나무에 해먹 네 개를 걸고 그 위에 네 명이 누워도 끄떡없는 이 집은 얼마나 튼튼하다는 걸까.
처음 누워보는 해먹이다. 무턱대고 발을 먼저 올렸더니 해먹이 흔들흔들, 나는 비틀비틀, 앉기도 전에 쿵 바닥으로 떨어진다. 한 번에 멋지게 오르리라 했던 기대가 폭삭 무너진다. 흙바닥이라 아프지는 않다. 다들 우스워 죽겠단다. 솔란지가 가르쳐주겠다고 나선다. 해먹을 뒤로 하고 가운데에 엉덩이를 걸쳐 편안히 앉아 중심을 잡고 몸을 돌리면서 다리를 뻗어 하나씩 올리면 된다는 거다. 가르쳐준 대로 하니 쉽다. 새벽이면 추울 거라고 코타가 얇은 이불을 건네준다. 내 사진기로 딸들이 서로 사진을 찍으며 웃는다. 누워 있는 내게 사진을 보여주려고 가져오고, 기념으로 해먹 위에 누운 나도 찍어준다.
하루 종일 열어놓았던 야자나무 잎으로 엮어 만든 문을 닫는다. 어느새 호롱불도 꺼져 깜깜하다. 코타와 시머웅이 작은 방으로 들어가고 언제 웃고 떠들었냐는 듯 아이들도 집도 마을도 세상도 고요하다. 밤은 이렇게 어두운 것이고 고요한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이제 사람도 고요해질 시간이다.

노래하는 아이들

새벽 5시부터 밖에서 사람들 오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 마을은 밤이 밤다운 것처럼 새벽도 새벽답다. 전기로 불 밝히는 곳이 아니어서 그럴까. 아침 하늘빛이 달라지는 걸 보고만 있어도 좋다.
6시가 되니 모두 일어나 움직인다. 그렇다고 허겁지겁 바쁜 건 아니다. 밖에 나와 아침 바람을 쐬고,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한다. 날마다 바로 코앞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도 밤이 지나고 나면 다시 할 말이 생긴다. 코타는 커피에 설탕을 넣어 팔팔 끓여 망에 걸러 보온병에 담아둔다.
공동으로 쓰는 화장실은 재래식인데 희한하게도 냄새가 전혀 안 난다. 먼저 화장실을 다녀온 옆집 주어웅 아저씨가 두루마리 화장지를 빌려준다. 화장지를 돌려주러 가니 아저씨가 내게 집 앞에 심어놓은 채소와 약초들을 하나씩 알려준다. 여기저기 저 맘대로 자라나 겉보기에는 이게 밭인가 싶은데 하나하나가 다 쓰임이 있는 푸성귀들이다.
아침은 커피 한 잔과 딱딱하게 마른 곡식이다. 꼭 찐쌀처럼 누른빛을 한 걸 그냥 손으로 한 줌씩 집어 꼭꼭 씹어 먹거나 커피에 섞어서 떠먹는다. 나는 너무 딱딱해 몇 번 집어 먹고는 말았다. 내 이는 어느덧 약해졌나 보다. 더 가공하거나, 더 부드럽고, 더 입에 맞게 만들지 않고 그대로 딱딱한 걸 먹는 데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겠지. 이들 조상들 때부터 내려온 어떤 뜻이 담겼을 거다. 조금씩, 천천히, 겸손하게 먹으라는.
첫째가 탁자 위에서 점심거리로 쓸 닭을 다듬는다. 기름을 떼어내는 솜씨를 보니 일을 적잖이 해 본 손이다. 둘째는 작은 수박 한 덩이를 가져와 얇게 조각낸다. 함께 먹어야 할 사람이 많다. 뭐든 많이 먹어야 맛이 아니다. 함께 먹으면 더 맛나다.
클레밀디스도 오고, 옆집 이스나자니가 두 딸을 데리고 놀러온다. 이스나자니는 학교 선생님이다. 보통 네댓씩 아이들을 낳지만 이스나자니는 둘로 만족한다고 한다. 고생하는 젊은 여자들을 많이 봤는가 보다. 왜 그렇게 많이들 낳느냐는 물음에는 자기도 잘 모르겠단다. 한집에 여자 아이들이 많은 걸 보면 이곳도 아들에 대한 욕심이 있는 건 아닌지.
이른 아침부터 코타 집에 사람들이 가득 찬다. 한 마을에 사는 코타 친구도 왔다 가고, 아이들 친구인 하이아니와 시르레니도 와서 논다. 어느새 닭을 다 손질한 큰딸이 보여줄 게 있다면서 2006년도 MST 비망록을 가져온다. MST에서 해마다 만드는 비망록은 MST 활동사진과 자료도 담고 있지만, MST를 지지하는 시인들과 화가들, 음악가들이 쓴 시와 노랫말, 사진, 그림들로 마치 예술 작품처럼 만들었다. 플로리아노폴리스 발전노조 사무실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다.
비망록에 든 MST 노래를 셋째 딸과 막내딸, 그리고 친구 둘이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아 부른다. 그렇게 까불던 셋째는 정작 노래 부르면서는 어찌나 쑥스러워 하는지. 노래 부르는 아이들을 대견스레 쳐다보던 코타가 자연스레 끼어 노래 부른다. 아이들이 노래를 시작할 때는 몰랐는데, 노래 부르는 코타를 옆에서 지켜보자니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노래 가사도 못 알아들으면서 왜 가슴이 아릿해지는지, 참……. 무조건 앞으로 가야지 뒤로 한 발 물러서면 그대로 굶주림과 죽음인, 아이 다섯 거느린 서른여섯 여자가 노래한다.
노래를 다 부른 아이들이 씩씩하게 외친다.

셋째 딸 : 땅 없는 농업 노동자 운동!
다른 아이들 : 투쟁!
셋째 딸 : 땅 없는 농업 노동자 운동!
다른 아이들 : 가치를 위한 투쟁!
셋째 딸 : 자유로운 조국!
다른 아이들 : 승리하리라!
셋째 딸 : 토지 개혁!
다른 아이들 : 대농장 없는 브라질을 위하여!

핏발 선 구호라기보다는 노래하듯이 외치는 구호. “자유로운 조국! 승리하리라!”는 저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미국이 지원하는 독재 정권 아래에서 시달렸던 다른 남미 국가들에서도 절실하게 외쳤던 구호이고 노래였다. 이제 막 피어나는 10대 여자 아이들이 투쟁과 자유와 가치와 개혁을 외친다. 그건 삶이다.
떠들고 웃고 노래하던 셋째 딸과 막내딸이 금세 사라지고 안 보인다. 아이들은 학교 갈 시간을 놓치지 않는다. 큰딸과 둘째 딸, 아들은 좀 멀리 떨어진 마을 바깥 학교에 가야 해 준비한다. 마을에 있는 MST 학교에서 모두 배우는 줄 알았는데 중등과정 학생들은 밖에서 배운다.
잠시 나갔던 옆집 이스나자니가 자기 비망록을 가져와 펼친다. ‘주는 사람’이라고 맨 위에 적혀 있고 밑줄이 그어져 있다.
“여기다 네 이름 좀 써줘.”
내 이름을 알아두려고 하나 보다, 하며 별 생각 없이 이름을 적는다. 알파벳으로 이름을 쓰고, 옆에 한글로 적는다. 금방 다 적고서는 돌려주니 도로 나한테 내민다.
“네 거야.”
이곳으로 오기 전 들렀던 벨렝에서 만난 친구인 솔도 주소를 적어주고는 “네 집이야”라고 해 말문이 막히게 하더니, 다시 이스나자니가 내 말문을 막는다. 앞에 몇 장만 이스나자니가 일기를 쓴 흔적이 남았을 뿐 비망록은 거의 새 거였다. 나는 누군가를 감동시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멋진 말을 해 본 적이 없는데…….

도로시 스탕과 체 게바라

이스나자니가 준 비망록을 다시 펼쳐든다. 표지를 열면 첫 장에서 체 게바라가 웃는다. “우리 힘은, 앞날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노동자와 농민, 가난한 모든 계급이 하나 될 때 생긴다”고 말하면서. “토지개혁, 정의, 빵, 자유를 외치는 그대 목소리 사방에 울려 퍼질 때 그대 곁에서 하나 된 목소리로 우리 그곳에 있으리”(󰡔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실천문학사, 2000)라고 한 체 게바라는 브라질 땅 없는 농업 노동자들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여기선 체 게바라가 상품이 되지도 않고, 소비되지도 않는다. 체 게바라를 외치는 목소리가 허망하지 않다.
비망록 뒤쪽에는 파라 주 트란스아마조니카 지역에서 30여 년을 땅 없는 농업 노동자들과 살아온 도로시 스탕Doroty Stang 수녀 사진과 짧은 설명 글이 있다. 도로시 스탕 수녀는 미국 사람인데 브라질로 귀화해 아마존 환경 보존과 농민운동에 헌신해왔다. 아마존 지역에서 불법으로 나무를 베고 약탈한 농장주들을 고발하고 맞서 싸웠다. 그러다 도로시 스탕 수녀는 2005년 2월 12일, 끝내 농장주들과 불법 벌목업자들이 고용한 사람이 쏜 총에 숨을 거두었다. 1931년에 태어난 도로시 스탕 수녀, 3년 먼저 태어난 체 게바라와 동시대를 젊은이로 산 그이는 총을 들지 않은 혁명가이다.
도로시 스탕 수녀와 체 게바라는 왜 자기 나라를 떠나 멀고 험한 곳,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을까. 가슴에 진지하게 물어야 할 물음 하나.

집 짓는 시머웅

시머웅은 집 옆 빈 터에 방을 몇 개 들일 참이다. 벌써 나무로 집 틀은 잡아놓았다. 지금 하는 일은 지붕으로 얹을 야자나무 잎을 말리고 다듬는 일이다. 한쪽에는 기다란 잎이 달린 야자나무 가지가 쌓여 있고, 다른 쪽에는 손본 가지들이 차곡차곡 겹쳐져 늘어서 있다.
야자나무 가지는 아주 길다. 두껍고 긴 가지에 마주보고 길쭉한 잎들이 나 있다. 가지는 꼭 목재소에서 깎아 다듬은 각목처럼 매끈하고 단단하다. 잎도 뻣뻣하고 억세다. 들어보니 꽤 무겁다.
시머웅이 허리춤에 차고 나온 칼로 가지와 잎 사이를 위에서 아래로 한 번 죽 긋는다. 마주 보는 다른 쪽은 방향을 거꾸로 해서 칼질을 한다. 잎을 잘라내는 게 아니라 억센 나뭇잎을 가지 아래쪽으로 접기 위해서 금을 내는 거다. 뾰족하고 길쭉한 잎들은 잎겨드랑이만 남은 채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 그다음에는 양쪽 잎들을 꺾어 접는다. 저러면 달랑달랑 달린 잎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나 싶은데 하나도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바로 앞에서 보면서도 도저히 모르겠다. 잔뜩 매달린 나뭇잎들을 어떻게 똑같이 잎겨드랑이만 남기고 자를 수 있단 말인가. 꺾어도 부러지지 않는 건 또 뭔가. 시머웅은 야자나무 성질을 꿰뚫은 게지. 그렇게 만든 가지들을 차곡차곡 겹쳐놓고 다른 야자나무 가지로 눌러놓는다. 그리고 한 번씩 시머웅이 그 위에 올라가 장화 신은 발로 꾹꾹 밟는다. 나중에 잎이 벌어지거나 일어나지 않게 하는 거다. 아니 저러면 이번엔 진짜 꺾여 나뭇잎이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싶은데 야자나무 잎은 시머웅 무게도 이겨낸다. 저 강한 야자나무 잎은 잘리고, 꺾이고, 밟혀도 끄떡없이 다시 살아가는 이 사람들 같다.
나무와 흙, 야자나무 잎으로 짓는 집. 시머웅 아버지도 이렇게 집을 지었겠지. 나무를 구하고, 흙을 구하고, 야자나무 잎을 말리고, 시간을 기다리고. 이틀, 코타와 시머웅 곁에 있다 보니, 자라나는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잠재울 자리를 마련하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이 세상에 있을까 싶다. 목숨도 내걸고 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땅을 일구는

클레밀디스가 체육 수업을 하는 선생님한테서 오토바이를 빌려서 함께 사람들이 일하는 곳을 보러 나갔다. 마을 바깥, 쭉 뻗은 도로를 헬멧도 쓰지 않고 달리려니 조금은 겁난다. 찻길 아래로 양쪽에 들판이 펼쳐진 곳에 멈추어 섰다. 이곳에서도 마라바 정착 마을과 같이 쌀, 옥수수, 페이종, 감자, 만조카와 여러 가지 채소들을 키운다. 이런 걸 생활 작물이라고 하려나. 대농장들이 수출을 목적으로 단일 품목을 재배했다면 이들은 먹고사는 데 우선 필요한 것들을 키워낸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마을에서 나올 때도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하던 베네수엘라 투카니 사람들만 생각해 여기 사람들은 왜 별로 일을 안 할까, 이상했다. 속으로 왜 일들 안 하고 이러고 있나요,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타는 듯한 더위에 일을 해야 맞는 걸까. 이 사람들한테는 이 사람들 철이 있을 게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갈아 얹어야 할 지붕을 엮거나, 그늘진 곳에 해먹을 치고 누워 쉬거나 이웃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오히려 적당한 일이겠지. ‘열심히’, ‘성실히’ 일하고, 뭐든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말과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이 무슨 격언처럼 쓰이는 사회에서 산 탓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 노동자가 노동 기계가 되기를 강요한다.
자연은 일할 수 있을 때는 일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쉬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도시는 24시간 불을 켜놓고 기계를 돌린다. 24시간 동안 일을 하게 한다. 24시간 동안 물건을 사고팔게 한다. 24시간 동안 청소하게 한다. 24시간 동안 먹게 한다. 24시간 동안 놀게 한다. 24시간 동안, 24시간 동안……. MST 사람들은 그 24시간 사회에 맞선다.

학살, 1996년 4월 17일

엘도라도 카라자스 학살이 벌어진 곳에 클레밀디스와 함께 가기로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내리쬐는 볕이 말이 아니다. 그저 견디다 나중에 물 한 바가지 끼얹는 수밖에 없다. 요란스레 더위를 피하려 애쓴다고 피할 수 있는 더위도 아니다. 저기 버스가 온다.
십 년 전 19명이 학살당한 현장은 한적한 찻길이다. 어쩌다 한번 휙 지나는 차가 있을 뿐, 뙤약볕 아래를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낮 12시. 시계바늘 두 개가 12에 가 포개어진 채 그대로 멈춰버리고 그예 세상도 가던 길을 멈춘 듯 고요하다.
찻길 바깥쪽에 사진으로만 봤던, 마노와 단이 만든 기념물이 서 있다. 사진으로 볼 때는 웅장해 보였는데 와서 보니 쓸쓸해 보인다. 그래도 기념물이 있어 다행이다.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한 번쯤 뒤돌아볼 테니까.
나무들은 내가 브라질 북부 길에서 본 나무들보다 훨씬 굵다. 19그루다. 나무 끝을 따라 올려다본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맑다. 세워진 나무들 한가운데 죽은 사람들 이름이 적힌 동판이 있다. 나는 이들을 모르지만, 수첩에 이름을 적는다. 꼭 그래야만 한다고 마음이 시킨다.

알타미로·아망시오·아빌리우·코스타·알베스·이르머웅·크라 시아누·조아킴·알베스·히바마르·루리발·레오나르두·마누엘 ·하이문두·홉슨·오지엘·발데미르·호드리게스·카르네이로.< br /> 혹시라도 허투루 적을까봐 클레밀디스한테 확인해가며 한글로도 적는다. 클레우지마르가 어제 부른 노래에 나오는 소년 ‘오지엘’도 있다. ‘오지엘 알베스 페레이라’. “땅과 교육을 위해 투쟁한 민중 투사”라고 클레우지마르가 노래 불렀지.
‘루리발 다 코스타 산타나’라는 이름도 있다. 내가 지금 머무는 정착 마을 이름이 바로 ‘루리발 산타나’ 아닌가. 땅 없는 농업 노동자들은 노래로, 마을 이름으로 어떻게든 저 4월 17일과 죽어간 사람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정착마을 이름이 ‘아캄파멘토 4월 17일’인 곳도 있다.
어제 클레우지마르가 부른 노래에서 풀리지 않았던 “S” 굽이가 무엇인지 이제 알았다. 여기가 바로 “S” 굽이다. 사람들은 이 마을 이 길을 그렇게 부른다. 카라자스를 지나 마라바 가는 이 길이 “S” 자로 굽었다. 아까 이 길을 사진 찍을 때는 몰랐다. 그저 그이들이 걸었을 길을 찍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늘 “S” 굽이에 남아 있을 것이다. 변혁하기 위해 투쟁하는 곳이면 시골과 도시, 그 모든 지역에서 “S” 굽이는 계속될 것이다”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제 풀린다. 변혁과 해방을 원하는 곳에는 죽음과 삶이 함께 있다. 살기 위해 불의와 불평등, 폭력에 맞서 싸우지만 돈과 권력을 쥔 사람들은 이들을 죽이려고 달려든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정의, 평등, 평화를 원할까? 자본가가 평등을 말할 수 있을까. 권력자가 정의를 말할 수 있을까. 총을 겨누는 자가 평화를 말할 수 있을까.
10년을 뒤로 돌아가 4월 17일, 헌병대가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헌병대는 엘도라도 카라자스 “S” 굽이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서쪽 파라우아페바스에서 출발했고, 다른 한쪽은 북쪽 마라바에서 출발해 이들을 포위했다. 한 사람에 두 발, 세 발씩 쏜 총에 19명이 목숨을 잃었고, 더 많은 수가 다쳤다.
죽고 다친 사람들은 “토지개혁을 위해 걷기”에 나선 땅 없는 농업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그해 3월 5일, 파라우아페바스와 엘도라도 카라자스 사이에 있는 마카세이라 농장을 점거했다. 모두 3,500명이 살 수 있는 땅이었다. 이들은 대농장을 점거한 후 ‘토지개혁과 이주 국가협회’와 함께 주정부와 교섭을 하는 중이었다. 주정부에 토지수용을 요구하며 4월 10일부터 모두 1,500명이 걸었다. 학살 하루 전 그이들은 이 가까이에서 야영을 했다. 엘도라도 카라자스를 거쳐, 마라바를 거쳐, 파라 주 수도가 있는 북쪽 벨렝까지 걸으려고 했지만 총이 그 길을 막았다.
어째서 군대는, 주정부는, 브라질 정부는, 자기 나라 민중을 죽였을까. 자기 땅 민중을 향해 총을 쏜 군대와 정부가 허다한 세상인데 쓸데없는 물음인가. 파라 땅을 남쪽에서부터 북쪽까지 걸으려 했던 사람들. 3,500명이 살기 위해서는 걷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이들을 기념하는 작은 집은 문이 잠겼다. 가까이 사는 어느 할머니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데 할머니가 집에 안 계신다. 유리를 달지 않고 창살만 쳐놓은 창문 새로 보는 기념관, 그림 속에서 가족을 잃은 남은 가족들은 모두 소리 없이 오열하고 통곡한다. 나무판자로 지어 낡고 휑한 기념관이 안타까운데 그나마 나무판자 벌어진 틈과 창으로 빛이 드니 고맙다. 아니다. 낡고 휑한 기념관을 안타까워하지 말자. 학살 책임자가 그대로 거리를 거닐고, 실종된 사람들이, 죽어간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찾아내지 못한 채 빛나는 기념물이나 기념관들은 무슨 소용일까. 여기 낡고 작은 기념관이 오히려 진실하다.
기념관 옆에는 커다란 망고 나무가 있다. 툭툭 땅에 떨어져 썩는 망고들도 많다. 클레밀디스가 몇 개 따서 가게에서 빌려 온 칼로 깎아 나누어 먹었다. 이제 미립이 나서 통째로 쥐고 먹지 않는다. 잘라서 먹으면 나중에 고생하지 않는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다디단 망고를 먹는다. 이 망고 나무는 십 년 전에도 여기 서 있었을까.
망고를 먹는 동안 할머니가 오셔서 열쇠를 받아 자물쇠를 열고 기념관에 들어갔다. 그날 현장을 다급하게 알린 쪽지를 크게 복사해놓았다. 누군가 4월 17일 저녁에 마카세이라에 있는 야영지에 보낸 쪽지다.
“경찰이 바로 이 굽이에서 숱한 사람들을 살해했다. 당신들은 황급히 나와야 한다.”
영수증처럼 보이는 종이 뒷면에 적어 내려간 두 문장이다. 첫 문장에서 다음 문장 사이가 두렵다. 숨차다. 황급히 나와야 한다는 건, 이 굽이로 어서 오라는 건지, 아니면 마카세이라에 있으면 당신들도 위험하니 어서 다른 곳으로 피하라는 것인지…….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도 이런 종이쪽지를 썼을까. 곳곳에서 총에 맞아 죽어간 사람들이 있으니, 그런 날이 단 하루가 아니라 여러 날이니 광주에서 오간 종이쪽지는 한 장이 아니라 더 많았을까. 광주에서 밖으로 날려 보낸 쪽지는, 바람에 휘날려 사라지지 않고, 비에 젖어 뭉개지지 않고, 발에 밟혀 찢기지 않고 잘 갔을까. 당신들은 황급히 와야 한다고 제대로 알려줬을까. 군인이 한반도 남쪽 이 굽이에서 숱한 사람들을 살해한다고, 학살을 멈추지 않는다고 제대로 알려줬을까. 광주에서 보낸 종이쪽지가 26년을 돌아, 엘도라도 카라자스에 선 내게로 날아와 말한다. 너는 나를 너무 쉽게 잊었다고.

바로 저 여자들

5시가 가까워오지만 한낮에 해가 너무 심하게 타올라 더운 기운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슬렁슬렁 걷다 보니 아이들이 체육 수업 시간에 공 차던 운동장이다. 거기 여자들이 모였다. 코타 막내딸부터 아기 엄마 이스라자니까지 모두 12명 여자들이 축구를 한다. 이스라자니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들도 서넛 있다. 오로지 두 명만 운동화를 신고 나머지는 죄다 맨발이다. 배구공도 아니고 축구공을 차면서 맨발이다. 찼다 하면 저만치 날아간다. 서로 공을 얻겠다고 그 먼 길을 냅다 달려간다. 나 같으면 약아빠져서 그때 조금씩 쉴 텐데, 이 여자들은 몸까지 부딪쳐가며 공을 차지하려고 끝까지 달린다. 얼마나 뻥뻥 까대는지 소리만 들어도 소심한 나는 어깨가 절로 움츠러든다. 내가 있는 쪽으로 공이 날아올라치면 얼른 두 팔을 굽혀 얼굴 먼저 가리고 본다. 여자들은 그렇게 날아오는 공에 넓적다리를 맞고, 엉덩이를 맞고, 얼굴을 맞는다. 그래도 끄떡없다. 뻥뻥 차는 것보다 맞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모습이 더 무섭다. 아주 죽기 살기로 하는데 겁난다. 남자들과 아이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서서 구경을 한다. 공이 날아오면 “아!” 하는 감탄사를 날리며 뒤로 슬슬 피한다.
아, 이 더운 날에 축구라니. 너무도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벌써 늙어버린 걸까. 바로 저 여자들이다. 언젠가 신문에서 MST 여성들이 토지개혁을 확실하게 하지 않는 룰라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농업 관련 청사를 점거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저 여자들을 보니 그 어디든 ‘점거 가능’이다. 시위를 해도, 행진을 해도 이 여자들이 맨 앞에 설 거다. 저 멋진 여자들이 뭔들 못할까. 하이힐에 발을 맡기지 않고, 더 예뻐 보이기 위해 얼굴을 꾸미지 않는 여자들. 이 여자들은 아무렇게나 잘라 입은 옷을 걸쳐도 멋지다. 그 누구랑 붙어도 기죽지 않을 여자들이다. 다섯 살 먹은 큰딸이 엄마가 벗어놓은 신발을 들고 울면서 엄마, 엄마 불러도 이스라자니는 고개도 안 돌리고 공이 가는 방향을 쳐다보며 달린다.

새로운 삶과 대안을 만드는 운동

학교 마당에 여자 3명, 남자 10명 모두 13명이 의자를 빙 둘러놓고 앉았다. 코타도 있다. 마을 각 그룹 대표자들이 모여 활동 회의를 한다. 클레밀디스한테 조용히 물어보니 “마을에 부족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듣고 싶었던 건 그 부족한 게 뭔지였는데…….
텅 빈 교실을 둘러본다. 학교를 지을 때 처음 마음이 어땠을까. 콘크리트 하나 안 쓰고 땅을 다지고 나무판자를 세우고, 야자나무 잎으로 지붕을 얹은 학교. 이 학교에서 공부하면 사람들 마음은 콘크리트처럼 굳어 딱딱하고 차갑게 되지 않으리라.
점점 더 어두워지는데 활동 회의는 끝나지 않는다. 부족한 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젊은이부터 나이 든 이까지 모여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고 자신이 할 말을 차분히 하는 사람들을 보니 여러 생각이 든다. 회의하는 사람들 곁에서 혼자 생각한다.
‘공동체’는 무엇일까. 이제까지 공동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지역사회 공동체, 교육 공동체, 빈민 공동체, 문화 공동체, 연극 공동체, 라디오 공동체……. 이밖에도 공동체라는 말이 가 붙을 수 있는 곳은 많다. 아니 어쩌면 갖다 붙이면 다 공동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한 공동체는 드물다.
이 마을은 삶터와 일터를 함께하는 공동체이면서 교육 공동체이며 사회변혁을 위한 운동을 하는 공동체이다. 이들 운동에는 이들 삶이 달렸다. 조무래기 아이들부터 이제 막 머리가 커지는 아이들이 있고, 기운 팔팔하게 솟는 젊은이들과 삶 굽이굽이를 돌아온 어른들이 있다. 브라질에서 땅 없는 농업 노동자는 운동을 해도 되고 그만둬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바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평등, 평화를 위해서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다. 농사를 짓고만 있을 수 없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한길이 아니다. 쉬고, 놀고, 카드놀이 하고, 하릴없이 앉아 있고, 술에 취해 있기도 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이 마을에 머무는 동안 나는 보았다. MST 운동은 단지 땅을 점거하고 사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방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과 대안을 만드는 운동이라는 것을.
 

2008-06-20 16:27:58

의견글쓰기 프린트하기 메일로 돌려보기
이 글에 대한 의견보기  다른글 의견보기
아직 올라온 의견글이 없습니다


| 목록보기 | 윗글 | 아랫글 |

Powered by 노동넷

Copyleft by 진보평론(The Radical Review)   전화: 02)2277-7950 팩스: 02)6008-5138
(우121-855)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 180-1 3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