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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치: 빌헬름 라이히의 활동을 중심으로

진보평론  제36호
윤수종󰋯전남대 교수/ 사회학

1. 머리말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접근법인 자본 대 노동의 대립구도 외에도 점차 다양한 영역에서 운동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러한 새로운 운동의 촉발은 바로 6.8혁명이었다.
6.8혁명은 지도부와 대중이라는 구도 하의 좌파의 정치운동에 비해서 대중을 강조하고 대중의 일상생활에 주목하는 사회운동 및 사회변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방향은 다양한 대중 구성부분의 부분적 이해관계와 욕망의 문제를 드러내면서 기존의 운동지형을 확대해 왔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운동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이 성정치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남성의 지배와 권위주의에 대항한 여성운동, 성권리를 찾으려는 청소년의 운동, 인권 및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찾으려는 성적 소수자 운동, 특수한 욕망을 주창하는 소수자 집단의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욕망해방운동에 이론적으로 기름을 부은 것은 욕망의 문제를 건드린 프로이트일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성에너지인 리비도를 해방함으로써 노이로제에서 인간을 해방한다는 초기의 문제의식을 버리고 점차 문명을 위해서 초자아를 통해 인간의 충동(이드)을 제압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변신에 대항하여 리비도이론을 오르가즘론으로, 나아가 성해방으로 이끌어 간 사람이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이다.
라이히는 정신분석을 성격분석으로 발전시키는 한편 개인치료와 동시에 개인을 구속하고 있는 사회를 해방하려는 성정치를 수행해 나간다. 6.8혁명이 터지면서 청소년들의 욕망해방의 담론 속에 라이히의 논의가 급부상한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입론 때문일 것이다.
흔히 라이히의 경력은 세 단계로 요약한다. 첫 단계는 1918년 빈 대학에 입학하여 프로이트로부터 사사하고 이른바 ‘정신 분석 2세대’를 형성하여 독창적 정신 분석 요법을 실험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1928년부터 1933년까지 맑스주의 정치의 일환으로 성-정치(Sex-Pol) 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한, 그의 생애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망명으로 인해 외국을 전전하다가 1939년 미국에 최종적으로 정착한 시기로 ‘오르곤 에너지’를 발견하고 그에 관한 과학적 실험에 집중하던 시기다.
성정치 운동 시기의 라이히는 정신분석과 맑스주의를 접속하여 ‘욕망’의 문제를 사회적 관계(특히 계급 관계)와 최초로 결부시켜 프로이트 맑스주의라는 흐름을 만들어낸 사람으로 평가된다. 또한 라이히는 오르가즘론에 입각하여 정신분석을 더욱 확장하고 성격분석적 생장요법을 전개한다. 이렇듯 개인을 치료하는 한편 라이히는 개인은 사회의 다양한 구속에 의해서 치료가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회의 다양한 구속을 없애려는 성정치에 뛰어들게 된다. 현실의 조건 때문에 라이히가 성정치 활동을 한 시기는 짧은 편이지만 그 활동을 통해 여러 가지 문제제기를 하였다(윤수종, 2002).
먼저 라이히의 정신분석적 실천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자.


2. 라이히의 정신분석적 실천
라이히는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1918년에 빈(Wien)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여 1922년에 졸업했다. 입학하면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였고, 학생시절인 1919년에 이미 빈 정신분석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라이히는 삶에서 성(Sexualität, 성애)이 지니는 중심적인 역할을 확신하여, 성을 출생부터 시작하는 발달 과정으로 보며 심리-성적 에너지, 즉 리비도(Libido)의 존재를 긍정하는 프로이트의 작업에 끌리게 되었다(Reich, 1988). 그러나 ‘자유연상’ 기법을 사용해, 환자에게 억압된 감정과 사건을 기억하게 하고, 그것들을 개인의 통제에 유용하고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행동으로 승화시키거나 거부할 수 있도록 무의식적 충동을 의식화시키려고 한 프로이트의 기법에 라이히는 의문을 품고,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 외에 증상을 소멸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환자가 성기적 만족을 경험하면 왜 신경증증상이 사라지는가? 성적인 욕구-긴장이 증진되면 신경증증상은 왜 다시 나타나는가? 성기적 오르가즘은 생식(출산)과 상관없이 생물학적 기능을 갖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라이히는 신경증 증상을 유지시키는 에너지의 원천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라이히는 그 신체적 에너지를 오르가즘에서 찾았다. 그리고 오르가즘능력의 자연스런 기능을 강조하게 되었다.
오르가즘 이론을 정식화하고 실험한 1922년부터 1926년까지, 라이히는 정신분석 기법을 이해하고 개선하려는 작업에 깊이 몰두했다. 라이히는 1922년부터 ‘정신분석 기법 세미나’를 제안하였고 1924년에는 그 세미나를 주도하였다(Reich, 1994).
1923년 11월 라이히는 성기 장애는 신경증의 가장 중요한 증상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이후 성능력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면서 “성 능력 개념은 경제적, 경험적, 에너지적 측면을 포함하지 않으면 전혀 의미가 없다. 발기 능력과 사정 능력은 단지 오르가즘 능력의 선행 조건이다. 오르가즘 능력은 어떤 유보도 없이 성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능력, 신체의 비자발적이고 쾌락적 진동을 통해 억압된 성 자극을 완전히 방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신경증적인 모든 것은 오르가즘 능력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신경증의 신체적 핵심은 오르가즘에서만 적절하게 방출될 수 있을 뿐인 억압된 성 에너지라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오르가즘 불능에 대한 연구가 라이히의 중요한 임상적 연구가 되었고, 치료의 목표는 오르가즘 능력의 회복이었다. 또한 억압된 성의 인식은, 오르가즘 방출 능력과 함께 진행되어야 했다.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치료 개념에 경제적 에너지 요인을 더하였고, 이것을 묘사하기 위하여 ‘성 경제학(sex econom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라이히는 오르가즘 능력 달성의 임상적 어려움에 주의하였다. 그는 환자의 증상에서 성기 흥분을 없애면 아주 드물게만 오르가즘 능력에 이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라이히는 생식 기관만이 오르가즘을 제공할 수 있고 성 에너지를 완전히 해방할 수 있으며, 생식기 이외의 것은 긴장을 증가시킬 뿐이라고 파악하였다.
문제는 오르가즘 능력의 정립을 막는 모든 병리학적 태도를 찾아내 제거할 수 있는 기법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례의 생활사보다는 기법 문제를 강조하고 저항 상황에 초점을 두는 체계적인 사례보고를 해나갔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이 환자들의 부정적 반응을 피하거나 저항에 직면했을 때 무력해 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라이히는 점점 더 저항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였다.
왜 어떤 환자들은 접근하기 어려울까? 왜 치료노력은 통과할 수 없는 벽에 부딪치듯이 퉁겨져 나올까? 환자들은 어떤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무장한’ 듯이 보였다. 모든 사람이 저항하였다. 마침내 라이히는 회복의 장애물이 환자의 전체적 존재에, 통일되고 자동적인 저항을 형성하는 그 또는 그녀의 ‘성격’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격 무장’은 환자의 불쾌감을 막아 주었지만, 또한 쾌락을 경험하고 합리적으로 기능하는 능력을 억제했다. 성격 무장의 발전에 상응하여 각각의 경우에 특정한 구조를 나타내는 성격(무장)의 층들이 있었다. 라이히는 최근에 억제되었던 것이 표면층에 가장 가까이 있고, 그 다음에는 프로이트가 말한 반사회적인 충동들이 있고, 심층에는 자연스런 충동들이 있다고 정리하였다. 프로이트는 표면층과 억제된 반사회적 충동이라는 두 가지 층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반사회적인 충동을 본능적인 것처럼 상정하였다. 라이히는 이에 대해 심층에 있는 자연스러운 충동이 억압되어서 반사회적인 충동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의 다층구조에 입각하여 환자들을 분석하면서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성격 태도 안에 살아 있다고 주장하였다.
성격구조와 더불어, 주요한 정신분석 이론 중 하나가 모든 환자에게서 발견되는 파괴적 충동의 기원에 관한 것이었다. 파괴적 충동은 생물학적인가? 프로이트는 초기에는 매저키즘을 (자신에게 되돌아온) 세상을 향한 파괴적 충동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파괴적 충동을 치료에 대한 환자의 저항, 범죄에 대한 무의식처럼 일차적 매저키즘(죽음 충동)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이와 반대로 라이히는 ‘죽음 본능’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모든 심적 표명이 성 충동으로 변하는 파괴적 충동임을 밝혀냈다. 성격 내부에 갇힌 파괴적 공격성은 삶의 실망에 대한, 특히 성 만족의 결핍에 대한 분노에 불과하다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정리하여 라이히는 1926년 5월 󰡔오르가즘의 기능』이란 첫 저서를 완성하였다.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의 내부 모임은 라이히의 오르가즘론과 성격 분석적 치료법에 관해서 냉소적이었다(라이히, 1982). 그 후 라이히는 결핵에 걸려 1927년 1월 다보스(Davos)의 결핵요양원에서 석달 반 동안 치료하였다.
병을 앓고 나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했던가? 라이히는 결핵 치료후 성정치운동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 놓는다. 물론 성정치운동을 하면서도 라이히는 정신분석으로서의 성격분석을 강조하였고 생장요법적 성격분석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1929년 경, 라이히는 쾌락과 도덕적 부정 사이의 기본적 갈등이 근육 장애에 생리학적으로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흥분은 만성적인 근육 경련을 유발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매저키즘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났다. 라이히는 임상 연구를 통해 매저키즘은 방출될 수 없는 고통스런 내적 긴장의 표현, 즉 내적 억제와 표면적 긴장 사이의 불균형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만일 억눌린 에너지를 오르가즘적으로 방출할 수 없다면, 인간유기체는 모두 매저키즘적으로 될 수 있으며 긴장의 해소를 위해 외적 자원에 호소하게 될 것이다.
에너지의 기능에 대해 강조하면서 라이히는 환자의 행동과 반응을 그 또는 그녀가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이 내용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라이히는 심적 갑옷의 올바른 해소는 항상 불안의 해소를 가져오며, 일단 이러한 불안이 해소되면 자유로이 흐르는 에너지와 생식적 힘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물론 그런 기능의 회복을 방해하는 사회의 다양한 구속을 해소해 나갈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라이히는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성정치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1930년대 초반 성정치운동에 정력적으로 참여했던 라이히는 1933년 4월말 이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을 떠돌며 정신분석협회로부터 추방당하였음에도 자신의 정신분석적 실천을 더욱 확장해 나갔다.
생물학적인 지향의 정신분석과 문화론적인 지향의 정신분석이 점차 분화되고 후자의 흐름이 자아 심리학으로 흘러갈 때, 라이히는 정신분석을 생물학적인 방향으로 극단적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신체적인 흐름과 긴장을 강조하고 자연과학에서 나온 에너지 개념으로 정신 현상을 설명하려 하였다(라이히, 2005). 1935년에는 심적인 질병을 ‘성격갑옷’ 개념 대신 ‘근육갑옷’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이제 성격분석적 치료법은 생장요법으로 바뀌어 갔다. 성에너지는 환자의 심리적인 방어기제나 성격 특성이 아니라 근육의 경직성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고, 심호흡과 마사지를 통해 근육의 경직성을 풀어주는 요법을 강조하게 되었다. 머리에서 시작해 골반까지, 탄탄한 근육 구조를 풀어줌으로써 마지막 근육 울혈을 제거하게 되면 ‘오르가즘 반사’라는 경련을 일으키면서 전체적인 심적 구조가 변형된다는 것이다.
또한 라이히는 리비도의 생리학적 실체를 찾으려고 하였다. 그는 전기 영역에서 성욕의 본질을 찾으려고 실험하였다. 1937년까지, 성 기관이 흥분하면 생체-전기적 전하가 증가하는지에 대한 일련의 실험을 하였다. 성 흥분은 유기체의 표면에 특히 성기의 전하의 증가와 일치했고, 반면에 불안이나 불쾌한 감정은 전기 에너지를 몸의 중심부로 퇴각시키는 것과 일치했다. 더 나아가 식물과 동물 생활에 대한 연구결과 성욕뿐만 아니라 삶(생활) 자체도 긴장과 방출, 팽창과 수축이라는 오르가즘적 유형에 따라 기능한다고 밝혔다.
삶과 성욕의 특유한 에너지에 집착하면서 라이히는 1939년에 바로 그러한 삶의 힘을 ‘오르곤 에너지’라고 명명하였다. 1939년 미국으로 이주한 라이히는 남은 인생을 오르곤 에너지의 특성을 탐구하고 그것을 치료에 이용하는데 바쳤다. 그는 오르곤 에너지를 아주 구체적인 것으로, ‘볼 수 있고 측정할 수 있고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푸른색을 띠고 있으며 성적으로 흥분한 개구리가 보라색으로 변하는 것이나 적혈구의 푸르스름한 빛과 같은 자연 현상에서 관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더욱이 오르곤 에너지를 ‘오르곤 에너지 측정기’로 측정한 후 ‘오르곤 에너지 축전기’로 집적하여 히스테리부터 암에 이르기까지 신체적 정신적 질병을 치료하는데 사용하였다.


3. 성정치 운동

신경증 증상을 유지시키는 에너지의 원천을 라이히는 오르가즘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오르가즘능력의 자연스런 기능을 강조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신체적 기능처럼 성기적 기능은 사회적 방해에 부딪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성격분석을 통해 치유해 나갔지만, 사회적 구속은 성정치를 통해서 해소해 나가야 했다.
또한 개인치료로는 한계가 있었다. 대중의 정신건강은 병이 든 이후의 치료보다는 예방이 필요하다고 절감하였다. 물론 이러한 생각의 전환은 성정치운동과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라이히는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오르가즘불능(대중의 성빈곤)을 해소하려고 나섰다. 라이히는 개별 환자와의 임상 경험에서 뿐 아니라, ‘빈성상담소’―이곳에서 그는 사적인 진료에서는 볼 수 없는 심각한 병리학의 다양한 증상에 대해 접근할 수 있었다―에서 노동자 계급 주민의 성기 장애를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그리고 성기 장애는 오르가즘 불능의 표현이며, 신경증의 하나의 증상이 아니라 대표적[전반적] 증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 개인적 치료가 문제가 아니었다. 대중적 예방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이제 라이히는 거리로, 상담소로, 강연장으로 나섰다.

1) 성정치운동의 시작: 대중과의 만남

라이히는 1926년부터 ‘빈성상담소’를 세워 사회문제와 사건들을 접하게 되었고, 빈의 빈곤자들의 성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치료가 성공적일수록 환자가 성 행복(쾌락)을 포기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이히는 하나의 흥미를 다른 흥미로 돌릴 수는 있지만(승화), 충족을 향해 나아가려는 신체적 긴장을 다른 데로 돌릴 수는 없으며, 더 나아가 생식기적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일에 있어서 더욱 생산적이라는 것을 관찰했다. 여기서 라이히는 성 억압 및 억제의 유래와 그 기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민족학과 사회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이 구체화되는 계기가 있었다. 1927년 7월 라이히는 빈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것을 목격했다. 경찰이 군중에게 무차별 발포하여 백여 명이 죽었으나 노동자 보호의 기능을 맡은 사회 민주당 방위대들은 그 충돌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막사로 돌아갔다. 라이히는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것은 ‘계급전쟁’이 아니었다. 노동자계급 성원들끼리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경찰은 ‘무감각한 기계들’, ‘기계적 인간들’처럼 행동했다. 군중은 무력하고 복종적이었다. 라이히는 일단 외적인 억압이 제거되면 사람들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들이 자유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도대체 정치와 사람들의 실생활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해답은 오직 실천에서만 끌어 낼 수 있었다. 파업을 목격한 이후, 라이히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였고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의사가 되었다(Reich, 1976: 22-25).
그리고 라이히는 맑스에 대해 연구했다. 프로이트가 정신 의학으로 이루고자 한 것을 맑스는 경제학이라는 과학을 선택한 것이라며, 라이히는 노동과 성을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으로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맑스(주의)의 이론 중 객관적인 경제적 과정보다는 ‘산 노동력’을 강조하였다(라이히, 2007e). 또한 1927년과 1930년 사이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맑스의 방법론을 이용하여 정신분석학에 대한 사회학적 비판을 정식화했다(라이히, 2007a; 라이히, 2007c).
1920년대 초부터 라이히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정신분석학 주제에 대해 강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7년경에 그는 이런 노력에 대해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은 거세 콤플렉스 같은 복잡한 심리학 주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라이히는 그들 자신의 정서적 욕구와 연관된 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했다. 강연의 주제를 정신분석학 이론이 아니라 사람들의 성생활과 자녀양육 등 구체적인 문제들로 바꾸었다. 성생활과 자녀양육의 문제는 대중으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라이히는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강연 외에 다른 조치를 선택했다. 일종의 성교육지역순회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이다. 1928년과 1929년 라이히는 소아과·산부인과 의사, 친구인 라츠키(당시 유치원 교사)와 함께 일주일에 며칠씩 빈의 교외나 시골지역을 순회하였다. 밴을 타고 다니며 자신들의 방문을 미리 알렸고 관심 있는 사람들이 지역공원에 모이면 성문제에 대해 강연하기 시작했다. 라이히가 청소년 및 성인 남성들과, 산부인과 의사는 여성들과, 라츠키는 아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요청이 있으면 산부인과 의사가 처방을 내리기도 했고 때로는 피임기구를 장착해주기도 했다. 때로 일행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성관련 정보가 수록된 팸플릿을 배포하기도 했다. 당시 이런 활동 대부분은 불법이었다. 따라서 여러 번 경찰에게 쫓겨났고 팀의 일원이 구속되기도 했다.
한편 라이히는 성상담 외에 저녁에 정치강연을 하곤 했다. 낮 동안 진행된 소규모 토론에서 사람들이 제기한 문제가 주제였다. 젊은 남녀들은 돈이 없어서 부모님 집에 함께 살고 있고 성적인 자유를 구속당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어떤 사람들은 원치 않는 임신의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라이히는 이런 문제점의 개인적인 측면들을 다루었다. 그러나 점차 개인적인 문제들을 더 큰 정치적 문제들과 연결시켜 나갔다. 적절한 주택공급이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결코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즐길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공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사회가 절실하게 필요하고, 원치 않는 임신문제는 진보적인 성입법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식으로 정치화시켰다.
라이히는 구체적인 예로 시작해서 그 예 속에 포함된 더 큰 개념과 의미를 찾아내는 방식을 취했고, 이러한 방식으로 일반 대중과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그는 경제정책, 외교문제에 대한 장황한 연설 등, 좌익의 진부한 접근방법에 사람들이 질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라이히는 실제적인 성정치적 일을 통해서 사람들을 정치로 끌어들였다(새라프, 2005: 198-201).
라이히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정서적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성교육지역순회프로그램을 통한 단기적인 접촉과 개인에 대한 장기적인 정신분석치료라는 방법으로는 대중의 정신건강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한 방법들은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고 참여할 수 있는 의사들이 아주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이히는 ‘비엔나 성상담 및 성과학연구를 위한 사회주의 협회’를 결성하고 이 협회의 지원 아래 1929년 1월 빈에, ‘노동자들과 피고용인들을 위한 성상담 진료소’를 세웠다. 이 진료소는 전에 세웠던 상담소를 확대 개편한 것으로 네 명의 동료 정신분석가와 세 명의 산부인과 의사들이 합류하였다(새라프, 2005: 204).
성건강진료소는 빈의 6개 지역에서 문을 열었고 진료소마다 한 명의 의사가 감독을 맡았다. 진료소마다 엄청나게 붐볐기 때문에 직원들은 시간이 부족해서 힘겨워 했다. 각 환자의 병세를 꼼꼼하게 진단하기 위해서는 30분 정도가 필요했고 진료소를 찾아온 사람들 중 대부분은 상당한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여기서는 낙태와 피임 문제, 청소년의 성문제 등이 부각되었다. 처음에 찾아온 환자들 대부분이 원치 않은 임신을 종결시키고자 하는 여성이었다. 라이히는 여성들이 아이들을 원치 않으며, 여성들에게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워했다. 또한 대부분의 예비 어머니들이 처해 있는 끔찍한 경제적, 사회적 환경에 주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라이히는 낙태를 하고 싶지만 ‘적절한’ 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여성들을 위해 불법적인 낙태를 주선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심각한 법적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새라프, 2005: 205).
그리고 낙태문제는 피임문제와 청소년의 성생활과 연결되어 있었다. 진료소와 여러 조직에서 상담을 하면서 라이히는 청소년의 성과 관련한 실천적인 방안의 필요를 절감했다. 그는 관련 내용을 「청소년의 성투쟁」이란 팸플릿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더 나아가 아동의 성 문제와 결혼문제가 성해방에서 주요한 문제라는 것을 확신하였고, 성인과 청소년이 겪는 성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볼 때 개인적인 치료보다는 대중적인 예방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2) 독일에서의 성정치운동

사회적 쟁점들에 대한 라이히의 지속적인 개입과 부르주아 성 개혁에 대한 그의 비판은 프로이트 및 빈의 정신분석학자들과의 관계를 긴장시켰다. 한편 라이히는 독일 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이미 성개혁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930년 9월 독일에서 열린 ‘성개혁을 위한 세계연맹(WLSR)’ 제3차 국제회의에서 ‘노동자들의 성빈곤’에 대한 라이히의 강연이 있었다. 그 강연에서 라이히는 18개월 동안 자신이 성 상담 진료소에서 진료한 사례들에 대해 보고했다.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 중에서 대략 30퍼센트가 성공적으로 조언을 받았다. 그러나 나머지 70퍼센트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서 단기적인 상담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다른 방편도 없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공중보건 프로그램들은 신경증을 완전히 무시해버리거나 진정제를 처방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소수의 공공프로그램만이 정신분석 치료를 제공했지만 허용된 치료 기간이 너무나 불충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이히는 예방을 통해서만 신경증을 공략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WLSR 연설에서 라이히는 적절한 주거공간과 영양공급, 피임기구 사용과 낙태의 허용, 아동들의 보호와 교육에 대한 사회적 후원, 결혼과 이혼에 관련된 법 개정 같은 일련의 사회적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새라프, 2005: 208-209).
세계연맹 강연 이후, 세계연맹이 주관하는 위원회에서 성정치적 강령을 만들기로 하였다. 라이히는 이 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라이히가 안을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 안은 세계연맹에서 토의되기 전에 독일공산당 집행위원회 선전선동부서에 제출되었다. 선전선동부는 그 메니페스토를 독일공산당 의료부서로 넘겼고, 독일공산당 집행위는 의료부서의 긍정적인 결정에 근거하여 라이히의 동의 아래 몇 가지 수정이 이루어진 채로 그 메니페스토를 받아들였다. 세계연맹 위원회는 그 메니페스토가 ‘공산주의적’이라며 거부하였다(Reich & Teschitz, 1973: 41).
1930년 11월 라이히는 베를린으로 갔다. 베를린에서 라이히의 작업은 더욱 왕성하였다. 오스트리아 사람들보다 독일의 정신분석학자들은 사회적 쟁점에 대해 더 선진적이고, 오르가즘 이론을 더 잘 이해하였다. 라이히는 의학부를 함께 다녔던 오토 페니헬(Otto Fenichel)과 다시 접촉하게 되었고, 그는 실천적인 사회적 작업을 목적으로 젊은 정신분석학자들을 조직하는 것을 도왔다. 라이히는 학생 조직에서 강연하였고, 독일 전역에 자신의 저술들을 배포하였던 ‘맑스주의 노동자 학교’에서 ‘맑스주의와 심리학’과 ‘성학’(Sexuologie)이라는 강좌를 개설하고 강의하였다. 독일의 시위는 빈의 시위보다 더 투쟁적이었으나, 당의 노선은 동일했다.
베를린에 도착한 직후 라이히는 빈에서 개최했던 것과 비슷한 기술세미나를 만들었고 당시 독일의 제3당이던 공산당에 가입했다. 빈에서처럼 그는 여러 정치조직에서 활동했고 성정치적 주제에 집중했다. 베를린의 첫 강연인 ‘사회주의의사협회’ 강연에서 그는 정서장애의 예방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1931년 초에는 학생모임에서 ‘부르주아 도덕성의 대실패’에 대해 연설했고 학생들은 새벽 다섯 시까지 토론을 벌였다(새라프, 2005: 242).
공개연설을 하면서 라이히는 곧 빈에서 조직했던 것과 비슷한 성상담진료소를 조직했다. 진료소에서 하는 일은 성교육 토론회와 피임정보, 단기 개인상담이었다. 당시 모두 베를린 정신분석협회 회원이었던 애니(라이히의 부인), 페니헬, 야콥슨, 쾨테 미쉬(Kathe Misch)가 함께 일했다. 그러나 빈에서와 마찬가지로 라이히가 지적, 정서적, 재정적으로 사업을 꾸려나가는 핵심 주체였다.
라이히는 사람들이 진료소로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다가갔다. 그리고 라이히는 여전히 공산당의 청년조직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 자신의 일 외에도 라이히는 성개혁에 열성적이었던 독일 내의 수많은 신생 단체들과 함께 하려 애썼다(새라프, 2005: 243).
이런 단체들은 법을 개정하는 데는 실패했을지라도 독일인의 생활 전반에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독일에는 1930년 약 80여 개의 단체가 있었고 회원은 3만 5천명 정도였다. 라이히는 독일에서 낙태 때문에 기소된 사람들에게 법률적, 정신적 지원을 보내면서 그들의 노력을 지지했다.
동시에 라이히는 기존의 성개혁 단체들이 좀 더 혁명적인 방향으로 가도록 촉구하였다. 그는 특히 청소년의 성관계에 대해 더 과감한 입장을 취하라고 촉구했다. 또한 건강한 성과 건강하지 못한 성을 더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라이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성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모든 성표현을 허용하자는 히르슈펠트의 주장에는 반대하였다(새라프, 2005: 244).
그 당시 ‘성개혁을 위한 세계연맹’ 지도자들은 독자적인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 정치적인 제휴를 피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라이히는 성개혁 조직들과 맑스주의 정치프로그램을 결합하려고 하였다. 그는 개별적인 성조직들이 독일 공산당의 문화 대표자들과 함께 연합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라이히는 독일공산당 집행위원회에 공산주의적 기초 위에서 성정치적 대중조직을 창건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때까지 독일공산당은 그 자신의 성정치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성정치는 개혁주의적이고 혼동된 이데올로기와 뒤섞인 채 사회민주당원들과의 성개혁과 성정치의 연계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성계몽을 통한 부르주아사회에서의 변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손에 있었다(Reich & Teschitz, 1973: 41).
독일공산당 집행위는 라이히의 제안을 받아들여 성정치운동 조직을 만들 책임 단체인 ‘독일 프롤레타리아 성정치협회’(GAPSP : German National Association for Proletarian Sexual Politics)를 만들었고 라이히는 거기에 참여하였다. 성개혁세계연맹은 반대하였지만 개별적인 단체들 중 다수가 라이히의 성정치 프로그램을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약 2만 명을 대표하는 여덟 개 단체의 대표들이 1931년 가을에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GAPSP 1차총회에 참석했다. 여기서 성정치메니페스토가 선언되었다(Reich & Teschitz, 1973: 42). 라이히가 주로 작성한 그 선언은 분산된 성정치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할 것을 촉구하면서, 자본주의경제질서의 필수적인 요소인 성억압과 성빈곤에 주목하였다. 자본주의 성고통과 그 뿌리에 놓여있는 요소를 낙태, 주택, 매춘, 신경증과 성장애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면서, 다음 일곱 가지 항목의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Reich & Teschitz, 1973: 48).

1. 정상적인 경로로 피임약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피임약을 자유롭게 배분하고 대대적으로 산아제한을 선전한다.
2. 낙태 반대법을 폐지하고 일반 진료소에서 자유롭게 낙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임신 중이거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어머니들에 대한 재정적, 의학적 보호장치를 마련한다.
3. 기혼과 미혼의 법적인 구분 폐지 및 이혼의 자유를 보장하고 매춘의 원인을 근절시킬만한 경제적, 성정치적 변화를 통해 매춘행위를 제거한다.
4. 충분한 성교육을 통해 성병을 근절한다.
5. 삶을 긍정하는 교육을 통해 신경증과 성 문제 예방 및 성교육의 원칙을 연구하고 진료소를 설립한다.
6. 성 위생학과 연관된 모든 문제에 대해 의사, 교사, 사회복지사를 훈련한다.
7. 성범죄에 대해 처벌보다 치료를 우선하되 성인의 유혹으로부터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한다.

물론 이러한 요구는 전체 자본주의 사회의 혁명과 함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정치혁명 이후에 해결한다고 하기에는 대중에게 너무 긴급한 문제이다. 그리고 성계몽과 성개혁에 주력하는 개혁주의적 전망을 비판하면서, 성상담소를 세우고 저녁토론을 전개하고 여러 가지 모임을 개최해 나갈 것을 촉구하는 한편 성문제를 정치화하고 성고통에 대한 의식을 사회정치적인 의식으로 변형시키고, 그에 기반하여 사회제도들을 변형시켜 갈 것을 촉구하였다.
라이히는 소련이 그런 프로그램을 실천하는 데 상당한 진척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이히, 2000). 그러나 그는 소련의 진보적인 입장이 점차 보수화하고 있음을 감지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진보적인 성법률 제정과 자본주의가 양립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총회에 참석한 단체 대표들이 라이히의 협회에 가입했고 다른 성개혁단체들의 많은 회원이 그의 노력에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GAPSP의 지부가 슈체친과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샤를로텐부르크에 만들어졌고 짧은 시간 동안 4만 명의 회원이 가입했다. 라이히는 곧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진료소 세우는 일을 도왔다.
독일에서의 라이히의 성정치적 활동은 당 내부 반대파의 반발에 부딪쳤다. 반대파는 성정치강령에 대해 사보타지하면서 집행위의 유력한 인사들, 의료부서, 그리고 기층당원들에게 자신들의 관점을 따르도록 하였다. 라이히와 이러한 당관료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베를린과 다른 지역의 청년들과 라이히에 적대적인 당관료들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였다. 당내 갈등은 ‘독일 프롤레타리아 성정치협회’의 배후에 있던 당의 부서, 즉 성정치조직의 실행기구와 청년조직들에서 발생하였다. 성정치협회의 강령이 이론적 투쟁의 기초였고 라이히가 쓴 책들과 팸플릿들(어머니들을 위해 애니가 쓴 책 󰡔당신의 자녀가 물을 때Wenn Dein Kind Dich Fragt󰡕, 어린이들을 위한 소책자 󰡔분필로 그린 삼각형 Das Kreide-dreieck󰡕)도 주요했지만 특히 󰡔청년의 성투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세 출판물 모두 노동자 계급에게 굉장한 인기가 있었다. 공산당 토론 지도자들은 아이들을 위해 󰡔분필로 그린 삼각형󰡕을 이용했다. 그러나 󰡔청년의 성투쟁󰡕은 너무나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결국에는 라이히가 공산당에서 제명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책은 청소년의 성억압이 경제적 사회적·정치적 기능을 갖고 있다고 밝히고 그러한 기능을 명쾌하게 그리고 정치적으로 일관되게 설명하였다. 독일공산주의청년동맹과 사전 토론을 한 후 라이히는 그 책을 당관리들에게 넘겼다. 그러나 정치적 관료들의 손에서 지체된 이후, 과학적인 견지에서 승인하도록 의사집단들에게 그 책을 넘기기로 결정되었다. 다수가 그 책에 호의를 보였지만 소수가 의심을 품었다. 의심은 정신분석이 부르주아 퇴폐의 현상인데 저자인 라이히가 정신분석가라는 데 있었다. 그 후 당관리들의 조직적 방해로 책의 출판이 지체되자, 라이히는 직접 ‘성정치출판사’(Verlag Für Sexualpolitik)를 설립했다. 자신의 민족학적 저서인 󰡔강제적 성 도덕의 출현󰡕 및 어린이를 위한 두 권의 책과 󰡔청년의 성 투쟁󰡕을 출판했다. 기층단위의 당원과 관리, 그리고 젊은이들은 그 책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이후 당관료들 사이에 라이히에 반대하는 다양한 공박이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드레스덴에서 지역청년조직이 라이히의 󰡔청년의 성투쟁󰡕에 깊은 동조를 하면서 지역조직간부들과 라이히 사이의 토론을 제안하였다. 라이히가 이들과 함께 논의하여 1932년 10월 16일 드레스덴의 프롤레타리아혁명청년조직 회의에서 결정된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이 결의안은 성정치적 작업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다음과 같은 지점에 주목하면서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1. 당과 당조직들이 성정치 문제를 분명히 할 것. 개인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의 분리가 아니라 성적 존재의 지속적인 정치화가 필요하다.
2. 성정치영역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간의 휴전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실상 부르주아지만이 이러한 영역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 휴전을 깨야 한다.
3. 모든 정치적 지향의 청년들을 성문제와 관련하여 동원하고 이들을 다른 조직들에 침투해야 한다.
4. 이것의 전제조건은 혁명청년조직들이 처한 어려움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분명히 하는 것이다(Reich & Teschitz, 1973: 58).

이 결의안이 나오자 당관료들은 라이히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화하였다. 1932년 11월에 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도덕’과 아무 관계도 없으며 ‘청년들의 투쟁 정신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하면서 책의 배포를 금지했다. 그렇지만 청년들은 계속 책을 배포하였다. 결국 당의 모든 절차는 라이히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라이히는 이미 베를린에 도착하면서 제기했던 대중의 자발적 복종에 대한 문제제기를 나치의 등장과 더불어 구체화해 나갔다. 특히 국가 사회주의[나치] 운동이 권력을 획득했을 때를 면밀히 주시했다. 라이히는 히틀러의 프로그램은 보통 인간의 성격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성 행복과 자유를 향한 대중의 갈망은 성 행복과 자유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과 대립되었다. 히틀러는 대중의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 대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삶을 책임지려는 투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으며, 결국 대중은 히틀러에 의존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발전시켜 1932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에 관한 자신의 고전적 저서(라이히, 2006)를 썼으며 다음 해에 출판하였다.
1933년 초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었고 라이히의 책을 나치신문이 비판하였다. 11월에는 독일 공산당 신문에 당 제명 사실이 공표되었다(새라프, 2005: 260). 라이히는 공산당에서 제명된 것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것은 독일 공산당과 함께 한 3년의 노력이 끝났다는 것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좌익에 공식적으로 속해 있던 것 또한 끝났음을 의미했다. 라이히는 1934년에도 여전히 공산당 운동에 충성했지만 당 기구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혁명적인 사회기구를 찾기 시작했다.
라이히는 트로츠키의 제4인터내셔널 조직과 접촉하였다. 라이히는 트로츠키 당 지도자 몇 사람과 접촉한 결과 그들이 성정치학에 동조는 하지만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34년은 라이히에게 정치적으로 불확실한 시기였고 라이히는 스스로 새로운 방향을 정립해 보려 애썼다. 그는 스웨덴에 있는 동안 그곳의 이주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면서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라이히, 2007b)라는 텍스트를 썼고, 조직상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혔다. 이제 라이히는 정당 중심의 조직운동을 버리고 대중에 초점을 두는 조직화방식을 탐색하게 된다. 이른바 노동민주주의라는 그의 구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실천지형을 확보해 내지 못 한채 문제제기로 끝나고 말았다.


4. 당정치에서 대중정치로

라이히는 성정치 운동을 하면서 성정치와 관련한 여러 가지 텍스트를 출판했다. 물론 라이히는 개인의 성격분석적 치료와 사회에 대한 성정치운동을 통한 인간해방운동을 병행해 왔다. 특히 성정치와 관련해서 라이히는 프로이트주의와 맑스주의의 결합을 시도하며 당 정치와 소련의 사회주의적 변혁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당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소련의 반동화에 진저리 치면서 대중정치로 나아가게 되었다.
대중시위 시기에 대중의 움직임과는 상관없이 당지도부가 다른 정치세력들과 비밀리에 협상하거나 행동전술을 결정해 버리는 일에 라이히는 놀랐다. 대중들은 특정 세력과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당지도부는 그 세력의 대표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시위를 정리하자고 협상을 한 것이다. 이러한 막후정치, 비밀정치에 라이히는 분노하였다. 이를 고위정치, 맥주홀정치, 애무정치라고 비난하면서, 혁명정치는 ‘대중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근본질문에 입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끊임없이 대중을 향하고, 대중의 생각을 표현하고, 고위정치에 직면한 대중의 공포를 없애고, 고위정치에 대중을 적응시키는 대신, 대중에게 정치를 적응시켜서 정치를 민주화하고 정치를 단순화해서 모두가 정치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원칙을 견지할 것을 촉구했다. 모든 요리사가 국가를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레닌의 경구를 언급하면서 라이히는 혁명정치를 대중정치에서 찾게 된다(라이히, 2007b(2): 107-114).
라이히는 독일공산당의 행위를 보면서 부르주아정치를 하고 있다고 공박한다. “1932년 12월에 사회민주당은 루스트가르텐(Lustgarten)에서 시위를 조직하였다. 공산당조직들, 특히 투쟁연맹(Kampfbünde)도 시위에 참여하였다. 공산당계 시위참가자들은 사회민주당 시위 대중과 섞였고, 당시의 공산당의 주요 담론인 미국-일본의 모순에 관해 전혀 얘기하지 않고도 통일전선을 형성했다. 그것은 대중의 의지이자 언어였다. ‘공산당의 지도 아래에서만’ 통일전선을 원했던 공산당 지도자들은 시위에 참가했던 관련 당원들을 비난하였다. 당의 명령은 거리에 줄을 서서 (흩어지거나 섞이지 말고) 시위를 ‘환영하라’는 것뿐이었다. 동시에 토르글러(Ernst Torgler)[독일 공산당원. 국회의사당방화사건의 누명을 씀]는 통일전선의 구성에 관해서 사회민주당 지도자들과 비밀리에 협상하고 있었다. 대중은 이러한 협상에 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사회민주당이 주도하는 통일전선은 ‘반혁명적’이라는 것이 공식노선이었다.”(라이히, 2007b(2): 115). 당시 라이히는 지도적인 공산당과 사민당 관리들 사이의 통일전선 구성을 위한 비밀모임에 개인적으로 참여했다. 당세포들 중 누구도 그것에 관해서 알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라이히는 이러한 것은 혁명정치가 아니라 부르주아정치라고 공박한다. 혁명정치라면, 당은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시위를 지지하도록 명령했어야 했고, 통일전선 구성에 관하여 사회민주당과 협상이 진전되고 있다고 확성기로 루스트가르텐 대중에게 말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대중의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고 대중의 희망을 표현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은 대중없이, 종종 대중과 반대로, 그리고 혁명정치를 원하고 실천했던 모든 사람을 따돌린 채, ‘고위정치’, ‘전략’과 ‘전술’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라이히는 당 관리들이 단순히 지도부의 집행자가 아니라 대중의 삶과 지도부 사이의 중재자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당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독일 성정치운동 집단의 대중활동에서 본받을 점이 많다는 점을 라이히는 강조한다. 독일 성정치운동 집단은 대중의 삶에서 시작하고 실천으로 대중에게 돌아가며 지도부와 대중 사이에 끊임없는 접촉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입각해 항상 활동하려고 했다. 성정치운동 집단들은 이른바 “교육의 밤”(Instruktionsabende)을 설립했고, 그것의 목적은 당 관리들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당관리들 스스로 교육받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 모임에는 토론을 위해 정해진 주제는 없었다. 당관리들과 평당원들이 그들이 그 순간에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어려움들을 기술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논의되는 문제들이 그 특정한 순간에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일 것이라는 보증이었다. 어떤 때는 실천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해결책을 발견하고, 어떤 때는 좀 더 많은 자료들을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면서, 함께 어려움을 토의하였다. 체험된 대로의 실제 삶이 이러한 동지적 토론에서 흘러 나왔다. 이론들을 발명하려고 머리를 짜내지 않았으나 자연스레 이론들은 생겨났다. 참가자가 확대되었고 활기찬 토론은 교육의 밤이 탁월한 판단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삶은 기만당하지 않으며 분명하고 간단하게 파악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고, 해야 하는 모든 것은 평당원들(많은 비당원들도 있었다)이 그들의 마음을 말하도록 하는 것이었다(라이히, 2007b(2): 118). 즉 대중심리에 잇닿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특히 라이히는 히틀러의 감정에 대한 호소가 얼마나 교묘한지 살펴보면서 공산당의 선전이 너무나 비효율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약2만 명의 공장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참석한 한 공산주의 집회를 회상하며 전율했다. 집회 직전에 나치와의 충돌로 몇 사람이 사고사를 당했고 군중은 흥분의 절정이었다. 모든 사람이 팽팽하게 긴장된 상태로 본 연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공산당 지도자인 에른스트 탤만(Ernst Thalmann)이 정부의 예산에 대한 복잡한 분석으로 대부분을 시간을 보내자 고조된 분위기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샤라프, 2005: 251).
결국 라이히는 당정치를 대중정치로 전환해 갈 것을 강조하다가 점차 당정치를 부정하는 입장으로 전환한다. 여기엔 그가 독일공산당과 국제정신분석협회에서 추방되는 과정에서 겪었던 좌익의 당정치에 대한 환멸이 자리하고 있었다.


5. 맺음말: 성정치의 현재적 의미

맑스주의정치는 대중과 지도부라는 대당 속에서 지도부가 대중을 이끌어야 한다는 강박이 작동하면서 결국 대중은 실종되어 갔다. 라이히는 성정치 활동을 통해서 기존의 맑스주의정치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양상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대중정치로 나아갈 것을 제기하였다. 더욱이 라이히는 계급의식의 문제를 새로이 제기하면서 대중정치, 일상의 정치로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즉 통상 이야기하는 계급의식이란 혁명지도부의 의식이지 다양한 주민계층의 계급의식은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과 연계되어 있으며 지도부의 계급의식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모순에 관한 당지도부의 논리적 설명과 같은 지도부의 의식과 남편의 권위주의에 염증을 느끼며 아이들에게 남편의 권위주의를 투사하는 아내의 의식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제기는 지도부의 의식을 대중에게 주입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라이히가 성정치 활동에서 했던 것처럼 대중의 다양한 구체적 관심을 이끌어 내면서 어떻게 커다란 문제와 연결시켜 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라이히가 성정치 활동을 통해 제기한 문제들은 이후 청소년의 성정치, 여성(주의)의 성정치, 성적 소수자의 성정치에 의해서 다시 제기되고 논의되게 된다. 단순히 대중을 향하는 것을 넘어서 대중의 욕망에 귀 기울여 나갈 것을 주문한 것이다.
라이히의 욕망 개념은 여전히 신체의 충동이라는 개념에 붙잡혀 있지만, 색다른 실험을 해 나가려는 새로운 주체집단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특히 성욕망에 근거하여 자율적 인간주체의 형성과 노동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상을 제기해 나갔다는 점, 즉 프로이트(주체)와 맑스(사회관계)를 결합해 나가려는 새로운 문제제기를 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하겠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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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0 16: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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