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세계와 그 대안(6)

1. 문제 제기

수십 년 전부터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의 년 평균 실업자 수는 3천만 명을 넘어서고 있으며, 이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백만 명 이상의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노동자는 2002년 현재 주당 49.1시간 일한다.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2003년 말 순수 실업자 수는 82만5천명이고, 비정규직을 포함하면 무려 1000만 명이 넘는다. 더욱이 20대(20-29세)의 노동 인구 4백만 8천명 중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다(50.23%).
지구자원은 아직 1/10도 개발되지 않았으며, 농·수·축산물의 생산은 계속 늘어나고, 유용한 지식과 과학·기술은 계속 진보하는데 사람들은 왜 한 끼 밥벌이를 위한 일자리를 갖지 못할까? 모든 국가 경영자, 정치가들은 오래 전부터 온갖 미디어를 동원해서 ‘일자리 창출’과 일자리를 위한 ‘투자’를 외쳐왔건만 왜 실업은 줄어들지 않을까? ‘신기술 창조에 의한 일자리의 순증가’란 이론적으로나마 과연 가능한 것일까? 누구는 5-600억을 차떼기로 실어 나르는데, 5-6만원을 위해 기꺼이 몸을 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겐 왜 하루 일거리도 없는가?
이 글은 이런 모순을 가능케 한 착종된 사회-경제 질서의 정체를 밝히고, ‘새로운 방식의 진정한 노동 지양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글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 자원은 많으며, 기술의 진보가능성은 무한하므로, 그만 일하고 먹고 놀자’라든가, 거꾸로 궁핍하고 못 먹어도 옛날이 좋았다는 식의 경제적 원시주의(ökonomische Primitivsmus)에 근거하여 백수건달(白手乾達)의 무위도식(無爲徒食)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전근대적 농업사회로의 회귀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필자의 문제의식은 첫째, 자유시장 경제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물론이고, 지난 한 세기 동안 맑시스트, 사회주의자, 넓은 의미의 좌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해 온 이른바 ‘노동해방을 위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해방되지 못했는가? 그들이 말하는 ‘해방’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고, 둘째; 근대 자본주의 생산력의 무시무시한 발전은 기술 진보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여가시간을 몰수함으로써 가능했다는 사실, 그것은 동시에 노동의 몰가치화를 의미한다는 사실, 노동이 가치를 상실하면 자본의 진보(축적)도 불가능하다는 사실, 그리고 이제 이를 되돌려 자본주의든, 아니면 어떤 다른 생산양식이든 간에, 인간의 경제적 사회구성체가 진보할 수 있으려면, 노동이 원래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해야 된다는 것이다(전적으로 기술 의존적 현대의 노동이 그럴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럽지만).
자본주의는 어두움을 싫어한다. 어둠, 혹은 잠은 적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이므로 시장경제 하에서 노동자는 야수(野獸)처럼 늘 선잠을 자야 한다. 자본주의는 선잠 자기에 편하도록 24시간 불을 켜 둔다. 공장의 꺼지지 않는 불빛을 보라! ‘24시간 영업중’이라는 상점의 팻말을 보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밤을 영구히 제거해 버리고,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완전히 ‘계몽(啓蒙)된, 개명(開明)된 세상’을 만들어 주었다. 시간의 합리화, 시간 절약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신경증적인 논리다. 2교대든 3교대든―최근에는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4교대 노동도 논의되고 있다―교대근무는 전형적으로 20세기의 산물이다. ‘이상적인 경영자는 결코 잠을 자지 않습니다.’, 혹은 ‘여러분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도 우리 은행은 절대로 잠들지 않습니다.’라는 광고 문구가 말해주듯이, 남이 잠자는 동안 깨어 있음은 모종의 영웅적 활동을 음모하는 시간으로 이해된다.
자본주의와 더불어 자명종은 사람들을 야간 조명된 작업장으로 쫓아냈다. 현대의 노동자는 ‘시(時)테크’, ‘초(炒)테크’라는 말이 만들어 질 정도로 시간을 잘게 나누는 내적 강박에 시달리며 산다. 이런 강박을 우리는 ‘즐거운 비명’이라 부른다. 직업을 가진 사람, 특히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진 사람, 소위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시간관리에 성공한 사람이라는 주장은 ‘시간관리’에 성공했다기보다는 시간을 완전히 몰수당했다는 점에서만 진리이다. 요즈음 마구 쏟아지는 ‘아침형 인간’을 찬양하는 책들이나, ꡔ시간을 아낄 것인가, 돈을 아낄 것인가ꡕ, ꡔ능력 있는 사람의 시간관리ꡕ, ꡔ시간관리의 노하우ꡕ 등 시간관리 지혜서는 천문학적인 시간을 넘어서는 축시법(縮時法)을 제공하고 있다. 노동해방 투쟁의 100년 역사는 우리에게 이런 것을 선물했다.
우리는 고대의 노예나, 중세기의 농노들은 엄청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을 것으로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반대로 현대의 노동자들보다 훨씬 일을 적게 했다. 기록에 의하면 원시 농업사회에서 사람들은 일년 중 절반을 놀았고, 고대 로마에서는 노예든, 제후든, 총독이든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많은 노동을 하지 않았다. 4세기 중엽 로마에선 일년 중 175일이 휴일이었다. 중세의 수도원에서도 하루 노동시간은 6시간 내외였다. 100년 전 한국의 머슴들 역시 연간 200일 정도밖에 일하지 않았다는 연구도 있다. 야간 노동을 한 농노에게 제후는 특별히 후한 대접을 했다.[Kurz, 36] 사람들은 새벽노동, 야간노동을 비도덕적 행위로 여겼으며, 초기 자본주의 시기 내내 이를 두고 싸웠다.
그러나 혹자는 고대나 중세의 농업기반 경제와 달리 현대 자본주의는 대신에 ‘자유시간’을 주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어느 신용카드 광고만 믿고 자유시간을 향해 떠나는 노동자는 번번이 좌절과 실패를 경험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자유시간이라는 영토를 오래 전에 식민지로 만들어 놓고, 거기서 악의적인 웃음을 흘리며 피신한 노동자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시간, 그곳은 결코 해방된 시간을 약속해 주는 개별화된 자유의 영토가 아니라, 자본의 이차적 기능 공간이다. 저 광고의 신용카드로 자동차를 렌트할 때도, 호텔비와 식사비를 계산할 때도, 저 자유시간의 반대편에선 노동시간이 야금야금 먹어 들어온다는 강박을 느낄 때쯤, 광고가 전하는 진짜 메시지는 ‘열심히 일한 당신, 일하고 또 일하라!’임을 알아차린다.
필자는 경제학을 모른다. 그래서 적확한 경제학 용어를 동원할 수도 없다. ‘지구상의 재화를 글자 그대로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분배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진지한 반성 없이, ‘일하지 말고 놀자! 그래도 다 제 몫은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겠느냐?’고 말하는 무책임함, 서비스가 판매와 결합함으로써 노동 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서비스가 자본 축적에 기여하는 생산 활동이라는 점, 서비스 사회를 무시하는 것, 정보기술에 기반한 생산양식이 일자리의 순수한 증가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전체적으로 노동사회의 미래가 ‘노동의 종말’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모든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음에도, 정치한 논변으로 옹호하거나, 비판하지 못하는 것은 첫째로 필자의 경제학적 무지 탓이고, 둘째로는 ‘시간의 독재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해 좌파 경제이론가의 ‘노동해방 투쟁’이라는 허구적 구호 말고, ‘새로운 노동 지양을 위한 투쟁’의 입지점을 찾아보고 싶은 막연한 소망 때문이다. 필자의 소박한 경제학적 상식에 기초한 이 글이 엄격하게 경제학적인 시각에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2. 노동의 사회적 성격-근대적 행태교란

인간들은 벌처럼 부지런하다. 항상 힘들게 일하고, 애쓰고, 아등바등한다. 그들은 노동이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목적이라고 믿는다. 인간들이 홀린 듯이 노동하는 것은 그것이 기분을 좋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노동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Hesiodos], 정신적 형식의 고양이며[G. Benn] 노동은 인간에게 식사나 수면욕과 동일한 욕구라고 말한다.[A. Humbohlt] 그렇다. 노동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노동을 통해 인간의 삶은 비로소 달콤해진다.[Kurz, 57]
‘무노동, 무임금’,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혹은 교회 벽에나 나붙을만한 구호처럼 눈 감으면 기도하고, 눈뜨면 노동하라(ora et labora) 등의 금언은 우리에게 아주 자명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처럼 노동은 인간 본성이며, 진리이고, 필연이라는 생각은 자본주의 이후의 일이다. “사람의 삶과 시간은 본성적으로 노동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쾌락, 변화, 축제, 휴식, 필요, 우연, 욕구, 폭력성, 강탈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매우 폭발적이고 순간적이며 비연속적인 에너지를 시장에 제시된 노동력으로 지속적으로 변형시켜야 한다.[Kurz, 43 재인용]”
자본주의는 시장을 통해 사람들의 삶의 에너지를 노동으로 변형시키고, 자신의 삶의 열정을 노동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전화(轉化)한 자만이 ‘자기 징수’(Enteignung seiner selbst. 이는 헤겔의 표현이다)의 권리, 즉 자신에 대한 고유한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도록 가르쳐 왔다. 특히 산업적 합리성 교육은 무의식 속에 ‘내적 자기 억압기제(inneren Selbstzwangsappraturen. 이는 노베르트 엘리아스(Nobert Elias)의 말이다)’를 만들었다.
학교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사회적 덕목과 노동에 대한 준비 자세를 가르쳤다. 학교는 아동들로 하여금 종소리에 반응케 훈육하고, 시간을 나누어 쓰는 법을 가르치고, 정확하고 조용히 않아있도록 강요하고, 태도와 자세를 교정하고, 모든 행동을 규율화하고 조그마한 이탈이나 소홀에도 처벌한다. 그런 연후에 기능적 지식을 채워 넣음으로써 머리를 식민지화한 다음, 섹슈얼리티를 젠더화(gender)하여 노동도구로 만듦으로써 육체를 식민지화한다. 맨 마지막으로 이러한 외적 억압을 내적으로 보충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영혼을 비워놓도록 가르쳤다. 이런 일련의 사회화란 결국 산업생산의 논리에 충실한 노동자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련의 복합적인 과정을 거쳐 노동은 결국 인간의 제2의 천성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면 과연 노동이라는 개념이 합리적으로 추상된 것인가? 예를 들어 사과, 배, 살구, 오렌지 등이 ‘과일’이라는 상위개념으로 파악될 경우, 과일은 보통명사를 합리적으로 추상하여 나온 집합명사이다. 그러나 노동은 모든 인간 활동의 보편적 상위개념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 활동에 대한 합리적 추상이 아니다. 산책, 장기두기, 취미로 하는 낚시, 사냥, 소설 읽기는 명백히 인간의 활동이지만 일반적으로 노동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중립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일종의 사회적 추상이다.
다음으로 추상적인 노동개념의 사회적 성격은 무엇인가? 사회적 일반성의 관점에서 노동이 무엇인지는 자명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의심스러운 개념이다. 고대의 수렵, 농경문화에서는 노동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고대인들이 인간 행위 일반에 대한 추상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수렵, 요리, 교육, 간호, 혹은 여타의 일반적인 문화행위를 ‘행위 일반’이라는 상위개념으로 묶는 것은 명백히 비합리적이다. 마찬가지로 인간 삶의 여러 영역에서 남성과 여성, 상이한 사회 집단 혹은 사회적 역할(농부, 기능인, 전사 등)에 따른 활동은 다양하고 상이한 상위개념으로만 설명 가능할 뿐, 노동이라는 근대의 보편개념에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면 언제 어떤 맥락에서 사회적 및 경제적 행위를 추상한 이 개념이 생성되었을까?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노동’이라는 단어는 원래 미성숙한 인간, 비자립인, 노예를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논밭, 광산, 양계장에서 땀을 흘리든, 아이들을 가르치든, 점원으로 물건을 배달하든, 혹은 목욕탕에서 다른 사람의 때를 씻어주든 이 모든 활동은 자유를 잃은 자들의 활동이다. 노동은 자유를 잃은 자들의 활동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노예라는 현존이 노동이라는 추상의 내용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제한된 추상으로서 노동개념은 결코 일반적 활동 형식이 아니며, 긍정적이지도 않다.
라틴어로 노동을 의미하는 ‘라보라레’[laborare. ‘질곡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는 괴로움과 불행이라는 파생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활동하는 인간의 괴로움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물론 이런 질곡은 실상 비자발적인 운명이라는 사회적 질곡이기 때문에, 직접 피부로 느끼는 것은 아니다. 구약성서가 노동을 신이 내린 저주로 해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단순히 애쓴다는 의미에서 노동과 괴로움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호머의 ꡔ오뒷세우스ꡕ에는 영웅 오디세우스가 자기 침대를 스스로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자유인도 애써 일을 하며, 심지어 이를 즐기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수준 낮은 맑스주의 문헌에 종종 나타나듯이 자유인의 무노동과 비의존성을 ‘무위(無爲)의 달콤함’(dolce far niente)이라든가, 단순한 게으름으로 해석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이다. 모든 노동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일이나 다른 사람에 예속된 노동이 불행이고, 괴로운 것이다. 자유인도 때에 따라 침대나 옷장을 만들 수 있고, 장사도 할 수 있고, 시도 쓸 수 있다. 그러나 목수, 장사꾼, 시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노동의 형식이 자유롭다 하더라도 모종의 영리를 위한 노동에 예속된다면, 그것은 미성숙이며 노예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알고 있듯이 기독교는 노동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긍정적으로 돌려놓았다. 기독교는 긍정적 고통이라는 피학증적 신앙을 통해, 말하자면 경건한 엑스타시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노동을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고양시켰다. ‘신의 종’인 수도원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에서 자의적으로 ‘노동의 추상’에 자신을 예속시켰다. 그 후 프로테스탄트, 특히 캘빈주의는 노동의 고통을 세속의 대상에 투사하였다. 이 역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신의 종은 세속을 등진 수도원에서 홀로 고된 노동을 감수하는 대신에 노동을 통하여 세속에서 성공하는 것, 그것이 신이 자신을 선택하였다는 징표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의 은총을 잃지 않으려면 마땅히 성공의 결과를 향유해서는 안된다(검소!). 노동의 결과 생긴 추상의 부를 ‘어쩔 수 없이 누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끊임없이 축적해야 한다(근면!). 이런 불행한 현세의 목적과 괴이하게 결합하여 일종의 불행한 행태교란(Verhaltensstörung)이 일어났고, 거기서 근대적 노동의식이 탄생하였다.


3. 노동의 포기와 인간 본성의 근절

어떤 활동이 노동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임금이라는 형식의 대가가 주어진다. 즉 돈이 주어지는 활동이 노동이다. 그 외의 모든 활동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노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활동에 대한 객관적 가치평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행위의 성격은 돈 이외의 어떤 기준으로도 객관화할 수 없기 때문에,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 모두는 정신 나간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노동은 가치평가를 위한 시장-연관적 행위임을 부인할 수 없다. 노동은 시장에서 자격을 획득하고 양화된다. 노동을 이렇게 해독할 경우, 노동은 존재론적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제한된 필연이다.
노동의 역동적인 현존 방식은 언제나 지속적이며 가변적 ‘자본의 부분’이기 때문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공히 노동을 자기와 동일시한다. 노동 없이는 자본도 없다. 노동관계는 바로 노동의 축적기계일 뿐이다. 따라서 자본과 노동은 대립적 모순이 아니라 자본축적의 가치평가적 구성체이다. 그러므로 자본에 반대한다는 것은 노동에 반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계몽주의자 칸트(Immanuel Kant)는 노동을 인간 활동의 중심 범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ꡔ인간학ꡕ 중 ｢쾌락과 불쾌라는 감정에 대하여｣라는 장(章)에서 겉으로는 훈육적인 체 하면서 실상은 교활한 어조로 “젊은이들이여! 다시금 말하건대 노동을 사랑하라; 만족을 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능한 장래의 것으로 간직하기 위해서 단념하라.[Kant, 559]”고 말한다.
헤겔은 뉘른베르크의 고등학생들에게 ‘노동해야 한다는 것은 노예의 특징’이라고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노예는 자신에게서 다른 자아를 가지며 타자의 외부적 의지이다; 주인은 이러한 자기의 외부적 의지를 통하여 사물과 매개한다.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의지로서 주인은 소모적 욕구로서 사물과 관계한다. 그러나 노예는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의지로서가 아니라 노동하면서, 그리고 만들어내면서 자기와 관계한다. 노동은 사물과 같이 됨을, 스스로 사물화 됨을 의미한다.[Hegel (1), 81, 82]”
노동자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징수됨을 의미한다. “노동을 통하여 구체화된 나의 모든 시간과 나의 생산의 총체성의 외화를 통하여 나는 그와 같은 것의 본질적인 것을, 나의 일반적 활동과 현실성을, 나의 인격성을 타인의 소유로 만드리라.[Hegel (3), 144-145]” 노동을 통해 ‘자기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헤겔의 말은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현대의 시장사회에서 타자의 명령에 따라 노동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므로 자기의 고유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시장에 순응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시장사회에서는 자신의 고유한 노예가 될 때, 자신에 대해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주인과 노예는 규정자의 자기규정에 너무 빨리 예속되어 규정자의 규정을 망각하기 때문에 제한적으로만 참이다. 헤겔의 말을 더 들어 보자: “그러나 이 세계는 정신적 본질이며, 자체적으로는 존재와 개체성의 침투이다; 세계의 현존은 자기의식의 작품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어떤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자기의식에게는 독자적 존재를 가지며 자기의식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낯선 현실성이다. 이 현실성은 외부적 본질이며 법의 자유로운 내용이다; 그러나 법적 세계의 주인을 자체 속에 파악하는 외부적 현실성은 이렇게 우연적으로 자신을 위해 현존하는 요소적 본질일 뿐 아니라 자신의 단지 긍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정적 현실성이다. 이 현실성은 자기의식의 독자적인 포기와 근절(Entäußerung und Entwesung)을 통하여 그 현존을 획득하며, 자기의식에게 고삐에서 풀려난 요소들에 대한 외부적 폭력을 법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황폐함에 가담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요소들 자체는 단지 순수한 황폐화이며 그들 자신의 분리이다; 이러한 분리, 부정적 본질이 바로 자기이다; 분리는 그 주체, 행위 및 생성이다. 이러한 그 소외는 순수한 의식 혹은 본질이다.[Hegel (2), 360, 361]”
헤겔의 주체는 노동에 예속됨을 의미한다. 자신을 능동적으로 정립하지 않고 노동을 통하여 정립하는 주체는 그러나 외적으로 압도적인 고통의 객체가 된다. 노동의 포기는 인간의 본성을 뿌리 뽑는 것(Entwesung)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본질은 인간 조건을 영원히 근절하는 데 있다. 그런 자본이 제공하는 복지, 건강, 우호적 인간관계는 목적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얻는 부가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적 개별 주체는 “굴종을 강요당하고, 노예화되고, 버림받은 경멸할 만한 존재”이다.[Marx (5), 385] 헤겔의 말로 하자면 부르주아적 개별 주체의 노동 포기는 현실성의 상실이요, 결국에는 인간 본성의 근절이다.


4. 맑스와 노동운동: 맑스주의의 노동에 대한 이중성

맑스주의는 노동이 긍정적 이념임을 주창하면서, 부르주아 세계와 그 대변자의 소위 ‘비노동’으로부터의 분리를 줄기차게 시도하였다. 19세기 사회주의 출판물의 만평을 보면, 자본가는 노동자의 약한 어깨를 올라타고, 쾌적하고 ‘노동 없는’ 삶을 사는 비만한 기생적 인간, 혹은 말쑥하게 차려입고 어슬렁거리는 자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초기 사회주의의 일차적인 목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의 전유가 아니라, 이들 ‘하릴없는 자’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가 설정한 이런 조잡한 적대자 그림은 그러나 실제로는 봉건귀족이나 고액 연금생활자들이지 현대의 경영자의 모습은 아니다. 산업사회의 부호들은 살이 찌지도 않았으며, 농부보다 한가하기는커녕 ‘일중독’을 치료받아야 할 만큼 바쁘게 산다.
노동에 대해 분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맑스는 한편으로는 노동이 “(단지) 가장 근대적 사회의 범주로서 이러한 추상에서 실천적으로 참되게 출현한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초역사적 일반성으로 이러한 비규정적 일반성을 변호하고, 여기에서는 “모든 사회형식에 타당한 아주 오래된 관계를 표현하는” ‘합리적 추상’이 어느 정도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Marx (2), 25] 심지어 엥겔스는 노동은 ‘원숭이가 인간화 되는 기준’이며, 인류의 선조들은 노동을 통해 털복숭이로부터 ‘수염과 뾰족한 귀’를 가진 합리적 추상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과장되게 주장하기도 한다.[Engels (2), 6 f.]
주지하다시피 르네상스 이후 상품생산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농업 기반 자연경제는 급속히 허물어졌다. 프로테스탄트적 정서는 자본주의로의 도도한 물길을 튼 시장경제의 도약과 결합되었다. 나아가 ‘노동범주의 긍정화’가 여기에 자연스럽게 편승하면서 ‘근대화(Modernisierung)’와 그 지속적 발전의 시초가 되었다. 근대화는 모든 이데올로기, 철학적․이론적 반성, 그리고 자본주의의 정치적 경향에서 노동과 마찬가지로 긍정적으로 규정되었다. 노동과 근대화는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서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본질적으로 ‘사회적 진보’로 인식되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상품생산과 자본주의의 해방은 지속적으로 증대된 재화생산과 동일한 의미를 가졌다. 맑스주의 또한 부르주아적 발전은 비록 지속적이진 않지만 ‘생산력의 진보’에 있다고 보았다. 여하튼간에 재화생산의 증대는 근대화와 아울러 노동의 근원적 추진력으로서 받아들여졌다.
19세기 후반 자유주의의 이단자, 맑스주의는 자유주의의 긍정적 노동개념을 수용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이런 저능한 정신의 공모자―맑스주의 스스로 자본주의 발전의 주창자가 되었다는 점에서―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실증주의적 의식을 지닌 ‘난해한’ 이론가로서 맑스 자신은 ‘물신숭배’로 표현되는 자본주의 경제 형식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함께―비록 끝까지 완성하지는 못하였지만―노동 비판에 최소한 접근해 있었던 반면에, 노동운동-맑스주의는 초역사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잘못된 추상적 노동범주에 머물러 있었다. 노동운동-맑스주의는 사회비판에 관한 보다 고차원척인 반성의 시작이 아니라, 16세기 이래로 노동에 반대하는 낡은 사회반역 운동의 역사적 패배의 결과이다.
이처럼 맑스가 노동을 초역사적 조건으로 성격지움으로써 그것을 존재론화하려는 시도를 한 건 인정해야겠지만, 노동에 대한 그의 태도는 매우 모호하다. 맑스는 말한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과정이며, 여기에서는 인간이 나름의 행위를 통하여 자연과 함께 자신의 신진대사를 매개, 조정, 조절한다. 자연적 질료에 대해서조차 인간은 자연의 힘으로서 대립한다.[Marx (1), 192]” 따라서 “노동 과정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 인간 생존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기에 인간적 생존의 모든 형태와는 독립적으로, 오히려 모든 인간의 사회형식과 마찬가지로 공통적으로 타당한 것이다.[같은 책, 198]”
노동개념의 하위 범주가 가진 다양한 의미맥락 내에서 맑스는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의 차이를 강조하고, 노동의 이런 속성을 하위 범주에 추가하고자 했다. 그는 범주형성의 문제에 대해 “노동의 이러한 실례는 가장 추상적 범주가 그 타당성에도 불구하고―바로 그 추상 때문에―어떤 시대에서든 이러한 추상 자체의 규정성에서 바로 역사적 관계의 생산과 동일하며, 그 완전한 타당성은 단지 이러한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특징적으로 보여 준다.[Marx (2), 39]”고 말한다.
물론 맑스가 노동을 언제나 존재론적 개념으로만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유로운, 사회적이며 인간적인 노동, 사유물 없는 노동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가장 큰 오해 중의 하나이다. 노동은 그 본질상 자유롭지 못하며, 비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이고, 사유재산에 제한되어 있고 사유재산을 형성하는 활동이다. 사유재산의 지양은 그러므로 노동의 지양으로 파악될 때만이 비로소 현실이 된다.[Marx (6), 24]” 또 자주 인용되는 ꡔ독일 이데올로기ꡕ에서는 “프롤레타리아는 인격적으로 가치를 지니기 위하여 지금까지 고유한 실존 조건이며 동시에 지금까지 사회의 실존조건이었던 노동을 지양[Marx/Engels (3), 77]”할 것, “공산주의적 혁명은 지금까지의 활동 양식과 반대로 노동을 제거하고 모든 계급의 지배를 계급 자체와 함께 지양할 것[같은 책, 69-70]”을 말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모든 노동이 활동이지만, 모든 활동은 노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동운동-맑스주의는 엥겔스가 ꡔ원숭이의 인간화에 있어서 노동의 역할ꡕ[Engels (1), 444-455]에서 언급한 노동에 대한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세기 후반의 유명한 사회민주주의 선동가였던 디츠겐(Josef Dietzgen)은 “사회적 노동의 의식적, 계획적 조직은 새로운 시대에 바라던 구세주[Kurz, 66. 재인용]”라고 선언했다. 소비에트 맑스주의에서도 이런 태도는 그대로 견지되고 있다. 루나챠루스키(Anatoli W. Lunatscharski)는 ‘신 없는’ 종교를 만드는 것, 즉 ‘노동의 종교’를 설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으며, 스탈린도 볼셰비키의 임무는 맑스와 엥겔스의 철학을 “디츠겐의 정신으로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Kurz, 67. 재인용] 노동을 찬미하는 것은 비단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었다. 노동을 가장 숭고한 이데올로기로 고양시킨 기독교 사회이론가들, 자유주의자들, 보수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노동을 성스러운 것으로 찬미하고, ‘노동 해방’을 약속하였다. 사회주의․공산주의도 자본주의 못지않게, 노동을 종교로 만드는 일에 앞장 서 왔다.
사회주의 노동해방 운동은 노동을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여가―이는 그 어원적 의미에서 ‘자유시간’과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일자리를 얻기 위한 싸움이었으며, 노동에 ‘반대하는’ 투쟁이 아니라, 노동을 ‘위한’ 투쟁으로 되었다. 사회주의가 노동을 싸움의 핵심 고리로 삼기 전부터 사실 노동은 부르주아적-자본주의적 이상이었다. 그러므로 노동 방식 혹은 노동 헤게모니를 위한 사회주의자들의 자본주의 비판은 태생적 모순이다. 자본주의가 주조한 긍정적 노동개념을 그대로 가져와서 자기네 것으로 만들려는 ‘노동을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을 ‘노동해방’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모순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글자 그대로의 노동해방이란 자발적 실업을 위한 투쟁, 백수(白手)를 위한 투쟁이어야 하며, 자유시간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여가를 위한 투쟁이어야 한다. 이는 맑스적 의미에서 ‘노동의 지양’이다: “노동은 그 본성상 자유롭지 못하고, 비인간적, 반사회적이며 사유재산에 제약되어서 사유물을 창출하는 활동이다. 사유재산의 지양이 그러므로 노동의 지양으로서 파악될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Kurz, 40. 재인용]”


5. 비정규 노동과 자본주의 노동사회의 붕괴

70년대 말 이래 노동사회의 위기가 대중사회에 확산되자,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위기는 없다고 정색을 했다. 그들은 그것은 다만 노동시장이 경직되어 있고, 노동력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며, 값싸고, 유연한 노동이 시장에 공급되면 세계는 여전히 ‘충분한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호언했다. 이런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은 이제 상식이 되어 버렸다. 경제평론가 피퍼(Nikolaus Piper)는 “노동분업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시장에서 돈을 벌어야 산다. 거기서 수요와 공급의 가격이 매겨진다. 물건이 안 팔린다는 것은 가격이 맞지 않다는 얘기이고, 동일한 맥락에서 실업은 노동의 쇠퇴라기보다는 노동이 너무 비싸지고 있기 때문[Piper, 1998]”이라고 이런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 간의 신자유주의 경제를 경험한 노동 및 시장 옹호론자들은 노동시장의 철저한 ‘규제 철폐’가 수행된 미국에서는 “최근 25년 사이에 4천 5백만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었을 뿐 아니라, 같은 시기에 연간 노동시간은 일반적으로 0.1%, 전체인구 중 고용인구가 0.5%, 그리고 일인당 수입은 1.6% 상승했다.[Piper, 같은 곳]”는 통계를 제시하며 자신들의 세계 이해방식이 완전히 검증되었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찬란한 ‘일자리 기적’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대부분 저임금과 비정규직에서 나왔으며, 그것마저도 한 사람이 최소한 두 서너 직장을 가져야만 경제적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입 다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업은 높은 노동비용과 유연하지 못한 노동 조건 때문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옹호의 담론은 지난 세기 80년대 말부터 새로운 노동-이데올로기적 범형(Paradigma. 範形)이 되었다: ‘비정규적 고용’이라는 새로운 노동 영역의 발견은 역동적이며 자유로운 기업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라고 미화되었다. 이 자유기업 정신은 지나친 규제와 경직성 때문에 정규 고용 영역은 발전 가능성이 없고, 불가피하게 비정규적 영역으로 퇴화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런 주장을 통하여 이들은 이중의 효과를 노린다: 하나는 최후의 방어․규제 기제의 철폐를 언제든 정당화할 수 있고, 또 하나는 실업으로 인해 증가하는 대규모의 빈곤을 지적하며, ‘그래 봐라, 결국은 시장경제의 우월성이 입증되지 않았느냐’고 사기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조야한 주장이 공적인 경제논쟁에서 언제나 유리한 입지를 점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렇게 폭력적인 이론이 상당수 좌파적 시각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좌파 급진주의는 점차 현실로 나타나는 노동사회의 위기는 실제로 근본적 위기가 아니며, 상품생산 경제체제는 그렇게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단지 이 위기는 전후(戰後)의 이상 성장이라는 특정한 자본주의 시기의 종언을 의미할 뿐이라는 입장이다. 이제 자본주의는 그 ‘정상 상태’로 돌아 왔으며, 오늘날 세계 인구의 다수가 참혹한 상태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형편없는 조건으로 연명하는 것 역시 정상을 회복한 자본주의의 본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역사에 유래가 없는 자본축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좌파 규제 이론가 히르쉬(Joachim Hirsch)는 신자유주의에 반대되는 입장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생산 및 노동조건의 항구적 변혁과 산업 예비군의 (순환적) 생산이 또한……자본주의의 일부이다. 고용의 불확실성과 실업은 이러한 경제체제의 구조적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이 잊혀진 것은 전쟁 이후의 포드적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모순이 어느 순간까지는 극복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노동 사회의 위기’는 그 한 부분이다. 동서긴장과 냉전이라는 특수한 조건하에 30년대의 세계 경제 위기 이후에 형성된 자본주의의 특수한 역사적 모습으로서 사실상 끝난 포드주의이다.[Hirsch, 15]”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이러한 ‘포드주의의 위기’는 시장과 노동관계의 지속적 유연화와 규제철폐라는 서부 총잡이식 방법을 통한 전 지구적 공격으로 화려하게 극복되었으며, …… “임금의존에서의 탈피, 임금의 국가적 차이를 강화시켜 서로 대체하는 가능성으로 자본은 수입의 구조적 변화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포괄적 합리화의 도약과 함께 이러한 측면에서 이윤을 추가적으로 증가하기 위한 전제를 형성하였다.[Hirsch, 같은 곳]”
놀라운 진술이다. 히르쉬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정치-경제체제 전체로 보지 않고, 개별적 사업의 미시경제적 차원에서 전체 자본주의의 거시적 차원을 단순 추정할 뿐, 두 영역이 모순될 수도 있다는 데 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고 있다. 물론 개별 기업으로서는 노동임금을 내리고 세금과 지출을 국가에 적게 내고 경영을 ‘싼 곳’에 이주시키고 최신 기술을 도입하여 업무를 합리화하고, 일자리를 물적 자본(Sachkapital)으로 대체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경제 전체로 보면 이는 결코 자본주의적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악화시킨다. 무엇보다도 시장의 매출 축소에서 드러난다. 가계의 임금과 국가의 세입이 줄어들면 구매력은 감소할 것이고,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자본도 평가되지 않는다. 개별 기업 혹은 개별 ‘경제적 거점’은 경쟁사를 부도내거나 그 시장점유율을 뺏음으로써 일시적으로는 이러한 곤란을 모면할 수 있겠지만, 이것으로는 최근 몇 년간에 나타나듯이 전체 시장의 축소와 세계 시장생산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과잉현상을 막을 수 없다.
지금까지 자본주의적 위기가 극복될 수 있었던 것은 과학화를 통하여 이미 도달한 생산력 수준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식기반산업이라는 새로운 생산영역이 형성되어도 다른 영역의 과잉 노동력을 충분히 흡수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생산영역은 애초부터 전자기술적(Microelektronik)으로 합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히르쉬가 주장하듯 ‘위기로부터 자본주의적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였으며, 거꾸로 위기의 정치-경제적 출발점이 되고 있다.[Hirsch, 같은 곳]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노동사회 및 자본축적의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일 수 없다.
규제철폐, 사유화 등 일련의 정치적 조치가 자본을 평가하는 요소로 가정되듯이 좌파 경제이론가들은 노동자 개인의 ‘사회적 원인에 의한 빈곤’을 자본축적이라는 경제적 기능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자본주의 노동사회는 사회현상이나 정치적 규제 형식과는 상관없는 그 나름의 논리를 따른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자본평가의 객관적 논리에 따르면 사람들이 얼마나 고되게 일하고 활력을 소모했는가는 중요치 않다. 오직 얼마만큼의 경제적 ‘가치’가 ‘생산’되었는가 이다. 특정 상품의 가치는 얼마나 오랫동안 개인, 혹은 개별 기업이 노동했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로지 합리적인 경영적 생산력 수준의 최고점에서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측정된다.
레이저 재단 기술과 전자화된 공정을 갖춘 공장에서 시간당 수백 장의 셔츠를 만드는데 반해 셔츠 하나 만드는 데 서너 시간이 걸린다면 그것은 분명 의미 없는 노동력이다. 이런 노동력을 소유한 자는 비참한 상황에서 겨우 생존할 수 있는 최소 임금만 받을 것이다. 그리고 전자적 공정, 자동화에도 불구하고 그런 노동자는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증가한다. 왜 그럴까? 자본주의적 게임 규칙에는 최소 비용과 최대 이윤을 관철하는 절차적 원칙이 없기 때문이다. 첨단 기술을 활용한 생산과 저급 기술과 저임금을 통한 생산은 투자 계산, 시장 상황, 위험, 경쟁 상황 및 한계 조건에 따라 선택되는 가치중립적 조건들 중의 하나일 뿐, 비참한 노동자의 관점에서 고려되는 것이라곤 없기 때문이다. 알고 있듯이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농업 기반 경제는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질풍노도 앞에 완전히 파괴되어, 어떤 가격에라도 자신을 파는 것 외에 어떤 선택지도 없다. 그들은 시장 주체가 되도록 폭력적으로 내몰렸지만, 최소한으로 어느 정도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강요받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 노동, 자기-부조, 이웃-부조, 개별화된 생존기반의 생산, 비정규 노동, 작은 범죄, 매춘, 밀수 등으로 보충할 수밖에 없다.[Kurz, 116f.]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의 결과이긴 하지만, 반드시 자본 축적의 요인은 아니라는 점에서 오늘날 노동자의 처지를 단순히 초기 자본주의 시기로의 퇴행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초기 자본주의에서는 생산력의 발전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상품의 가치는 임금을 약간 넘어서는 것이었다. 따라서 잉여가치는 투여된 노동시간에 비교하여 비교적 근소하였다. 자본은 초과 노동시간을 강요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생존조건을 절대적 최소 단위로 억압함으로써 느린 생산력의 진보를 보충하였다. ‘누추한 잠자리와 한 끼 밥’은 엥겔스가 표현한 대로 ‘근대의 문명화된 진보’가 침투한 곳이면 어디서든 보편화된 표준이었다. 맑스는 이를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시기’라 불렀다.
현대의 노동자의 비참한 조건은 무엇보다도 노동이 절대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데 기인한다. 상품으로서 노동력의 가격이 한 끼 밥 이하로 떨어질 뿐만 아니라, 생산된 상품 수익이 충분한 자본 축적에 필요한 수준 이하로 점점 하락한다. 가치는 생산력에 의해서 규정되기 때문에 저임금의 노동‘시간’이 자본 축적에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대규모의 빈곤은 잉여가치의 창출에 유익하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적 노동사회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모습이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이 자본주의 상품생산의 광포한 진입이었다면 20세기 말의 열악한 대량 노동은 이러한 생산 방식의 급격한 분열이라 할 수 있다. 초기 자본주의에서처럼 과도한 착취 때문에 빈곤이라는 사회 현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 노동으로 인해 자본의 생산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단지 일시적으로 주변부에 흡수될 수 있는 사람들이 ‘넘쳐난다’는 데 있다. 즉 자본축적이 역사적 한계에 봉착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빈곤과 노동은 별개이다. 빈곤한 실업자를 대규모 취로사업에 동원한다면, 지급되는 일당의 총량이 실업수당보다 작다면(실업자의 ‘삶에의 의지’를 북돋운다는 점에서, 설령 일당의 총량이 다소 크더라도 여전히 유리하다) 국가재정에 도움이 되겠지만, 자본의 축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비정규 노동 영역은 대부분 그런 영역이다. 실업자나 사회구호대상자들을 신문팔이나 앵벌이를 시킨다고 해서 국부(國富)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자본주의 위기 극복을 주장하는 좌파 경제이론가는 노동사회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낙관론을 펼치는 신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누추한 잠자리와 한 끼 밥’이라는 ‘정상 상태의 자본주의로 재귀하는’ 무서운 현재진행형에 대응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자유-시장 자본주의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근대 상품생산 체제의 범주적 핵심인 노동이 급속하게 퇴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사유화, 규제철폐 및 저임금을 통해 자본주의의 정상 상태로 재귀가 가능할 것으로 상상하듯이, 좌파 역시 옛날의 찬란한 투쟁을 그리워하며, 이러한 ‘정상 상태’가 지속된다는 조건 하에서 규제, 케인즈 식의 복지국가적 간섭 및 임금노동자의 나아진 보너스를 위한 찬란한 투쟁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고 상상하는지도 모르겠다.
자본의 탈가치 및 대량빈곤의 악순환을 내재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더 이상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후기-기술사회의 첨단기술에 의존한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에 비해 생존 경제의 갭이 계속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물건을 생산하는 방식이 빠르게 진보하는 데 비해, 먹고 사는 경제활동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노동사회의 붕괴의 원인이고, 비정규 노동 영역이 생기는 원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겐 국가가 갑근세도 물리지 않지만, 보호해 주지도 않는다. 피차 어떤 규제도 간섭도 없다. 어쩌면 이런 갈등 없고, 속 편하고, 심지어는 국가재정도 보전하는 세 가지 효과를 노리고, 국가는 철도와 전기를 민영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경찰의 ‘치안 기능’은 각 지역의 유력한 깡패집단에게 아웃소싱(outsourcing)하고, 학교는 각 지역의 학원에 외주(外注)를 주고, 동일한 방식으로 보건 및 사회구호 체계마저도 비정규 영역으로 넘겨 버릴지도 모른다. 혹자는 이를 두고 관료주의를 일소하고, 제삼 부문을 확장할 수 있으며, 시민의 참여 기회를 확대할 수 있는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테면 모두가 사회복지사가 되어 재화와 용역 봉사를 ‘나누는 일’만 한다면, 돈은 누가 내나? 우리는 NGO의 멤버쉽이기 이전에 약삭빠른 시민이기에, 나의 이익관심에 위배된다고 판단하면, 아무리 정의로운 일에도 슬쩍 발을 빼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NGO는 ‘정부 차원의 책임 없음(No Governmental Obligations)’의 약자이다(그러나 오해는 마시라!). 시장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만 운동하지 않는다. 정부의 모든 행정 활동을 비정부, 비정규 영역으로 넘겨버린다면, 이는 시장의 기능을 지켜주는 시장 바깥의 정치적 테두리의 붕괴를 의미하며, 결국에는 인간의 경제생활 자체는 홉즈적 자연 상태(homo homini lupus)로 될 것이다.
세계화로 인한 경제의 비정규화는 필연적이며 막을 수 없다. 세계화는 노동가치와 자본 가치를 와해시켰다. 자본주의적 경영이 추상적 노동을 사회적 재생산의 일반적 조건으로 활용한다면, 생산력의 전자기술적(micro-technological) 증가―이는 분명 인류에게 편하고 좋은 삶을 제공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새로운 사회적 재앙일 뿐이다.

6. 서비스 및 신용 자본주의의 허구

그러면 비정규 노동을 서비스 영역으로 돌리면 노동의 가치하락을 막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물질적인 것 외에 인간과 관계되는 업무는 비물질적 복지를 고양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손님에 대한 종업원의 과중한 독자 노동이 경감하면 손님의 만족이 올라갈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자긍심이(!) 올라간다면 종업원의 만족도도 올라간다. 단순히 인간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실업자로 있는 것보다는 심리적으로 더 낫지 않을까?[Kurz, 127]
정말 그럴까? 백수가 집에서 빈둥거리거나 피씨방에서 시간을 죽이기보다는 동네 파출소의 순경들을 위해 ‘공짜로’ 구두를 닦아준다면, 이 백수의 ‘삶은 따분하지도 않고, 만족스러울까?’ 만약 백수가 원래 구두 닦는 일을 좋아해서 이로써 유쾌함, 즐거움을 누렸다면, 게다가 순경 아저씨들이 ‘땡큐, 탱큐를 연발하며’ 고마워했다면, 분명 이 활동은 그에게 삶의 의미와 활력을 되찾아 주고, 동시에 사회성원으로서의 자긍심을 증대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공짜로’ 닦아주는 구두를 신고, 동료들과 고도리 치는 대신에 치안과 질서 유지라는 ‘민중의 지팡이’로서의 직무에 더욱 충실할 수 있었다면, 즉 서비스 제공자와 수혜자 사이에 상승적 교호(交互)가 있다면, 이런 서비스는 명백히 노동 가치를 산출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경제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회심리학적 주장으로서 일종의 노동-이데올로기적 낙관론이며, 독자적 자본축적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히 목표 이탈적 처방이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구두 닦는 일, 목욕탕에서 타인의 때를 씻어주는 일, 갈비집에서 갈비를 자르는 일, 안마사의 안마 역시 가방이나 신발을 제조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상품생산이다. 추상적 노동력을 소모하여 생산한 결과(상품)가 물질적이냐 비물질적인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인(對人) 서비스 노동은 ‘죽은 노동’이기 때문에 가치를 재생산하지 못한다. 서비스는 산업적 가치평가에 구조적으로 의존해 있다. 특히 대인 서비스는 생산이 일어남과 동시에 소멸해 버리는 가치이다. 수다스럽게 자꾸만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서비스 자본주의의 확대는 주변부 혹은 노동사회 바깥에서 비정규적 상품 생산체제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 십 년간의 서비스 부문의 폭발적인 증대는 그러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서비스가 독자적 자본축적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산업적 가치생산이 와해되는데, 가치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서비스 부문의 확대는 외관상 모순처럼 보이는 현실 경제와 투기 금융의 접촉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세계 시장 경쟁에서 국가의 지위는 더 이상 그 산업 자본적 생산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난 1997년 말 ‘통화 위기’를 경험하면서 잘 알게 되었다. 자유롭게 항해하는 신용자본, 투기자본을 끌어들여 유통되게 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특히 미국은 초민족적 금융시장을 형성하고, 거대한 유동성의 힘을 만들어,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러시아를 마치 구름처럼 떠다니며, 유동성 위기라는 폭우를 뿌렸다. 그래서 미국이 서비스 사회의 표본인지도 모르겠다.
좌파 경제학자는 투기자본에 강력한 세금을 물리고, 금융시장의 조정을 통해 재주 있게 물리침으로써 위기의 자본주의를 ‘제어’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면 케인즈적 좌파-사민주의의 옷을 입은 이들은 왜 하필이면 저주하는 자본주의가 이미 완료해 버린 일―무담보 투기자본으로 실물경제를 데워서 ‘일자리’를 조작하는―을 다시 시작하려는 허무맹랑한 계산을 하고 있을까? 이들은 자본주의의 상품생산 체제와 그 행동 양식인 노동에 대한 범주적 비판에서 그랬듯이, 신자유주의적 위기극복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정상 상태’에 대한 좌파적 불평가들은 그 현란한 노동 수사학에 의해 친정부(親政府)로 돌아선 ‘신중도파 아류’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서비스-신용사회의 몰락이 아니라, 저임금, 강제노동 및 주변화된 ‘빈곤한 활동’으로도 진행될 수 없는 노동사회의 최종적인 붕괴가 목전에 있다. 노동사회의 종말에 대비하듯 벌써부터 봉사직, 명예직을 선전하고, 노동사회 이후를 사회적, 도덕적으로 규율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7. 노동 지양으로서 자발적 실업

오늘날 일자리가 구조적 위기에 처해있다는 진단은 의심의 여지없이 옳은 말이다. “사회가 기술적으로 발전할수록 완전고용은 점점 어려워진다. 어떤 정치지도자가 기술진보를 통한 완전고용의 실현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사기다.[Anders, 99]” 후기-기술사회에서 노동은 점차 쇠약해지고 있다. 일자리를 위한 노동은 오히려 일자리를 갉아먹고 노동의 재생 능력을 상실케 하였다. 역사적으로 노동이 사회적 몰락을 막아낸 적이 없으며, 노동운동이 저임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저임금 노동일지언정 노동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는 노동자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거꾸로 노동의 노예화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자는 수구-반동으로 몰린다는 사실은 기괴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욕구는 결속과 연대를 통해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익명적 시장경쟁을 통해 조절된다. 산업사회에서 인간들은 상호부조하기 위해 공동체를 만들고, 더불어 어울려 사는 것이 아니라, 각인은 각인에 대하여 쟁취할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더불어 산다. 경쟁이란 기실 따지고 보면 인간들이 이념적, 물질적으로 자연적인 제한으로부터 넘어서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역동적 원칙이었기에 엄청난 자기 증식을 거듭해 왔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중요한 규범은 자기-확장을 통해 경쟁자를 물리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행위의 의미를 따지거나 숙고하는 것은 장점, 유용성을 계산하는 것보다 항상 하위의 가치를 가지며, 저항을 물리치는 것은 항상 옳은 것(rights)이며, 경쟁력 없음은 그것이 나쁘다(bad)는 증거이다.
자기-확장의 가능성이 없으면 경쟁은 소멸한다. 실직이란 경쟁력 없는 노동력이며, 이는 사회적 강등이라는 심리적 축출을 동반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우리가 실직을 두려워하게 된 원인은 노동이지, 일하지 않음(비활동)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실업 역시 노동의 하부적 구성요소로서 하나의 활동이다. 실업은 인격적 품위의 절하를 의미하기 때문에, 가치 지배사회에서 심리적으로 축출된 실업자는 심각한 충격을 겪는다.
우리 사회에서 실업은 수치, 약함, 무능력, 무가치와 동의어로 쓰인다. 실업을 돌파할 다른 대안이 없을 경우, 실업자(구조적/비자발적 요인에 의한 실업)는 자신을 사회구호대상자로 만든 사회에 직접 책임을 묻겠다는 불행한 유혹에 빠지기 쉽다. 집단에서 이탈되고, 인생 전망을 상실한 이들은 시한장치가 풀린 폭탄으로 공원과 지하철과 시장 골목을 배회한다. 삶이 노동인 사람이 할 일이 없을 때 불안해하는 것은 노동 강박의 전형적인 징후다. 노동이 없으면 삶은 공허하고 무의미해 진다. “노동은 삶을 완성한다(Arbeit macht das Leben aus)”는 독일어 표현은 재미있는 뉘앙스를 가진다. 독일어 ‘ausmachen’이라는 동사는 ‘제거하다’ ‘소멸하다’ ‘끄다(끝낸다)’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위의 문장은 “노동은 삶을 제거한다 ”로 읽혀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 자본주의 노동사회는 삶을 제거해 버린다. 노동은 삶의 충전이 아니라 생존의 노고이다. 그러므로 노동하는 시간은 잃어버린 삶의 시간이다. 실업자는 그토록 떠나고 싶어 했던 자리를 동경하고, 회복한 삶의 시간의 자발적 상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가장 즐겁게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을 슬퍼하는 비할 바 없는 기괴한 활동이다. 실업은 활동하는 비노동 상태이다.
실업자가 실업 상태에 대해 항의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나아가 실업의 원인제공자는 노동이기 때문에, 실업 상태에 반대해서 투쟁하는 자는 노동을 위해 투쟁해서도 안된다. 자신을 실업으로 내 몬 원흉을 ‘위해’ 투쟁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실업 반대투쟁은 노동의 탈가치화를 위한 투쟁, 노동을 경멸하는 투쟁이어야 한다. 노동-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한 노동 경멸은 결국 가치와 돈에 대한 경멸로 귀결된다. 노동과 돈의 경멸은 자본주의적 임노동의 변형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추상으로서의 노동 양식의 탈피이다. 그러니까 결국 노동사회의 극복이 아니라, 노동의 지양이다. 주의! 노동 지양은 노동 해방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 소멸과 함께 사람들이 말소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해방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가톨릭≠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자≠사회주의자, 파시스트, 자본가-경영자≠노조원들은 ‘노동의 찬가’를 합창해 왔다. 이제 우리가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노동의 종언을 위한 노래이다. 노동해방이라는 잘못된 구호로 일관해 온 과거 좌파적 노동운동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백수 중심, 자발적 실업자 중심의 노동 지양을 위한 싸움을 할 때이다.
진정 사회-유물론적 관점에 선다면 노동 종언을 위한 사회적 투쟁은 원칙적으로 노동과 돈을 긍정적으로 설정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노동의 종언이라는 말은 아주 근사하지만, 구체적 실현이라는 문제에 직면하면 너무나 야만적인 구호임이 드러난다. 왜냐? 먹고 살아야하니까! 그러므로 노동의 종언은 야만으로의 퇴행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유대, 보다 많이 일하고, 보다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미덕이라는 강박적 요구에 저항하는 사람을 위한 투쟁이어야 할 것이다. ‘보다 많은 일자리 창출’, ‘완전 고용’이라는 꿈의 실현에 대한 좌-우파의 이념적 합의는 거부되어야 한다. 기실 ‘완전 고용’이라는 구호는 ‘완전하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할 경우, 개별적 인격 주체로서 심히 자존심 상하는 말이다. 도무지 누가 나를 ‘완전히, 꼼짝달싹 못하게’ 고용해 버릴 권리를 가졌단 말인가? 누군가를 어딘가에 ‘완전히’ 고용해 버리는 빅 브라더(big brother)라도 있단 말인가?
‘노동의 권리’를 위해 싸울 게 아니라(이는 순종의 미덕으로 귀결된다), ‘인격적 삶의 요구’를 위해서 싸워야 한다(이는 저항의 용기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삶의 요구란 단순한 생존만이 아니라, 지구의 자연자원과 그로부터 산출된 상품, 그리고 인류가 더불어 이룩한 무형의 자산의 분배에 동참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일하고 싶다’라는 실업자의 절규는 ‘나는 노동하지 않고, 인격적 주체로 잘 살고 싶다’로 대체되어야 한다.
느림과 여유가 효율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듯이, 게으름에 대한 권리가 노동에 대한 권리의 반대가 아니다. 창조적 여가시간과 객관적 가치평가(임금)로부터 자유로운 생산 활동에 주목해야 한다. 생산성, 효율성에 반대하는 창조성, 경쟁적 활동에 반대하는 유대와 상호부조가 노동의 종언을 위한 미래적 실천의 중심 개념이다. 그럴 경우 해방된 자유인의 일은 더 이상 강박적 이상이 아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완전, 강제 고용된 숙련공이기보다는, 흥미가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해방된 견습공이 훨씬 존경받는 활동이 될 것이다.
노동의 종언을 위한 투쟁의 최종 목적은 시간의 독재자인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몰아내고, 사회적으로 저당 잡힌 나의 시간을 되찾아 오는 것이다. 노동의 종언은 물질적인 측면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반대하는 투쟁, 종국적으로는 그 극복을 뜻한다. 즉 생존이냐, 삶이냐의 선택이다. “자유의 왕국은 곤경과 외부적 합목적성을 통하여 규정된 노동이 그치는 곳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사태의 본질에 맞게 물질적이며 본래적 생산 영역을 넘어서야 한다.[Marx (4), 828]”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할 때이다: 노동자는 ‘누추한 잠자리와 한 끼 밥 + 강요된 임노동 + 서비스(용역)의 제공 + 식민지화된 자유시간’을 누리는 반면에, 백수 혹은 자발적 실업자는 ‘누추한 잠자리와 한 끼 밥 + 자유로운 여가 + 공공 서비스 수혜(사회구호) + 빈곤의 시간’을 누린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아주 간단하지만 나는 대답을 유보한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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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gel (1), G.W.F., Bewußtseinslehre für die Mittelklasse, Werke, Bd. 4, Frankfurt/Main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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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ers, Günther, Die Antiquiertheit des Menschen, Bd., 2, München 1980
Kurz, Robert/Lohoff, E./Trenkle, N. (Hg.), Feierabend!. Elf Attecken gegen die Arbeit, Hamburg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