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혁 소* * 강원 평창 진부에서 남. 84년 󰡔詩人󰡕을 통해 작품 발표 시작. 시집으로 󰡔論介가 살아 온다면󰡕, 󰡔수업시대󰡕, 󰡔반성문󰡕, 󰡔다리 위에서 개천을 내려다보다󰡕 등이 있음. 전교조 강원지부 사무처장을 지냄. 현재 인제 원통중학교에서 미래의 노동자들과 생활하고 있음.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꽃


춘천에서 강촌 지나 서울로 가다보면 당임리 마을이 있는데, 그 이쁜 마을에는 풀무원 두부 공장이랑 국수를 만드는 면 공장이 있고, 두 달 넘게 파업 중인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구호들 중 ‘십 년을 기다렸다 일요일은 쉬고 싶다’는 그 말에 목이 메는데, 연대랍시고 모은 돈 몇 푼 내려놓고 엄마 노동자들이 손수 지은, 직장이 폐쇄되어 어쩌면 천막으로 나앉아야 할지도 모를 식당에서, 따뜻한 저녁 파업밥 한 그릇 염치없이 먹었습니다. 거기, 노동자들이 줄을 서는 배식대 위 원비디 작은 화병에, 엄마 노동자들이 꽂아 두었을 이름 모를 들꽃들이 처연히 피어있었습니다. 사무국장 박제동 아줌마의 깎은 머리는 그 중 슬프도록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아직 파업을 모르는 나는 언제쯤 그렇게 진지한 꽃으로 필 수 있을까요.
烈士들의 나라


지는 단풍나무 아래서
많은 생각을 해보지만
맺히는 생각 없다, 버리라고, 흔들지 말라고
나무들은 말한다
작은 바람에도 처연하게 제 잎을 떨구는
나무, 나무, 나무, 나무들

겨울을 이겨 봄을 살고자
나무는 잎을 버린다 떨어진 저 잎들은
이렇듯 붉게 스러져간,
죽어서야 이름이 되는, 가을의 열사들이다

나무야, 살기 위해 잎을 버리는 행위는 무모한 짓이야. 무모한 행동을 통해 목적을 이루던 시대는 지나갔거든.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 아니던. 얼어 죽더라도 꿋꿋하게 잎을 달고 있어야지. 그게 나무의 본 모습 아니겠니.

바보가 그런 말을 했다
그러자 나무들은 장작이 되어 타 올랐다
겨울로 가는 길목, 들불이 되어 타 올랐다
다 꽃이런가
-교육노동운동의 전망을 찾는 출정에 붙임


화사한 봄볕 받아 덩달아 피는 꽃도
무릇 꽃은 꽃이지만,
인동(忍冬) 삼경(三更)에도 날개를 퍼덕이며 피는 꽃이라야
너에게도 나에게도 참 꽃이다

양지 바른 묘지 위에 잠시 피었다가
시린 이슬에 슬그머니 이파리를 닫는 꽃도
꽃이랄 수야 있겠지만,
캄캄 절벽 생사의 경계 앞에서도
풍찬노숙(風餐露宿), 정면으로 파도를 이겨내는 꽃이라야
정녕 꽃이라 부를 터

‘껍데기는 가라’, 시인의 쟁기질 소리 아슴푸레한 오늘
팔뚝에 힘을 실어 손나팔로 소리친다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는 키질을 견뎌온 그대 투사들이여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길 드날리는 깃발이 되어
뚜벅뚜벅 걸음을 떼어놓는 그대 전사들이여
꽃이라고 다 꽃이 아니고 길이라고 다 길이 아닌 것,
쿵쾅대는 가슴을 맞대보고서야 느끼는구나, 아는구나

그리하여 정녕 껍데기로는 말고 알곡으로만 남자
이합집산(離合集散)으로는 말고 한결 동지애로만 살자
칠천만 겨레의 심장을 적시는 북소리로, 전망으로 살자
함 순 례* * 충북 보은 출생. 1993년 󰡔시와사회󰡕 등단.


백자, 무료한


불 꺼진 강의실, 슬라이드 필름이 돌고 있다
신개발이 이루어질 때마다
환생의 붓질에 잠깐 목욕을 하곤
저마다 박물관 어둠 속으로 묻힌 유물들
어떤 것은 국보급으로 어떤 것은 깨진 조각으로 돌고 있다
고려청자에서 분청사기, 이제는 조선백자가 돌고 있다
매화 대나무 소나무 잘 익은 포도알 문양들이
수세기 거쳐 다시금 꽃 피우고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다
말하자면 저 도자기들,
술을 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곡식을 저장하던 그릇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의 집 구석에 마구 뒹구는
스테인레스 양은냄비 플라스틱 그릇은 어떠한가
땅 속에서도 썩지 않을 대량생산의 유적들
어떤 것은 보물로 어떤 것은 막사발로 기억될 수 있으리라

불 꺼진 강의실, 넥타이 푼 노년이
기우둠히 앉아 시간을 주무르고 있다
역사무료강좌에 노인들이 자리를 메운 것은
단단한 고독을 밀고 가는 힘이리라
새파랗게 젊은 축인 나는
깜뭇 쏟아지는 잠을 쫓으며 雪白의 배후를 들여다보고 있다
잘 녹은 유약이 시린 달항아리 같다
저 무료한 백자에 어룽거리는,
거친 물레에 잦아져 세월의 장작불에 익은 도자들이여
바닥이 깊게 패인 발굴 현장의 가마터를 보면서
누군가, 소스라치듯 하품을 거두고 있다
부장품으로도 묻히지 않는 우리의 밥그릇 대신
수천 년 썩고 남은 뼛속이 저렇듯 구워질 것이다
우리들의 몸이 거대한 유적이 될 것이다





산지팡이


산지팡이 서너 개 화암사 입구 바위에 기대어 있다
한 사람 두 사람 지팡이 들고 산을 오른다
한 사람 두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산을 벗어난다

맨 처음 시작은 누구일까

오르고 내려오는 길들이 山門에 반질반질 새겨지고 있다


물안뜰의 저녁

새해라고 한자리에 앉은 야생화 동호인들
아직은 쌀쌀한 천변 바람 다 잠재울 것 같은
삭은 홍어와 들배추 씹는 소리
불은 살살 다뤄야 달아오른다고 너스레 떠는 소리
군고구마 익는 소리
강물로 굽이굽이 흘러가네
농촌의 빈집 구들장 오래 전에 내려앉아
장작불 지펴도 불 들지 않는데
가마솥에선 김 오르기 시작하네
마당에 지은 야생화 온실 손질하고
부엌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
신년 덕담이 무르익는 소리들 속에
전쟁을 겪은 이 보수를 얘기하며 핏대 올리자
달구어진 솥 쉿쉿 타래김만 내뿜고 있네
누구라도 서로의 말 건네지 않네
광주를 건너온 이는 그만 말문을 닫아버리고
연기는 통로 찾아 시누대 산그늘로 올라가고
토론에도 사랑에도 맞불 놓지 못한 나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기타줄만 고르고 있네
정 은 호* * 1965년 경남 진주 태어남. 시집으로 󰡔지리한 장마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가 있음. 객토문학동인.


빵차


어린 날
하교시간이 가까워지면
운동장에 흙먼지를 날리던
빵차

까맣게 그을린
빵 하나를 받아들고
집으로 가던 십리 고갯길
발길은 얼마나 가벼웠던가

아무 것도 모른 채
날마다 목을 뺐던 빵차

머지 않아
피로서 되 갚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안다

우리는 안다
아니 전세계는 알 것이다

적어도 미국에게 있어
"전쟁이 불가피 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이라는 것을

저들에게 있어 중동은
늘 탐하고 싶었던 땅이었다는 것을

9.11도
후세인도
빈라덴도
그럴듯한 명분이었다는 것을

전쟁은 저들에게 있어
늘 외부로부터
자국 경기회복을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적어도 미국에게 있어
“전쟁이 불가피 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이다

석유, 아니면
그 어느 누가
저 모래땅 위에다
집을 짓겠는가





가난의 기억 4
- 아버지의 마실


마을 어귀에 있던
우리 집
마을과 떨어져 있어
무슨 일 생겨도
소문은 제일 늦었고
마실 마저 가지 않으면
소문도 쉬 들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마실을 가는 건
집안의 제사 때나
설 명절을 앞두고 였다
큰댁이나 당숙댁으로
단대목 찬바람 맞으며
어린 우리 설빔을 꾸어오셨다
당신은 늘 그 남루한
두루마기만 입으시고
김 경 주* *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새들은 자신의 꿈속으로 날아간다


열이 많은 새들은 늦게 날아오른다
새들이 눈을 감고 날아간다
자신의 꿈속으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새들이 날아갈 때
사람들은 새들을 보지 못한다
새들의 꿈 곁에
사람들이 잠시 놓이는 것이다

잠이 든 새의 몸을 만지면
그들이 날아가는 하늘이 보인다

눈 속에 뼈가 보이는 새가 있다

감은 눈으로 바라보는 생은 사랑이다

몸보다
눈이 먼저 말라가는 사람은 곧,
새가 된다


젖병을 들어주다

불 꺼진 막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아이를 재우기 위해 젖을 물리며
젖병을 잠시만 들어달라는 여인이 있다
그녀는 지금 아이의 몸으로 내리고 있는
어떤 시간일까
내게 들키지 않으려는
작은 주먹만한 젖무덤이
저쪽에서 닳아진 남방을 열고 둥실 떠오른다

그녀가 열고 있는 몸의 음악이
아이의 생으로 조금씩 빨려 들어간다
소리가 나지 않은 음악도 있으니
그것을 뜨거운 젖이라 부르면 안 되겠나 싶어
나 혼자 그덕 기울어지는 것인데
그 생은 아직 누구도 이름붙일 수 없어
더 아름다운 것일 건데
손가락 발가락에 돋은 핏줄로
흘러들어가는 저 음악은
나처럼
이 세상을 짝사랑하는데 쓰일 것이라는 생각

정말이지
생을 자신한테 만은 들키고 싶지 않다는 것은
내 입술을 한번은 뜨겁게 적셨던 그것이
지금 내 몸에 남은 음악을 이루는 모양이다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시간에
저녁의 연인처럼 입을 맞추는 母子
아이의 찬 손발 같은
부드러운 눈이 내리자
나는 박쥐처럼 눈이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봄날

면봉은 한 봉지에 백 개

부어오른 목안으로 늙은 의사는 누런 불빛을 갖다대었다

그렇지
새들은 한 마리가 죽으면
떨고만 있지

있지
오리기구를 타고 혼자 떠있는 저수지

저녁은 오래된 약통속의
먼지를 바라보네
약봉지에 적힌 누런 이름과 나이들
내 이름도 있고 당신 이름도 있네

후두둑 불려가는 것들로 봄비 번진다

시계를 찼던 손목의 흰 자국

밤새, 남은 새의 몸에서 나는 비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