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광소*
* 1961년 전남 신안에서 출생하였다. 1991년 월간 ꡔ노동해방문학ꡕ(신년호)에 시 ｢지리산의 달빛｣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ꡔ지리산의 달빛ꡕ(2002년)이 있다.


내 마음이야



그 꽃은 내 안에도 있고
그 꽃은 내 밖에도 있다

내 안에 있는 꽃도 새삼 다 못 찾거늘
내 밖에 있는 꽃을 어이 다 찾겠니?

내 안에 있는 꽃이 여태껏 피어 있다고
내 밖에서 시든 꽃이여, 너무 화내지 마라

밥 상



지구와 행성이 부딪혀서 지구가 폭발하지 않는 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있고, 사랑은 역사를 발전시킬 것이므로 희망이 있어요, 라고 말하는 아내와 마주앉아 저녁을 먹을 때, 아내와 나 사이에는 사랑 같은 밥상이 있고, 밥상에는 아내가 뒷산에서 캐온 역사 같은 쑥국이 있고, 쑥국에서는 희망처럼 피어오르는 향기가 있다

별


돈 1천만 원이면
빚보증 잘못 선 아우의
빚을 대신 갚을 수 있고,

3천만 원이면
칠순 넘어서도 노점상하는
어머니께 시장 근처에 깨끗하고 햇빛 잘 드는
방 한 칸 얻어드릴 수 있다

1억 원이면
시골 가서 묵은 땅 탕탕 갈아엎어 찰지도록
유기농을 할 수 있고,

3억 원이면
산동네에 떡하니
어린이 도서관을 지을 수도 있으련만,

3억 원은 고사하고
1천만 원도 없었다
1천만 원은 고사하고

매달 생활비에도 빠듯한
월급봉투를 조마조마 기다리며
노동자 구보 씨는

서울 끝 산동네에서 하산하는 새벽마다
낡은 지하철 1호선에 비몽사몽
1시간 이상 실려 갔다

4천 원 이하의
얼큰한 김치찌개나 속 시원한 잔치국수를 먹으며
밥 먹듯이 야근하고,

밤늦게 돌아와 눈 맑은
두 아이랑 반짝반짝 별빛 눈 맞출 짬도
힘도 없이

아홉 평 지하 방에 누워,
어느 날 갑자기 싹둑 목 자르는 가위에 눌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외쳤다

꿈 깨어, 편취하며 탈세하며 돈세탁하며 뒷돈 챙기며
호화저택에 사는 사장의 띵한
그 속내야 빤해도,

양심선언이든 고발이든 했다가
탈주자로 한번 찍히면 그나마
노동자 노릇도 못하고 노숙자로 한뉘 떠돌까봐

눈먼 3년 귀먹은 3년 벙어리 3년 벌벌 떨었어도 그 사이
복권 한 장 안 샀다고, 노동자 구보 씨가 오늘은,
어쩌다 소주 한 잔씩 마신 친구들한테 주사를 부렸다

3억 원짜리 복권에만 붙어도 한방에 빚 갚고,
깨끗하고 햇빛 잘 드는 방에
어머니도 모시고, 묵은 땅 탕탕 갈아엎어
찰지도록 농사하며, 도봉산 무수(無愁)골 같이
잔걱정 많은 산동네에 떡하니
어린이 도서관도 지을 수 있다고 반짝이는

그 속내야 빤해도,
기적을 안 바라고 사기도 안 친다고,
가난하지만 부끄럽지 않다고

하늘을 우러러
별들에게 큰소리 한번 쳤다,
모처럼 불콰하게
* 시인. 구로노동자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박상경*

어느 날 처마 밑을 지날 때



그 날 아무도 없고 빗속에는 처마만 있도다

아무도 없는데 할매는 문을 반쯤 열고 코를 골며 낮잠을 자고 빗소리는 콧소리를 지우고 열린 문으로 아무도 들지 않고 처마는 온 몸으로 비를 받는 데, 받아도 끝이 없는 빗물을 쓰다듬으며 잠을 자자 아가 잠을……하는 데 한밤처럼, 그러나 야윈 낮달도 숨고 흑발의 구름이
아린 잠 속으로 달려드는 데, 어린 할매는 흰 구름 햇살 아래 꿈꾸고 그날 처마는 여린 햇살을 입고 치마 속에는 붉은 동백 숨어들어, 그러나 처마여 걸어갈 수 없는 처마여, 열린 문으로 아무도 들지 않고 빗소리는 콧소리를 지우고 할매는 곤히 낮잠을…….

엄마 분식



스르르 감기는 눈으로 사람들
어둠 속으로 걸어 갈 때, 엄마 분식
아직도 불 밝히고 팔다 남은 음식을 먹는 여자와 아이 둘
신기하기도 하지, 이 곳은 마치 전장처럼
이불과 가재도구 몇 가지
미처 위장하지 못하고 숨은 어깨를 드러낸 곳
그렇다면 이 곳이 곧 싸움터, 그러나
먹고 자고 싸고 싸우는 일을 참호 속에서 해결하던 군대시절의 긴장이 이 곳에는 없다
주문받는 젊은 여자의 눈에는 敵意가
없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하루 이틀 몇 달이 지나도록
엄마 분식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엄마가 해 주시던 따뜻한 음식
나도 엄마처럼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 볼까?
제 손으로 해 먹는 음식은 맛이 없다
매일 공장식당에 밥 지으러 다니시며 하시던 엄마 말씀
간판처럼 뇌리에 박혀
엄마분식 지날 때마다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제 집에서 잠을 자고 어디론가 분주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지나치는 엄마분식, 아침 일찍 문 열어 놓은
식당 벽면 쳐 놓은 커튼 사이로 드러난 이부자리가
치부처럼 환하다.

개나리는 힘이 세다


숙모가 집을 나간 뒤
아이들은 밤잠이 없어졌다
알전구 같은 눈을 밤새 켜 두고
엄마 보고 싶나? 물으면
고개를 설레 저으며
어둠이 언제 걷혔는지도 모르게
부스스한 머리털로 새집을 짓는 아침
새집으로 이사 가나?
그 새 눈을 부비며 슬며시 묻는
아이들의 눈에는 눈곱이 매달려 있다
하얗고 노란 눈곱
밤새 어둠과 실랑이한 얼굴 같다
새들이야 제 집 떠나는 연습을
온 몸 던져서 한다지만
아직 뒤뚱거리듯 어설픈 발음으로
제 엄마를 입술 꾹꾹 눌러 삼키는 아이들이
누군가를 분노로 기억하지 않을까
혹은 입술 깨물 듯 입을 다물면 어쩌나
아침 길을 나설 제
새집으로 이사 가는 아이들의 눈곱이
노랗게 꽃을 피우는
대로변의 키 작은 나무 한 그루
꽃잎 반쯤 열어놓고 망설일 때
눈 크게 뜨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상호** 정비노동자. 마산창원노동자시동인 <객토> 회원이다. 공동시집으로 ꡔ퇴출시대ꡕ 등이 있다.


밥



밥을 물로 씻는다
냄새를 맡아보고
고르고 또 씻고
골라낸 밥을 어머니는
내게 주셨다
채 열 살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내가 밥을 뒤적이며
냄새를 맡는다
어제 저녁
하루 묵힌 밥이 시어버렸는지
얼마 되지도 않는 밥을
살살 골라낸다

저 밥 먹고 싶다
물에 씻고
또, 씻어서


이런 날



한 번이라도
제 때에 받아보지 못한 임금
그것마저 올해는 동결이란다

십 년 만에 찾아 온 무더위에
다들 산으로 바다로 휴가를 즐기지만
당장 일거리가 걱정이다

한 발이나 남은 해를 이고
퇴근하는 길
마음보다 어깨가 먼저 처진다

길게 늘어선 휴가 길
차량 정체가 어떻고 하던
아나운서의 멘트가
신경질적으로 가슴에 와 박힌다

야간산행



휘청이며 흔들리는 것이
어찌 몸뚱이 뿐이겠는가
한 걸음 땔 때마다
손전등 불빛도 따라 흔들린다

가파른 길 잠시 쉴 때
손전등 불빛 속으로
지나온 길이 보인다

옆도 뒤도 쳐다보지 못하고
무심코 온 길
발길에 채인 돌들이
드러누운 풀들이
내가 지나온 길임을 알려 준다

얼마나 지나쳐 온 것일까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간
그 이름들은 또 얼마나 되는 걸까

손전등 불빛 속으로
급하게 온 길들이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