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 남미좌파의 연이은 돌풍과 아이티의 비극

2005년 12월 18일 볼리비아의 좌파 에보 모랄레스 후보가 대선에서 54%의 지지율로 당선되면서 남미의 좌파바람은 그 정점에 올랐다. 2006년 1월에는 칠레 사회당의 여성후보 미첼레 바첼레트가 결선에서 승리하면서, 다시 한번 대세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현재 페루에서도 제2의 차베스라고 불리는 오얀타 우말라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대선 1차전에서 30.4%의 득표로 승리를 거둔 다음, 6월초 알란 가르시아 후보(24.3% 득표)와 결선을 앞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올해 7월 2일에 예정된 멕시코 대선에서는 민주혁명당(PRD)의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후보가 선두를 달리면서, 민주혁명당에 의한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대권에 재도전하는 니카라과 산디니스타혁명의 영웅 다니엘 오르테가의 당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면 중미의 일부 국가와 콜롬비아를 예외로 치면 라틴 아메리카 대륙 전체가 좌파정권 하에 놓이게 된다. 미국의 부시정권이 석유자원과 중동의 지정학적 패권을 위해 자행한 이라크 전쟁(?)에 발목이 묶인 동안, 미국의 뒷마당에서는 라틴 아메리카 좌파의 거센 도전이 미국 제국을 아래로부터 뒤흔들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거센 좌파바람은 라틴 아메리카의 지정학을 바꿔내면서, 21세기 국제질서에서 새로운 흐름을 형성할 수 있을까? 또 단지 경제적 지역블록을 넘어서, 냉전종식 이후 미국주도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대안적 국제질서를 형성할 수 있을까? 19-20세기 제국주의의 지배 하에서 민중해방을 지향한 라틴 아메리카의 볼리바르 해방주의 프로젝트는 과연 전세계 민중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기할 수 있을까?

국내외 제도언론이 남미의 좌파바람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보도와 분석을 내놓았지만, 카리브해의 작은 나라 아이티의 비극에 대해서는 일종의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한다. 지난 2월 대선에서 우여곡절 끝에 르네 프레발 후보가 승리를 거두었다. 2004년 2월 28일 미국, 프랑스, 캐나다의 공모로 장 밥티스트 아리스티드 대통령을 협박과 강제로 추방했던 불법 쿠데타 이후 2년 만에 아이티 민중은 다시 한번 아리스티드의 동지 르네 프레발 후보를 선택했다.
1990년 아리스티드의 압도적 승리, 1993년 쿠데타와 아리스티드의 미국망명, 1995년 대선 불출마의 밀약 아래 아리스티의 귀국, 2000년 아리스티드의 극적인 재선, 그리고 2003년 우파 무장세력의 내전, 그리고 제국주의와 공모한 반동 쿠데타. 시대의 조류와 무관하게 아이티를 휩쓴 정치적 격변과 유혈사태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카리브해를 짓누르는 제국주의와 그에 맞선 민중투쟁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2.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바람

외형상 남미의 좌파바람은 최근에야 제도언론이 주목지고 있지만, 그 흐름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그 첫 출발은 1998년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의 압승이었지만, 2003년 1월 에콰도르 루시오 구티에레스의 승리와 함께 우발적 사례로 무시되었다. 2003년 10월 브라질 룰라가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일정하게 좌선회에 대한 가능성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2001년 아르헨티나 경제위기 속에서 2003년 4월 대선에서 승리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덧붙여졌다.
그러나 좌파정권이 연이어 집권했음에도, 이 시기의 좌파바람은 ‘찻잔 속의 태풍’ 또는 예외적 사례 정도로 치부되었다. 왜냐하면 차베스를 제외하면, IMF의 압력에 굴복한 브라질의 룰라든,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면서 IMF에 저항하는 키르치네르든 대개 미국 제국주의가 주도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지정학을 바꿀 정치적 의도는 사실상 전무했기 때문이다. 또한 2000년 1월 원주민 봉기에 힘이어 집권한 ‘제2의 차베스’ 루시오 구티에레스의 경우도, 취임이후 IMF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신자유주의로 선회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외형상 좌파블록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차베스와 베네수엘라의 계급투쟁을 제외하면 신자유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남미의 ‘좌파 도미노’ 현상은 주목할 만한 흐름은 아니었다. 룰라의 승리에 이어 2004년 말 우루과이에서 100년만의 정권교체로 확대전선의 타바레 바스케스 후보의 승리가 이어져도, 라틴 아메리카에서 ‘좌파블록=반미․반제블록’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5년 12월 에보 모랄레스가 역동적 대중투쟁에 힘입어 극적으로 집권하는 시점에 이르면 상황은 달라졌다. 쿠바와 베네수엘라, 볼리비아를 잇는 좌파블록이 더욱 선명하게 가시화되었고, 기존의 좌파에 덧붙여 페루, 멕시코, 니카라과 등에서도 좌파의 승리가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최근 5월 1일 전격적으로 석유자원 국유화를 선언한 에보 모랄레스의 정치적 행보는 좌파바람의 새로운 상징이 되고 있다. 2002년 코카재배 농민운동의 지도자로서 새로운 좌파정당 ‘사회주의를 향한 운동’(MAS)의 지도자로서 대선에서 출마했던 정치적 무명후보 모랄레스는 당시 미국대사의 정치적 협박("만약 모랄레스가 승리한다면, 미국은 볼리비아에 대한 경제지원을 중단할 것이다.")으로 일약 정치적 스타로 떠올라 당시에 당선된 산체스 로사다를 불과 약 1.5% 차이로 추격하였다. 그리고 2005년 그는 볼리비아 역사상 처음으로 대선 1차 라운드에서 승리를 거두고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이 되었다.

< 남미의 주요 대선과 좌파정권의 등장>
1998년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2002년 11월 에콰도르 구티에레스
2002년 10월 브라질 룰라 대선승리
2003년 우루과이 타바레 바스케스
2005년 12월 볼리비아 에보 모랄레스
2006년 1월 칠레 미첼레 바첼레트
2006년 4월 7일 페루 대선: 오얀타 우말라 후보 대선 1차 승리
(6월 7일 결선투표)
2006년 7월 2일 멕시코 대선: 오브라도르 후보 승리 유력
2006년 11월 5월 니카라과 대선: 다니엘 오르테가 승리 유력


3. 좌파바람의 실체

2003-04년경에 언급되었던 좌파바람과는 달리, 현재의 좌파돌풍의 도도한 흐름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내외 제도언론의 분석과 진단은 주로 제도정치와 선거에 한정되어 사태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방해한다. 문제의 핵심이 과연 무엇이 이런 좌파정권의 도미노를 가능하게 하였는가 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분석보다는 주로 선거정치와 정치 지도자들의 개인적 경쟁 수준에서 다루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좌파바람을 가능하게 한 주된 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지난 10여년간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반신자유주의 투쟁들이다.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휩쓸고 있는 반신자유주의 대중투쟁의 물결은 기존 제도정당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민중봉기와 그를 통한 정권타도의 정치적 격변을 강제하였다.

<남미의 주요한 반신자유주의 대중투쟁>
2000년 볼리비아 코차밤바 물전쟁
2001년 에콰도르 원주민봉기
2002년 아르헨티나 봉기
2002-04년 베네수엘라 계급투쟁
반동쿠데타, 석유사보타지, 소환투표
2003-05년 볼리비아 가스전쟁
1차 가스전쟁(03. 9-10), 2차 가스전쟁(05. 5-6)

1994년 1월 1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발효시점에 맞춰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제4차 세계대전을 선포하였을 때, 아무도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현재와 같은 좌파정권의 도미노현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1999년 시애틀전투를 매개로 반세계화운동의 폭발과,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전미자유무역협정(FTAA) 반대투쟁 및 세계사회포럼(WSF) 운동을 매개로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대륙화는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항하는 포르투 알레그레 컨센서스를 통해 남미대륙 차원의 반신자유주의․반제국주의 투쟁전선을 구축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연이은 좌파후보의 정치적 승리와 좌파정권의 출범은 사실 거대한 반신자유주의 대중투쟁의 정치적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제도정치 자체의 논리보다는 더 커다란 차원의 계급정치에 의해 규정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좌파정권들은 대중투쟁과 민중운동의 정치적 볼모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대중투쟁의 폭발을 가져온 정치적․역사적 요인 역시 거시적 차원에서 현재의 변화하는 정치적 환경과 그 속에서 등장한 제도좌파 정권들의 행보를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거시적 맥락에서 보자면, 현재의 제도좌파 정권들은 20세기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했던 질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과도적 시기로의 이행의 정치적 산물이다.


4. 좌파바람의 정치적․역사적 배경

1990년대초 사회주의진영의 붕괴는 남미에서도 민중운동과 좌파운동의 급격한 퇴조를 가져왔다. 제국주의와 부르주아 과두체제에 저항했던 무장투쟁은 콜롬비아와 멕시코를 제외하면, 모두 포기되었다. 과거의 게릴라 전사들과 좌파들은 합법정당의 정치인으로, NGO 활동가로 변신했다. 무장투쟁은 더 이상 대안도, 주요한 투쟁수단도 아니었다.
더불어 반게릴라 작전의 명분이 사라짐에 따라 군부도 퇴각했다. 민주화운동과 민중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군부는 민간정권과의 협상을 통해 명예롭게 퇴각했다. 물론 집권기간 중에 발생했던 범죄에 대한 면책특권을 확보한 가운데. 군은 퇴각했지만, 정치적으로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이로써, 라틴 아메리카는 20세기를 마감하면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이란 신자유주의적 워싱턴 컨센서스를 실현할 역사적 기회를 맞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연이은 경제위기와 정치적 부패, 군부정권에서 민간정권으로 바뀌었을 뿐, 신자유주의가 약속한 것은 시장의 독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2001년 아르헨티나 봉기는 전형적인 예였다. 군부의 퇴각과 절차적 민주주의 속에서, 페론주의체제는 신자유주의로 대체되었고, 그 결과 포퓰리즘 국가는 껍데기만 남았다. 2001년의 경제위기는 신자유주의의 파괴적 영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국가 자체가 붕괴한 것이다.


1) 부르주아 제도정치 일반의 총체적 위기

2001년 12월 22-23일 아르헨티나 봉기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외쳐진 구호는 바로 “que se vayan todos”였다. 문자 그대로 ‘모두 다 떠나라’였다. 기존 부르주아 제도정치에 대한 대중적 불신이 집약된 구호였다. 신자유주의와 부패정치의 결합은 부르주아 정치 일반에 대한 대중적 불만을 응축시켜 폭발시켰다.
이는 아르헨티나만의 상황은 아니다. 멕시코의 사파티스모는 기본적으로 ‘다른 정치’를 지향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도 ‘다른 선거캠페인’을 통해 제도정치에 대해 도전하고 있다. 물론 이런 대안의 정치가 기존의 제도정치를 대체하지는 못하지만, 기존 제도정치에 대한 불만의 정치적 표현이다.
이런 맥락에서 선거와 대의제를 통한 부르주아 계급지배로서의 정치에 대한 대중적 불만은 현재 라틴아메리카 정치의 변화를 추동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또한 이는 바로 제도정치 내에서 좌파정치의 무기력과 체제내로의 포섭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기도 하다.
현재 제도좌파의 연쇄적인 정권장악은 바로 이런 기존 지배체제에 대한 대중적 불만에 힘입은 것이지만, 새로운 대안세력의 부재 속에서 차선의 선택이자, 그동안 권력으로부터 배제되었던 구좌파세력에 정치적 기회를 부여하는 대중의 선택이기도 하다.

2) 새로운 세대의 민중운동: MST, 사파티스타, 피케테로스, 코카렐로스, 원주민운동 등

폭발적 대중투쟁을 가능하게 했던 주된 동력은 1990년대 이후 등장한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운동의 새로운 세대의 흐름이다. 1990년대 브라질 민중운동을 이끈 토지없는 농업노동자운동(MST), 1994년 그 존재를 알린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운동, 볼리비아의 코카재배농민운동(cocaleros), 아르헨티나봉기의 주역 피케테로스운동(picketeros), 그리고 에콰도르, 볼리비아, 페루 등지의 원주민운동 등 새로운 주체의 새로운 운동이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대중투쟁을 통해 아래로부터 반신자유주의 역량을 구축했으며, 신자유주의 정권을 타도하는 투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들이 곧바로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로서는 이들의 정치적 이해는 기존의 제도정치를 매개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운동과 제도정치 또는 선거정치 간에는 일정한 정치적 긴장이 존재하며, 과거와 같이 일방적으로 이런 새로운 민중운동이 정치적으로 포섭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볼리비아의 경우, 에모 모랄레스는 반신자유주의 민중운동의 한 부분이었고, 그는 다른 민중운동의 지도자들, 즉 펠리페 키스페 등과 정치적 경쟁관계에 있다. 이들 민중운동과 그 지도자들은 모랄레스 정권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2002년 대선이후 민중운동을 거의 독점적으로 대표하는 모랄레스의 행보는 대단히 타협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모랄레스는 2003년 봉기에서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고, 2004-5년의 경우에는 카를로스 메사정권에 대한 협조적 태도로 인해 민중운동에 의해 탄핵받기도 했다. 모랄레스와 민중운동의 관계는 현재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지형에서 나타나는 딜레마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5. 변화의 핵심동력: 차베스와 볼리바리안 혁명

1992년 군부쿠데타는 비록 실패했지만, ‘지금은’(por ahora) 바로 이 한마디가 차베스와 베네수엘라의 미래를 결정했다. 좌파쿠데타인지 우파쿠데타인지 실체조차 불분명한 쿠데타의 한 가운데서 자칭 볼리바리안 혁명의 지도자인 우고 차베스가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89년 카라카스 봉기(Caracazo)의 잔혹한 탄압 속에서 변화하는 베네수엘라 정치의 미래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1998년 차베스는 무장봉기가 아닌 합법적 경로를 통한 혁명을 선택했다. 부르주아 정치권은 이 돈키호테 같은 인물의 돌발적 행동을 비웃었다. 그러나 대중은 그를 선택했다. 보수정치권의 후보는 5% 이하의 지지율에 머문 반면, 무명의 실패한 쿠데타 지도자가 59%의 득표율로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여세를 몰아 차베스는 볼리바리안 혁명을 시작했다. 헌법개정실시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제헌의회의 소집과 헌법제정, 헌법에 따른 대선과 총선에 이르기까지 위로부터의 제도내부로부터의 혁명이 진행되었다.
마침내 2002년 10월 19대 개혁입법과 석유에 대한 통제권을 둘러싼 내전이 폭발했다. 극우에서 극좌까지 단결(?)한 반정부세력은 2002년 4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거리로 나선 민중의 힘에 밀려 실패했다. 2002년 12월부터 시작된 석유총파업은 차베스의 과감한 결단과 노동자․민중의 단결로 실패로 끝났고, 베네수엘라의 석유는 민중의 것이 되었다. 최후의 발악으로 볼리바리안 헌법의 민주적 조항을 악용한 2004년의 소환투표는 차베스의 최종적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 세 번의 정치투쟁을 통해 볼리바리안 혁명은 공고화되었고, 칠레 인민연합의 악몽을 정치적으로 극복하였다. 더불어 선거와 제도정치의 의미가 변하게 되었다. 그 어떤 세력도 선거와 투표를 통해 차베스를 제거할 수 없게 되었다. 빈곤과 부패에 찌든 아이티 역시 투표로 좌파를 제거할 수 없게 된 것과 같은 경우다.
이와 같은 국내의 계급투쟁과 사실상의 내전에서 차비스모(Chavismo)의 승리는 라틴 아메리카에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낳았다. 볼리바르혁명은 베네수엘라만의 혁명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전역의 민중들에게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선거정치의 민중적 재전유에 의한 새로운 경로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더불어 민중투쟁으로 장악한 막대한 석유자원을 매개로 한 베네수엘라의 반제국주의 정치는 미국의 개입력을 무력화시켰고, 이는 반제투쟁의 재활성화와 계급정치의 확장을 가져왔다. 그런 의미에서, 차베스와 베네수엘라의 반신자유주의․반제국주의 노선은 라틴 아메리카를 포괄하는 반미․반제국주의․반신자유주의 전선의 구축을 통한 반신자유주의 대중투쟁을 촉진하는 기폭제의 역할을 하였다.


6. 새로운 세대 좌파정권의 정치적 스펙트럼: 좋은 좌파 대 나쁜 좌파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바람으로 차베스, 룰라, 키르치네르, 바스케스, 모랄레스, 바첼레트, 르네 프레발 등 새로운(?) 세대의 좌파지도자들이 등장했다. 우고 차베스, 에보 모랄레스 등은 사실상 무명이었고, 전혀 집권할 것 같지 않았던 룰라 역시 대권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런 격동의 흐름 속에서 바첼레트란 여성 대통령도 탄생하게 되었다. 명백히 변화하는 정치지형 속에서, 대중적 반신자유주의 투쟁에 힘입어 20세기 미국의 지배 하에서 막혔던 민주적 정권교체의 통로가 열린 것이다. 이들은 변화된 정치의 첫 번째 수혜자들이다.
20세기 좌파의 딜레마는 선거를 통한 집권의 불가능성이었다. 전세계를 통틀어 온건한 타협적 사민당 또는 사회당을 제외하면 선거를 통한 집권의 사례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특히 칠레 인민연합정부의 비극적 경험은 합법적 경로를 통한 사회주의의 건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변했다. 일차적으로, 현재의 제도정치는 과거 냉전시기의 구도로부터 해방되었다. 물론 그것과 다른 새로운 질서로의 이행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구도는 질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들에 대한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계속되고 있다. 차베스와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정부의 악선동 캠페인은 지속되고 있다. 특히 쿠바의 카스트로 사후에 대한 개입공세의 고삐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현상은 일단 좌파정권이 대세를 이루자, 이들에 대한 분리공작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새로울 것은 없지만, 구좌파 또는 게릴라 투사 출신의 합리적 좌파와 남미 특유의 인민주의(populism)의 구분법이 그것이다. IMF와 신자유주의의 틀을 수용하는 룰라와 바스케스, 바첼레트 등은 합리적 좌파로 분류되고, 차베스와 모랄레스는 무분별한 대중선동 정치가로 매도되고 있다.
이런 구분법에는 그 정치적 의도와 무관하게 일말의 진실은 있다. 이른바 좋은 좌파는 신자유주의의 옹호자이며, 나쁜 좌파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민중주의자이다. 그러나 민중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중도좌파라는 낡은 개념틀로 뭉뚱그려진 좌파정권들에는 칠레의 바첼레트와 같은 노골적 신자유주의자에서, 룰라와 같은 정통적 의미의 중도주의, 그리고 이들과 달리 신자유주의에 전면적으로 저항하는 21세기 사회주의자 차베스까지 포함되어 있다.
현재의 좌파바람에도 불구하고, 남미의 정치경제가 어떤 방향으로 향할지는 아직 유동적이다. 구조적 변혁을 지향하는 쿠바-베네수엘라-볼리비아의 축과 체제내 개혁에 묶여있는 룰라-바스케스-바첼레트의 축 간의 경향적 대립은 존재한다. 정치외교적 측면에서 강력한 반미의 흐름은 존재하지만, 또 미국이 강제하는 FTAA에 대한 정서적 거부는 강력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미국의 지배체제에 대항하는 새로운 블록의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것은 아니다.
쿠바-볼리비아-베네수엘라의 볼리바리안 대안(ALBA)은 아직 초기적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여기에서 차베스의 역할에 과도한 비중이 실려 있다. 브라질 룰라의 관심은 대외정치보다는 국내정치에 있으며, 룰라의 정치적 기반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비록 PT가 제1당이고 상대적으로 가장 유리한 입장에 있지만, 미국-IMF의 개입구조에 대항할 역량과 의지를 결여하고 있다. 따라서 국제적으로 남미 제1의 강국으로서의 위치를 이용한 외교를 구사하지만, 근본적으로 차베스의 구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7. 제도좌파 정치의 위기: PT의 정치적 타락, 차베스의 딜레마

2003년 10월 룰라가 대선에 승리했을 때, 브라질과 남미전체는 열광에 빠졌다. 미국은 당황했지만, 이미 룰라측의 화해제스처를 의식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자 주제 알렌카를 부통령으로 받아들였고, 선거캠페인은 IMF지시의 틀 속에서 거시경제의 안정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정치적으로 룰라는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하루에 세끼 식사’라는 포미 제로 프로젝트 외에 그가 브라질 민중에게 약속할 것은 없었다.
집권이후 룰라는 전임 카르도수정권이 실패한 신자유주의 개혁의 칼날을 뽑았다. 연금개악, 최저임금제 개악 등. 더불어 2005년 폭로된 타정당의 매수사건은 브라질 정치의 관행으로 치부되기엔 너무나도 질나쁜 관행이었다. PT의 정치적 타락은 대중적 분노와 실망을 낳았고, 일부 좌파세력은 이탈하여 새로운 정당(PSoL: 사회주의와 자유당)을 만들었다.
금속노동자 룰라로 상징되는 브라질의 사회변혁 프로젝트는 부르주아 제도정치의 틀 속에서 희비극으로 끝났다. 또한 역설적으로 당은 몰락했지만, 룰라의 중도주의는 재임을 보증하는 수표였다. 룰라는 개인적 인기에 힘입어 재선이 유력하지만, 신자유주의를 뛰어넘는 근본적 변혁의 전망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브라질 사회의 구조적 변혁의 가능성과 전망은 브라질 제도정치와 그들에게 정치적 종속된 사회운동이나 노동조합운동에 있지 않다.
차베스의 볼리바리안 혁명 역시 제도정치의 딜레마를 내포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사회변혁으로 합법적 제도의 틀로부터 출발하였지만, 현재까지는 반동의 공세에 대한 저항을 중심으로 혁명의 공고화 과정에 머물러 있다. 특히, 국내외적 역관계로 인하여 사적 소유에 대한 불가침의 불가피한 제약 속에서 이루지는 혁명의 과정은 새로운 혁명주체의 구성문제와 더불어, 볼리바리안 혁명의 근본적인 딜레마이다.
따라서 여러 수준에서 진행된 사회개혁조치는 베네수엘라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으로 전화되지 못하고 있다. 비록 대외적으로 석유정치를 통해, 또 라틴 아메리카 정치의 영역에서, 강력한 반미․반제전선을 구축하였지만, 국제정치의 수준과 민중연대투쟁의 수준 간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볼리바리안 혁명 자체로 보자면, 차베스의 ‘제5공화국운동’(MVR)은 혁명의 주체가 되기에 미흡하다. 혁명의 진폭과 사회적 파장에 비해, 볼리바리안 혁명의 정치적 역량은 제도정당보다는 차베스 개인에 집중되어 있으며, 아래로부터 다양한 수위에서 조직되는 민중운동과의 정치적 결합은 취약하다. 대중주체와 정치주체의 괴리는 혁명의 공고화에 장애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라틴 아메리카 민중투쟁의 역동성과 선거정치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새로운 계급정치의 조직형식으로서 구래의 제도좌파 정당은 그 유효성에서 근본적으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새로운 정치의 부재는 현재 민중․사회운동에 본원적인 딜레마를 제기하고 있으며, 제도정치를 뛰어넘는 새로운 계급정치와 그 조직형태로서 새로운 계급정당의 건설과 반자본주의적 정치세력화의 근본적 과제는 여전히 미완의 임무로 남아 있다.


8. 라틴 아메리카 정치적 변동의 역사적 주기와 현단계

지난 반세기간 라틴 아메리카는 일정한 주기의 정치적 격동을 겪었다. 1959년 쿠바혁명을 계기로, 1960-70년대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제도좌파 외부에서 새로운 변혁운동의 흐름이 형성되었다. 이른바 체게바라주의 또는 카스트로주의의 영향 하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사회운동은 게릴라투쟁 중심의 민족해방운동의 거대한 물결을 낳았다.
이에 대한 정치적 반동으로 연이은 군부쿠데타와 그에 따른 군부정권의 수립 및 민중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1970-80년대 남미의 정치지형을 형성했다. 칠레 인민연합(UP) 정권(1970-73)의 합법적 사회주의의 실험은 미국의 개입으로 실패했고, 반면 니카라과혁명(1979-1990)은 정치적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산디니스타혁명은 미국의 지속적인 정치군사적 개입으로, 사회주의진영의 붕괴와 더불어 갑작스럽게 불임의 혁명으로 끝났다.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를 전후하여 라틴 아메리카 좌파의 전반적인 해체경향은 가속화되었고, 군부의 협상에 의한 퇴각으로 조성된 민주적 공간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장악되었다. 냉전시대 반세기를 휩쓴 계급투쟁의 주기가 종결되었지만, 워싱턴 컨센서스가 약속한 새로운 신자유주의의 유토피아는 기만임이 드러났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은 대량빈곤과 경제위기, 계급적 양극화를 낳은 채 라틴 아메리카의 구조적 위기로 이어졌고, 이에 맞선 새로운 대중투쟁의 주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정치적 표현으로서 좌파정권의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 시기 폭발하는 대중투쟁과 제도정치에서 좌파의 약진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사회변동의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하나의 지표이다. 그러나 현재 이런 새로운 주기의 격동이 어떤 정치적 결과를 낳을지, 또 새로운 사회변혁의 프로젝트가 어디까지 전진할 수 있는 지는 미지수다. 이는 현재의 주류를 형성하는 좌파정권들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제도좌파정치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계급투쟁과 계급정치의 양상, 그 속에서 계급적 역관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9. 선거정치: 가능성과 의미

20세기 내내 라틴아메리카에서 선거는 제국주의-과두제 지배블록의 주요한 무기였다. 선거는 군부의 물리적 폭력과 더불어, 후진대중의 정치적 무지와 보수성을 이용하여 신식민주의적 자본주의 과두체제를 유지하는 핵심적 수단이었다. 그것이 좌파의 딜레마였다. 선거를 통한 집권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예외적으로 가능했던 칠레의 실험은 악몽으로 끝났다. 무장투쟁 이외에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진영의 붕괴와 냉전효과의 해제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제국주의와 과두제의 기득권과 부패를 옹호하는 세력은 선거를 통해 심판되었다. 제도언론에 의해 악마화되었던 좌파후보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그들은 선거를 통해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선거와 투표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우민화의 도구로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었고, 비록 부르주아 제도정치에 대한 광범한 불신과 나란히, 민중정치의 한 표현수단으로서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민중은 투표행위 후에 일방적인 기대만을 하는 수동적 주체로 남지 않았다. 대중투쟁과 사회운동은 제도정치와 정당에 대해 환상을 갖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의 제도정치는 여전히 낡은 사회체제의 주요한 지주이지만, 점증하는 대중의 저항과 함께 단순한 계급지배의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새로운 계급정치, 대중정치의 틀은 아직 모색 중이지만, 특히 베네수엘라의 계급투쟁과 함께 제국주의와 과두지배체제를 무력화할 수 있는 기제로 전화되고 있다.


10. 결론을 대신하여: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라틴 아메리카 해방 프로젝트의 도정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 하에서 제국의 지배블록과 과두제(정치권, 독점자본, 군부 등)에 맞선 노동자․민중운동의 역동적 투쟁이 현재 라틴 아메리카가 경과하는 역사적 국면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면은 과거의 대립구도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고, 따라서 이후의 전망을 그려내기는 쉽지 않다.
쿠바와 베네수엘라, 볼리비아로 이어지는 ‘희망의 축’이 라틴 아메리카 대륙적 차원에서 새로운 좌파의 희망을 만들어갈지, 아니면 제국과의 일정한 타협 속에서 체제내적 개혁의 수준에 머물지는 속단하기에 이르다. 이들은 일차적으로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등의 중도좌파의 흐름과 내용적으로 대립하지만, 이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만을 담보하고 있는 수준이다.
문제는 제도정치 또는 선거정치 그 자체가 아니다. 이 좌파열풍은 그 저류에 흐르는 계급투쟁과 민중운동의 외적 표현일 뿐이다. 현재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정치는 민중적 대안은 아니다. 비록 차베스가 21세기 사회주의를 통해 새로운 민중적 대안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지만, 베네수엘라에서조차 사회주의의 물질화는 아직 개념적 수준의 과제일 뿐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를 뛰어넘는 사회주의적 대안을 실현할 과제는 제도정당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들의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민중운동과 사회운동의 정치적 해방프로젝트에 주어져 있다. 현존하는 제도정당이 이 프로젝트의 주체가 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의 정치적 과정을 보건대 그들을 곧바로 새로운 정치의 주체로 단정할 수 없다.
문제는 새로운 주체의 운동과 민중운동, 계급운동의 결합, 그에 기초한 대안적․해방적 정치세력화가 얼마나 물질화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연이은 좌파정권의 등장은 신자유주의적 반동의 폭압 속에서 신선한 현상이지만, 현재의 주객관적 조건 하에서 이들이 민중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시몬 볼리바르의 라틴 아메리카 해방 프로젝트가 21세기 사회주의 프로젝트로 완성되는 역사적 과정은 더 오랜 기간에 걸쳐 부침을 거듭할 계급투쟁의 시기를 경과해야 할 것이다.
정 세
누가 조종(弔鐘)을 울리는가?*
박영근󰋯중앙대 교수/ 교수신문 편집인





요즈음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저마다 목청을 돋우며 다툼의 날을 세우고 있다. 그런데 이 협정의 전신인 한-미투자협정(BIT)의 경과를 살펴보면 많은 시사점과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7년 전 김대중 대통령은 한-미투자협정에 온 힘을 쏟았다. 그 당시에 미국은 포괄적 국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전방위적 어려움에 빠진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그리고 ‘줄기차게’ 통상압력을 가해 왔다. 미국은 우리나라 쇠고기 수입제도가 불공정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WTO에 제소했고, 영종도 신공항에 설치할 엘리베이터 입찰과 관련해서도 역시 WTO에 제소할 뜻을 비쳤으며, 우리 정부가 한보철강 매각과 포항제철의 가격결정에도 개입한다고 투정부렸고, 의약품에 대해서도 외국제품을 한국제품과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와중에서 외환을 확보하고 국가 신인도를 올리는 게 최우선 과제였던 김 대통령은, 1998년 6월 미국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에게 BIT체결을 ‘제안’했다. 외자유치의 명분과 필요성이 절박했던 탓에 이 협정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 많았으나 그대로 추진됐다. 게다가 김 대통령이 ‘직접’ 미국에 협정체결을 제안했기 때문에 협상과 관련된 정부부처의 공무원들은 반대의견을 공식적으로 내놓지 못했다. 그런데 1994년 미국이 이 협정의 협상을 제안했을 때,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던 한국이 이번에 협상체결을 먼저 제안한 꼴이 되었다.
더군다나 ‘이미’ 외국인이 자유롭게 마음껏 투자할 수 있기 때문에 협정을 맺는다고 투자가 더 늘어날 소지가 적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조사에 따르면, 90년대 초반 미국과 투자협정을 맺은 13개 국가 가운데 협정을 발표한 다음 3년 동안 외국인 투자가 늘어난 나라는 고작 3곳에 불과했다. 또한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양자간 투자협정에 따른 투자유치의 효과가 신통치 않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양자간 투자협정은 다른 국가와의 주권행사에 운신의 폭을 좁게 해서 오히려 국제무대에서의 협상력을 떨어뜨릴 가능성마저 있다는 지적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미국은 스크린쿼터제 폐지, 외환위기 때 외환거래를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세이프가드 불인정(다자간 투자협정에서조차 세이프가드를 인정하고 있다), 공기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제한 철폐, 국산 잎담배 사용의무철회, 연근해어업 외국인 참여제한 철폐, 저작권 소급보호, 미국의 주법에 의해 한국기업을 차별대우할 수 있는 권한 인정 등 불평등한 사안을 수용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특히 외국자본이 국내기업을 인수한 경우 외국기업은 고용승계 의무, 현지인 일정비율 고용의무, 노동기본권 보장 등의 의무를 지킬 필요가 없다. 또한 이들에게 일정한 환경기준조차 요구하기 어려워서 우리 국토의 황폐화가 우려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은 외국기업과 우리 정부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뉴욕의 국제분쟁조정센터의 결정을 국내법원의 결정에 ‘우선’하도록 요구했다. 이 센터는 주로 미국기업이 FTA나 BIT를 근거로 개도국 정부를 제소하는 곳이다. 2006년 4월말 현재 이 센터에 계류 중인 사건은 103건이다. 제소자는 모두 다국적 기업이고 제소당한 국가는 아르헨티나(35건), 멕시코(7건), 에콰도르(5건), 루마니아(5건), 이집트(5건) 등 38개국으로 하나같이 개발도상국이다. 미국자본의 투자에 대해 ‘특혜성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이 같은 내용의 모양새가 워낙 사나워서 협정체결의 필요성 그 자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더군다나 이 협정은 한-미FTA의 전단계이다. 그런데도 부처끼리 의견을 조율하지 않고 협상에 나섰다. 외교통상부는 양보하더라도 협정을 부랴부랴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정경제부-농림부-법무부-문화관광부 등은 양보할 수 없거나 유예기간을 둬야 한다고 버텼고, 일방적으로 양보하면서까지 협정을 맺을 경우 심각한 불이익이 우려된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결국 김 대통령이 심혈을 기우렸던 BIT는 국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런데 지난 2월3일 참여정부는 뜬금없이(?) 한-미FTA 협상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3월과 4월에 각각 한 번씩 예비회담을 거친 후에, 2007년 6월에 시한이 끝나는 미국의 무역촉진권한법(TPA) 일정에 따라 5월3일부터 본 협상을 시작하고, 내년 3월말에 협상을 마무리하고, 이어서 양국의 의회로부터 비준을 받아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칠레 FTA는 2년이 걸렸고, 한-싱가포르 FTA는 협상에 앞서 얼추 1년에 걸쳐 산-학-관 합동으로 연구절차를 거쳤다. 전문가들조차 이 협정의 손익대차표가 지닐 불투명-불평등-불확실성에 대해 의견이 크게 갈리고 있는 마당에, 국익과 이해단체의 득실에 대한 차가운 평가와 국민적 공감을 이루어 내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뿐만이 아니다. 국책연구원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한-미FTA의 경제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통계수치를 은폐-조작했다는 의혹이 터져 나왔다. 지난 4월11일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대정부 질의를 통해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지난 3월3일 한-미FTA 협정의 효과와 관련한 보고서를 내면서 대미 무역수지 흑자 감소폭이 72억7천만 달러로 추정되자 47억 달러로 대체해서 보고서에 끼워넣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권 의원은 KIEP가 통상교섭본부에 보낸 보고서의 원본을 공개했다.
게다가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미국이 요구한 4가지 핵심쟁점, 즉 약값 재평가제도 개정안을 취소하고, 스크린쿼터를 146일에서 73일로 축소하며, 광우병 파동 때 금지된 쇠고기의 수입을 재개하고 자동차배출가스의 기준강화방침을 취소해 달라는 요구를 정부가 깡그리 수용했다. 개가 웃고 소가 짖을 일이다. 국가간의 협정에서 있을 수 없는 희한한 진기록을 세운 셈이다. 정부쪽은 “한-미FTA는 정부가 오랜 기간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며 누구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주도적으로 여건을 조성하고 제안해서 성사시킨 것”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이는 미국의 ‘압력’때문이 아니라 한국 정부가 ‘주도’해서 4대 핵심쟁점 모두를 몇몇 관료들의 밀실 조율을 통해 내 준 꼴이 된다. 따라서 협상다운 협상을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셈칠 수 있다. 협상은 영어로 할 터이고, 더군다나 미국 쪽은 수십 년에 걸쳐 획득한 협상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다.
미국과 견주어 볼 때, 한-미FTA 협상에 130여명의 협상단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외교통상부에 이미 설치된 60여명의 협상단은 아세안과 3월6-10일, 인도와 3월23-24일, 멕시코와 4월 중순, 캐나다와 4월24-27일에 걸쳐 동시다발로 진행 중인 협상에 투입되어 있다. 따라서 정부는 이 인력에서 일부를, 나머지는 신규 채용해야 할 형편이다. 하지만 시간적으로 2달이 걸릴 뿐 아니라, 전문인력을 확보하기가 만만치 않을 터, 특히 중간 관리자(3-5급) 수십 명을 구하는 일이 문제인데, 김종훈 수석대표는 사법연수원생중에서 뽑아 2-3개월 훈련시켜 보강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무역대표부의 협상단은 139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가 한 분야를 5-10년씩이나 다룬 전문가들이다. 더군다나 지난 89년 미무역대표부 피터 알가이어 부대표가 <세계은행 연차보고서>에서 미국은 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할 필요성이 있다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저쪽은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해 왔다. 그런데 3월 6일 예비협상이 시작되어 협정문 초안을 만들고 90일에 걸쳐 미국의회의 검토가 끝나는 5월 둘째 주에 이를 교환하여 1차 본 협상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예비협상 과정에서 기존 협상단의 일부인 10여명만이 참여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럴 경우 다른 나라와의 협상에도 중대한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 기존 협상단이 대거 차출되면 조직이 느슨해질 뿐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신뢰가 손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제정책과 마찬가지로 협상도 나라의 능력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는 법, 작두날 위를 걷는 것보다 더 위험한 꼴이다.
더군다나 얼마 전 대외경제정책연구원과 국민경제자문회의 등 정부측 기관들이 정부가 통상협상을 추진하는 방식에 문제가 많다며 개선을 촉구했다. 이 기관들은 ‘세계화와 개방정책-평가와 과제’와 ‘동반성장을 위한 새로운 비전과 전략’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를 통해 정부는 개방정책에 대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사전에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체제를 구축할 필요성과 협상과정에서 이해관계자의 참여와 의견수렴을 확대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국회 및 지방자치단체와의 대화와 타협을 위한 창구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특히 정부부처 간 의견 조정의 강화 등 개방을 위한 국내 협상력을 강화하는 게 우선 되어야 하며, 비판 목소리를 사전에 청취하고 이를 설득할만한 객관적 증거제시에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협상 시작이 발표된 직후부터 재정경제부 관료들은 조율이 된 듯한 막말을 연거푸 쏟아내고 있다. 곁방망이질에 이골이 난 이들은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며 생떼를 쓰고, 심지어 대원군까지 거론하며 “쇄국 망국론”을 들먹인다. 특히 권태신 재경부 2차관은 지난 2월16일 한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FTA 협상과 상관없이 스크린쿼터는 축소돼야 하고, FTA 협상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고 물러설 수 없는 일”이라고 헌신짝만도 못한 혀 놀림을 했다.
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같은 날 청와대에서 “국내 이해단체의 저항 때문에 못가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 가지 전략적 고려에 대해 보고를 받은 뒤 심사숙고해서 결정내린 것”이며, “한-미FTA는 우리의 자존심이 걸린 일로 압력 같은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대통령은 “지금까지 개방한 나라가 성공도 하고 실패한 경우도 있었지만 쇄국을 하면서 성공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면서 “FTA의 목표는 한마디로 경쟁력 강화이며, 개방과 경쟁을 통해 세계 일류로 가자는 의미”라고 일갈했다. 한-미 FTA를 잡도리해야 할 노대통령은, 중국의 위협을 뛰어넘으려면 첨단산업과 서비스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그게 진짜 문제라면, 한-미FTA보다는 선진서비스기술을 유리한 조건에서 끌어들일 수 있는 DDA가 더 좋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특히 스크린쿼터 축소 논란에 대해서 대통령은 “어린아이는 보호하되 어른이 되면 독립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선소리쳤고, “한국 영화가 어느 수준인지 스스로 판단해 볼 때가 됐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스크린 쿼터 유지를 선거공약으로 내건 대통령의 독선-독단-독주가 돋보이는 지점이다.
참여정부의 스크린 쿼터에 관한 어록을 챙겨보면 이 정권의 도덕적 파산을 단번에 간파할 수 있다. 이창동 장관은 초심을 버리고 장관 말기에 축소안을 슬그머니 내놓았다. 정동채 장관도 취임 초기는 물론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스크린쿼터를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협상에 연계하지 않는다는 게 문화부의 입장이며 대통령과 총리의 생각도 같다”고 발언했다. 그런데 이 희대의 거짓말쟁이는 4000억원을 지원하는 후속책을 내놓으면서 “정부가 1년 전부터 문화부의 축소안을 가지고 미국과 협상을 해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덤터기 씌우기에 일가견이 있는 이 정치장관은 “스크린쿼터 조정은 이미 전임 장관이 이야기했던 것”이며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 스크린쿼터에 안주해 왔던 영화제작 체질을 개선하고 영화산업 구조를 개편하겠다”고 말했다.
7년 전 한-미투자협정의 협상본부장을 맡은 장본인이기도 한덕수 부총리는, 지난해 8월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대책위 대표들에게 “스크린쿼터가 국제규범에 부합하며 한국영화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면서 “통상문제 등을 고려해 스크린쿼터제를 대체할 다른 제도가 있는지 함께 연구하고 검토하자”고 약속했다. 약속을 어긴 그는 스크린쿼터를 미국의 요구대로 줄여버렸다. 사기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얼마 전 외교통상부의 김종훈 한-미FTA 협상 수석대표는 한 신문과 단독인터뷰를 했다. 김 수석대표는 스크린쿼터 축소 등 미국이 요구해 온 4대 선결조건을 모두 승낙한 이유에 대해 “연예인들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크고 선거지원 유세 등을 통해 정치인들과도 밀착돼 있으며” 따라서 “스크린쿼터 문제를 본 협상에서 논의하면 협정이 깨질 것으로 봤기 때문”이고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반대급부를 챙기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우리 기업들이 한-미FTA에 관련해서 정부한테 사전에 요청한 것이 없어서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얼토당토 않는 말의 내용이 사납다.
블랙코미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현종 통상협상본부장은 2005년 2월부터 4월까지 3차례의 미국과의 사전 점검회의가 끝난 뒤 포트먼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로부터 “핵심쟁점이 풀리기 전에 본 협상에 들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어서 김 본부장은 2005년 7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방미해서 물밑 이야기를 하고 그 해 9월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결심을 끌어냈다. 그런데 한-미FTA의 핵심을 꿰차고 있는 김 본부장은, 얼마 전 브리핑을 통해 ‘정부가 스크린쿼터를 축소키로 했다’는 일부 신문 보도에 대해 “명백한 오보”라고 했다. 이어 “한·미간 FTA 협상개시설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없으며 잠정적 합의도 이뤄진 바가 없다”고 딴청을 부렸다. 얼토당토아니한 거짓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했다. 개꼬리 삼년 묵어도 황모 되지 않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국운을 좌지우지할 협상을 맡고 있다.
이들 관료들은 국정을 실제적으로 쥐락펴락하면서 ‘예외상태’라는 전가보도를 휘두르면서 자기들의 의견을 밀어붙여 왔다. 이들은 긴급상황(=예외상태)을 들먹이면서, 협상 전에 우리네 전략을 노출해선 안된다며 ‘비밀주의’(=예외상태)를 내세운다. 늘상 이렇게 해서 자기네들의 기득권을 확대-심화시켜 왔다. 전문성(?)을 내세워 오직 국익을 실증적으로만 연구-실천한다는 관료들은 이미 모든 영역을 자신들의 산하에 배치하고 있다. 정권은 짧고, 국민은 어리석고, 국회는 우습고, 관료체제는 영원하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벼리로 삼고 있다. 한-미FTA에서도 그들의 전문적(?) 도덕성과 애국심이 유감없이 발휘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든든한 받침목이 ‘오직’ 미국이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터득해 왔다.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이들은, 한-미FTA를 일년도 안되는 기간 안에 제대로 된 연구보고서도 없이 부랴부랴 추진하고 있다. 꼬리가 개를 흔들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노 대통령에게 내내 막말을 하고 연거푸 발목을 잡아왔던 일부 언론들이 초기에 영화인과 농민들에게 ‘깜짝 관심’을 보이다가 한-미FTA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처음으로 노 대통령과 ‘적과의 동침’을 하고 있다. 그리고 7년 전에는 외교통상부가 앞장을 서더니, 지금은 재정경제부가 총대를 메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예전과는 달리 각 부처의 이익을 대변해서 반대하던 관료들도 지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또한 그동안 목에 힘을 주고 주요 사안마다 대갈을 내뱉은 이른바 잘 나가는 지식인들은 이 사안을 나몰라하고 있다. ‘굿 뒤에 날장구’ 칠려고 하는가. 이따금 이들은 FTA가 모두에게 ‘복음’이며, 일본의 끈질긴 견제와 중국의 치열한 추격을 따돌리고 국민소득 ‘3만달러’의 선진 통상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미국이라는 거대시장과 연계하고 미국의 기술-자본을 한국경제가 성장하는데 촉진제로 사용하자고 일갈한다. 날이 선 송곳비판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더군다나 국민의 참여에 큰 덕목을 둔 이 정부가 이 사안에서 철저히 국민을 배제하고 있다. 심지어 노 대통령은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에서 한-미FTA를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일종의 쇼크요법”이라는 묘한 처방을 내었다. 노 대통령이 특유한 뚝심과 모험주의에서 비롯한 오만-오기를 부리고 있다.
그런데 지난 3월24일까지 미국의회는 이 협정의 청문회를 위해 국내외 도처로부터 의견서를 접수했고, 90일 동안 이 협정을 검토한다. 뿐만이 아니다. 미의회조사국의 보고서는 한국에서 점증하고 있는 중국의 정치-경제적 영향에 대응-견제하는데 FTA가 기여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 말은 동아시아지역에서의 협력-연대가 어렵고, 경쟁-대립이 격화되는 것을 뜻한다. 한-미 FTA에 관련된 로드맵이 한미 군사동맹의 전략적 변화와 맞물려서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저쪽 국회는 저렇게 뛰고 있는데, 우리네 국회는 무엇을 했는가. 총리의 골프공과 시장의 테니스공의 진실공방에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재활용이 불가능한 의원들은 중차대한 사안을 내팽개치고 지자체 선거에만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여당답지 못한 열린우리당과 야당답지 못한 한나라당이 나라를 수렁에 빠뜨리고 거덜 내고 있다.
애시 당초 참여정부는 2003년 자유무역협정에 관한 일정표를 만들었다. 단기적으로 일본-싱가포르-아세안-멕시코-유럽자유무역연합(EFTA), 중장기적으로 중국-인도-유럽연합, 이어서 미국과는 마지막으로 협정을 맺는 것으로 짜여 있었다. 그런데 참여정부의 핵심정책인 동북아에서 우리의 역할과 남북문제를 뒤로 하고 대통령을 비롯하여 몇몇 관료들이 사안의 중대성에 걸맞지 않게 왜 이렇게 조바심을 보일까.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이 협정에 참여정부가 도리깨침을 흘리고 부랴부랴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문민정부는 실명제를 도입하고 하나회를 해체했으며, 국민의 정부는 6․15 공동선언과 남북 정상회담에 큰 물꼬를 텄다. 한-미 FTA는 이전의 정부에 비해 뚜렷이 내놓을 만한 업적이 없는 참여정부가 포괄적 대북문제에 대한 미국의 양해(?)와 그것을 통한 정권재창출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단행한 ‘빅딜’(?)이라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우리나라가 양극화 위기를 맞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소갈머리 없는 세계화정책이다. 세계화를 외치면서 시장을 ‘마구’ 열어젖히다가 오늘의 불행을 자초했다. 한-미FTA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협상대상이 거의 모든 분야(농업, 섬유, 자동차-의약품을 포함한 상품무역, 원산지-통관, 동식물 검역, 기술장벽, 서비스, 금융서비스, 투자, 통신-전자상거래, 정부조달, 경쟁, 지적재산권, 노동, 환경, 분쟁해결-투명성, 무역규제)에 걸쳐 있다. 때문에 신자유주의적인 구조조정이 강도 있게 이루어져 양극화 현상이 극대화될 터이고, 따라서 사회통합은 송두리째 무너질 게 뻔하다. FTA는 기업의 과다한 이윤추구를 규제하는 공공제도를 무역장벽-투자장벽으로 보고, 이를 사유화-영리화시켜 파괴-제거하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교육-의료 공공성 강화, 핵심국영기업의 보호,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금융제도의 필요성, 극심한 피해가 예상되는 농업의 구조조정 지원책 등 양극화를 해소하려는 조치는 물 건너간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혼란이 극심해질 것이고, 사회적 비용은 천문학적 액수일 게 불 보듯 뻔하다.
누가 弔鍾을 울리는가. KORUS FTA! 최근 결정된 한미FTA의 공식 명칭이다. 두 나라의 이름(KOR+US)을 섞어서 기발하게 작명한 것인데, 코러스가 조화(chorus)라는 냄새도 풍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코러스FTA가 되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여론을 폭 넓게 모아서 우리의 입장을 제대로 정리해야 한다. 미국은 협상문제의 제기부터 협상전략을 수립하기까지 민간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크게 고려하고, ‘공개적’으로 진행함으로써 국내 협상력을 높이고 있다. 나라의 이로움을 위해서는 유럽식과는 사뭇 다른 미국식 FTA의 자국중심주의, 협상속도, 목표와 내용에 대해 찬찬히 톺아 볼 일이다. 만일 우리의 요구가 제대로 관철되지 않는다면 시간적 여유를 두고 협상에 임해야 하는 법, 종전에는 미국에 끌려 다니면서 미국의 일방적 요구에 굴복한 경우가 적지 않아서 낭패 보기 일쑤였다. 만약 이번에도 힘의 논리에 따라 ‘은밀히’ 그리고 ‘불평등하게’ 협정이 체결된다면, 한-미FTA는 제2의 을사늑약이 될 게 뻔하다. 꼬챙이는 태우고 고기는 설익는 꼴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터. 여우볕에 콩 볶아 먹듯이 나랏일을 섣부르게 처리해서 헤어날 길 없는 수렁으로 빠뜨려서는 안 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정부는 조바심과 조급함을 털어버리고, 이 협정에 신중하게 접근해서 문제가 계속 덧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노적가리에 불 지르고 싸라기 주워 먹어서야 되겠는가.
정 세
2006년 5월, 평택 투쟁의 역사적 의의:
평택에서 또 하나의 가능성

배성인󰋯명지대 북한연구소/ 정치학





1. 비상식의 일반화

“여명의 황새울” 작전이 평택 대추리 황새울 벌판을 제멋대로 가로지르며 초토화시켰다. 강자의 폭력이 지배하는 야만의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정부는 5.4평택 투쟁이 ‘주한미군철수를 위한 정치이념 투쟁’이란다. 민간인보다 경찰과 군인이 더 다쳤단다. 외부단체가 주민들을 배후조종했단다. 주민들은 보상금을 두둑이 받아 백만장자가 되었단다. 어처구니없지만 역시 노무현 정권답다.
북한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가 평택에 나타나서 설쳐대니 무섭단다. 은혜로운 미국이 아니면 북한의 남침 공포를 누가 식혀줄 것인지 걱정이란다. 꼴 보기 싫은 일본이 미국과 군사동맹을 더욱 강화해서 짜증이 난다고 한다. 그러기에 한미동맹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이런 사람 정말 많다.
5월 7일, 노무현 대통령은 몽골,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연합(UAE) 3개국 순방을 위해 출국하기에 앞서 ‘당부’하였다. “평화적 시위는 보장하되 불법시위와 폭력행위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하지 말고 법과 원칙에 따라 엄격히 대처하라”고. 5월 11일에는 200여개 단체가 모여서 결성한 ‘자유민주주의 및 공권력 수호 비상국민회의’ 결성식에서 군사평론가 지만원씨가 “80년 5월 광주에서 군이 시민군에게 발포해 접근을 막은 것처럼 평택 시위 때도 군과 경찰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폭도들에게 군이 처음부터 발포를 했어야 폭력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5월 12일, 부임한 지 한 달도 안 된 한명숙 총리가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용산미군기지의 이전은 한 나라의 수도 서울 복판에 120여 년 간이나 외국군대가 주둔해온 역사를 청산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1988년부터 우리가 요구하여 추진해온 사안”이라면서 “한미동맹을 공고히 유지하는 것은 우리 사회와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민변 출신 대통령이, 여성민우회, 여성단체연합 출신의 국무총리가 최근 평택 투쟁과 관련해 쏟아낸 발언들로서 과거의 군 출신 대통령이나 장관들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통해 정부와 보수세력들은 자신들의 본질과 시각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비상식이 일반화되고 생활화된 한국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번 평택투쟁과 관련한 소위 보수세력의 평가나 그들의 공개석상에서의 시대착오적이고 몰지각한 발언은 정부의 강경 진압의 배경이 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전 세계 평화를 철저히 위배하면서까지 철저히 미국의 이익을 위한 주한미군 재배치를 위해 평택을 침탈하였다. 노 정권의 노골적인 야만과 광기가 평택 주민들에게 거대한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우리는 이번 평택투쟁을 통해서 노무현 정권의 반민중적/반인권적/반민주적/친미사대주의적/친자본적 성격과 이 정권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첨병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2. 주한미군의 재배치 문제와 한국의 자발적 복종

평택 문제는 미군기지 이전에 관한 잘못된 협상과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미국의 세계 및 동북아 전략이 깔려 있으며, 그 핵심이 해외주둔 미군의 재배치 문제인 것이다. 평택이 바로 그 출발점이다.

1)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강화하는 전략으로서 절대적 힘의 우위에 기초한 강제에 의해 미국 중심의 질서를 수립하려는 정책을 주된 정책으로 취하고 있다.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를 통해 자신의 패권유지에 걸림돌이 되는 중국, 북한, 러시아 등을 제압함으로써 일극 지배체제를 확실하게 구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노골적인 대결자세를 보이고 있다.
부시 정권 2기의 동북아 정책 역시 일방주의 정책과 패권주의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되고 있다. 미국의 동북아 정책은 한마디로 ‘중국위협론’에 입각하여 일본과의 동맹관계 강화,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 등으로 중국을 봉쇄하고 견제하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봉쇄 내지 견제 전략은 더욱 구체화되고 강화될 것이다. 미국이 21세기 대외정책 목표를 중국견제에 두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부시는 중국을 ‘전략적 협력자’가 아닌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중국에 대한 견제와 압박을 강화하는 정책을 유지해 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한미군의 역할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북한의 위협에 대해 대처하는 것보다는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을 유지․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주둔 가치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9․11사태 이후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에 따른 ‘범세계적 방위태세 검토(GPR)’ 계획이 주한미군의 감축 및 재배치 결정의 주요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부시행정부는 반테러 전쟁의 효율화를 위해 미군 병력구조의 개편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그 기본원칙은 급변하는 세계 안보환경에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인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lobal Posture Review, GPR)에 따라 미군감축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즉 GPR의 핵심은 기본적으로 탈냉전과 9․11사태를 경험한 미국이 미군의 경량화, 기동화, 신속화를 통해 전세계적 수준에서 불확실하고 다양한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해외주둔 미군 전체를 신속기동군 형태로 전환하고 재배치를 추진함으로써 효율성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이다. 주한미군 역시 GPR의 실현과정에서 예외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우선해 이 계획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개요는 알려진 것처럼 ①미지상군 감축, ②미2사단 한강이남 재배치, ③용산기지 이전, ④군사기지 통폐합 등이다. 이를 통해 미국은 ①북의 장사포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고, ②2차 한국전쟁의 핵심목표인 남한 방어를 위해 미2사단을 ‘합리적 위치’로 재배치하고, ③미2사단 제3국 파병을 가능케 하고, ④남한의 대미 군사 의존을 감소시키기 위해, 남한으로 하여금 지상병력에 대해 더 많은 투자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지난 1월 19일 한미 양측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였다. 미국의 세계군사 전략은 이른바 ‘선제공격독트린’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한 주한미군은 동북아는 물론, 세계 어디에서 발생하는 전쟁이든 공격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미군의 원거리 투사능력이 향상되고 이동거리가 늘어난 무기체계의 개발이 현실화된다면 한국이 세계 주요 분쟁의 발진기지로 이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발진기지의 중심이 평택인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조건으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여 주한미군의 출입 규정과 같은 주한미군 통제장치를 마련한다 하더라도 불평등한 한미관계에 비춰볼 때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것이며, 주한미군의 동북아 지역분쟁 개입을 막기도 어려울 것이다. 또한 주한미군이 동북아 이외 지역의 지역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합법화시켜줄 경우 분쟁 당사자들에 의해 한반도의 안보상황이 크게 악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주일미군의 경우에는 미일안보조약 상의 ‘사전협의’에 의거한 미-일간 재편협의를 통하여 제반 사항이 이루어지고 있다. 미-일간의 재편협의에서는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공통의 전략 목표 수립, 자위대와 미군의 역할 분담, 주일미군의 병력 구성 재검토 등을 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주일미군 재편 논의는 사실상 중국 위협에 대한 대응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미일 동맹의 강화와 일본 안보정책의 변화는 ‘일본 경계론’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일본과 한반도 남쪽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재배치는 글로벌 테러리즘, 불량국가(rogue state)와 대량살상무기 등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측면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미국의 ‘전략적 경쟁자’로 지목된 중국을 사전에 견제․제압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미군 재편에 따른 방위 협력의 일환으로 ‘기지의 공동 사용’도 검토하기로 했다. 자위대와 주일미군 간 상호 운용성을 강화하면서 역할․임무․능력의 통합적 운용에 나선 것이다. 한편 기지 집중지역의 부담 경감은 물론 지역사회와의 관계 개선, 환경 배려 등 협력적 병력 재구성안을 통해 주일미군의 안정적 주둔을 도모하고 있다. 그것은 주일미군을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전선사령부’로 삼고, 일본을 아시아와 중동에 이르는 미군의 군사적 전개의 발판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략적 유연성을 에워싸고 한국과 일본이 국경을 넘어 일체화되는 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전략적 유연성이다. 즉 전략적 유연성의 세계화다.

2) 한국의 자발적 복종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있어서 가장 큰 우려는 중국과 대만 간 분쟁이 발생할 경우 주한미군이 투입되고, 한국 내 미군 기지가 이들의 발진기지가 됨으로써 한국이 실질적으로 양안분쟁에 개입되는 경우이다. 이른 바 연루(entrapment)의 위험이다. 현재 한반도와 주변정세는 미국의 중국견제, 미일 동맹 강화, 북미 갈등 등 복잡한 갈등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전략적 유연성을 통한 한미동맹 재조정은 한반도 안정에 기여하기보다는 한반도를 더욱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앞으로 미국이 북한 문제는 물론이고 중국-대만 분쟁 등과 관련해서도 주한미군을 파견하려할 경우 ‘제동’을 걸만한 안전장치가 없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한미동맹이 한반도내에서 전쟁방지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앞으로 주한미사령부의 작전범위가 최소한 동북아지역으로 확장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한미동맹의 성격변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성격은 지역동맹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한편, 지난 2월 3일 발표된 미국의 2005년 QDR(4개년 국방전략 보고서)에서는 미국의 군사전략적 목표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미국은 QDR에서 북을 ‘잠재적 적대국’으로 중국을 ‘기로에 선 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향후 미국의 군사전략이 대북 선제공격 능력을 강화하고 중국을 포위·봉쇄하는 정책을 추진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이처럼 주한미군이 아태기동군/아태침략군의 성격을 지닐 것은 명확한 사실인데, 이들에게 우리 민중과 민족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는 것이다.
용산 미군기지 이전협정 및 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LPP) 협정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 동안 정부는 용산기지 이전은 미국의 군사전략적 요구가 아닌 한국의 요구라는 점을 강조했다. 용산기지 이전에 따르는 비용 전액과 대체 부지를 제공키로 한 굴욕협상이 민중․민족적 반대에 직면하자 미국의 군사전략적 요구라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한 논리였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이 입수하여 일부 공개한 2005년 4월 1일 청와대 국정상황실 보고서는 정부의 논리가 국민을 기만하는 거짓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미국의 설명을 통해 용산 미군기지 이전이 해외주둔 미군재배치(GPR) 차원에서 전략적 유연성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NSC가 전략적 유연성 문제가 공론화될 경우 기지이전 협상에 미칠 국내여론의 부정적인 영향 등을 고려해 GPR과의 연계성을 현 시점(2005년 4월)에서도 부인하고 있는 한편 (외교) 각서 교환 시기를 용산기지 이전 합의서의 국회 통과 이후로 설정하는 내부 계획을 수립하는 등 관련 정책과 협상 전략을 짰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써 용산 미군기지 이전이 결국 미국의 군사전략적 요구인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직접 연계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이 용산기지 이전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전비용 전액과 대체 부지를 제공키로 했다는 정부의 주장은 그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지난 2003년에 시작된 주한미군 기지이전 협상에서 2006년 1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에 이르는 지난 3년간의 한미관계에서 노무현 정권은 사실상 미국 측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였다. 그 결과 용산기지와 미 2사단 등의 평택으로의 확장 이전은 단순한 미군기지 이전이라는 공간이동의 의미가 아니라 주한미군의 역할변경과 전략적 유연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 되었다.
만약 어느 전문가의 지적처럼 “미군기지가 들어설 경기도 평택 일대는 한반도에서 아직 개발되지 않은 지역 중 최고의 지리적 요충지”이라고 할 때, “정부가 국토를 읽어내는 안목이 있었다면 평택에 미군기지를 못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안목이 길다고 해서 자발적 복종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조건반사적이고 무의식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3. 미국의 평택 집중과 중국위협론

주한미군의 주력 부대가 한강 이북에서 평택권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심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기지 재배치가 완료되면 주한미군은 북한의 야포 사정거리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를 “한반도 전쟁 발발시 미군 사망자가 5만-10만에 달할 것”이라는 1994년 미군의 분석과 연관시켜 보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부시 정권은 ‘필요하다면’ 북한을 선제공격할 수 있다는 이른바 <부시 독트린>을 채택하고 있고, 이를 뒷받침하듯 주한미군의 공격력, 정보력, 방어력을 대폭 증강시키고 있다. 한반도 전쟁시 미군의 피해를 크게 줄이면서도 공격 능력은 강화시키는 형태로 주한미군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평택은 오산공군기지가 인접해 있기 때문에 중국을 겨냥하기에 상당히 유리한 입지이다. 그래서 주한미군이 평택-오산을 ‘허브’로 재편하고 있는 것이다. 평택과 오산은 각각 항구, 공군기지를 갖고 있어 주한미군의 병력과 장비가 넘나들기 좋은 곳이다. 또한 평택을 중심으로 수원, 군산, 광주를 잇는 미 공군력이 상하이, 베이징 등 중국의 심장부와 가까이에 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미국이 평택에 집중하는 좀 더 본질적인 이유는 미국이란 나라가 해외 군사기지만으로 작동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기지들을 통해 세계를 통제하고 석유 등 전략자원과 경제잉여를 무제한으로 빨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군사기지 유지에 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의 정점에 미국의 정책과 미국 ‘국익’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음을, 그리고 그 토대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놓여있음을 잘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는 급증하고 있고, 농촌은 피폐화를 넘어 붕괴 직전 단계에 처했으며, 생태적 토대는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정직하고 소박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려는 민중들의 생활 터전을 뿌리째 흔드는 신자유주의 공세의 원천이 미국 자본의 요구라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자본은 쾌락과 안락을 바라는 대중들의 욕구를 부추김으로써 그 영역과 몸집을 불려나가지만, 자본의 뒤를 봐주는 좀 더 큰 힘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군사력이다.
한편, 국내외에서 ‘중국위협론’이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미국이 ‘중국위협론’을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중국의 군사적 팽창은 이미 지역 군사균형에 변화를 가져올 정도가 됐으며, 앞으로 영토나 자원분쟁 등을 이유로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미 국방부가 경고한 것이다.
지난 5월 23일 미 국방부가 매년 의회에 제출하는 <중국 군사력 연례보고서>는 북한 정권 붕괴 등 한반도 유사시 중국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제기하고, 특히 중국의 일방 개입 가능성을 우회적으로 경고해 주목된다. 보고서는 “중국의 군사력이 증강됨에 따라, 외교적으로 압박하여 자국 이익을 주장하거나 강압수단으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중국 지도자들의 선택폭이 커지고 있다”며 한반도 유사시 중국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거론했다. 또한 보고서는 “중국 군사력 증강의 속도와 폭은 이미 이 지역의 군사균형을 위태롭게 만들었다”며 “중국의 현재 군사력 현대화는 대만을 훨씬 넘어 아시아 지역 전체에서 일정한 범위의 군사작전을 가능케 하는 것이어서 이 지역에서 작전하는 현대 군대들에 잠재적 위협을 제기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게다가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견제에 유럽이 합세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무역분쟁에서 인권문제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공조체제를 다져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군사적 라이벌로서 중국의 위협을 느껴온 미국의 시각이 유럽에까지 스며들면서 지난 1년 동안 EU와 중국의 틈새가 벌어졌다고 한다.
미국의 ‘중국위협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중국이 대형 항공기 제작, 최첨단 원전 개발, 우주탐사를 포함한 군사력 현대화 중장기 계획을 마련하여 주목된다. 중국은 지난 5월 26일 군사용과 상업용으로 다목적 활용이 가능한 첨단기술의 개발에 중점을 둔 15년간의 군사현대화 계획을 채택했다고 보도하였다. 중국의 이런 계획은 미 국방부가 <중국 군사력 연례보고서>를 통해 중국의 군사력 확대가 인근 국가들에 잠재적 위협이 되고 있다며 ‘중국위협론’을 제기한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4. 평택 투쟁과 시대정신 그리고 FTA

1) 투쟁의 역사성

그렇다면 평택 미군기지는 한반도를 국제분쟁에 휩쓸려들게 하는 ‘인계철선’ 구실을 하게 된다. 전략적 유연성의 이행과 관련하여, 미국은 “주한미군이 한국민의 의사에 반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했지만, 여기에는 ‘한국민의 의지’라는 구절에 대해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문제가 있다. 과연 정부 외교안보팀의 의사인가, 대통령의 의사인가 아니면 국회의 동의를 말하는가? 그리고 미국의 한국 존중에 대한 진정성은 존재하는지도 궁금하다. 정부 스스로 공동성명의 내용이 광범위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구속력이 강하지 않다고 했듯이, 그러한 모호함으로 인해 미국은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유사시 주한미군이 한반도 이외의 분쟁지역에 투입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제적 분쟁에 휘말려 들 수밖에 없다. 이런 합의는 ‘미국이 중국과의 군사 충돌 시 주한미군을 투입하고, 이에 대응해 중국이 주한미군 기지를 공격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국민이 제 나라의 평화를 위협하는 용도에 쉽게 땅을 내줄 수 있는가? 국회가 무책임하게 비준 동의한 2004년 12월 9일 용산기지 이전협정 및 LPP협정이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 강행에 반대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오로지 땅값 문제만을 논의하자고 한다.
국방부는 철도, 항만, 도로시설 등의 조건 때문에 평택이 미군기지 이전지로 최적지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위 시설들은 산업 및 거주택지 조성에도 유리한 조건이다. 더욱이 주한미군의 군사력이 평택으로 총집중되면서 중국의 군사적 긴장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군사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이 한반도의 안보는커녕 세계평화를 심각히 위협하는 행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식이 있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운동이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운동이자, 한반도 평화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군사전략에 반대하는 운동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평택은 결코 평택 주민들만의 평택이 아니다. 평택은 이제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이자, 한반도 평화와 세계 평화의 성지이기도 하다. 정부는 이런 평택을 군부대를 동원해서라도 강제 점거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운동의 투쟁의지를 꺾고, 평택을 미군에게 온전하게 바치려 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대추리 황새울에서 생존하고 있는 주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 전역 민중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 대한 미군의 영향력 강화는 곧바로 우리들의 삶과 문화가 미국의 자본에 더욱 예속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미군 기지를 둘러싼 갈등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예외 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평택 지역처럼 미군기지 확장 용도로 소중한 땅을 내놓으라는 정부에 주민들이 저항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2) 국가안보제일주의에 대한 도전

평택 투쟁이 평택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문제인 것은 안보를 가름하는 핵심 사안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국가안보’는 우리 사회에서 절대적 가치로서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면서, 재산권뿐만 아니라 모든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안보제일주의가 이번 평택 투쟁을 통해서 도전받고 있는 것이다. 평화권과 생존권의 이름으로…….
국가안보제일주의는 전통적 관점에서의 정치․군사 위주의 안보 개념을 말하는 것으로서 아시아에서는 미국의 한국 및 일본과의 안보 동맹관계를 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안보관에 대한 도전은 ‘전략적 유연성 확보를 위한 평택지역 미군기지 확장 이전이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지배계급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정당성의 근거이자 상습적으로 강조해 마지않는 한반도의 안보를 근본적인 위험에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평택 투쟁은 국가안보제일주의에 저항하는 평화권·생존권 운동이다. 전통적인 한-미동맹이 미군기지 이전·확장을 계기로 충돌한 것이다. 국가안보에 대한 이러한 문제제기는 앞으로 정부가 안보영역에서도 국민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며, 또한 평화의 관점에 기초한 새로운 안보관(인간안보)이 전통적인 안보관에 도전하여 대체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안보이다.

3) 5월의 평택과 광주-쌍방향의 동일성

한국사회에서 5월은 푸르름이 가득 찬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의 5월은 핏빛으로 물들곤 한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그랬고, 80년 5월 광중민중항쟁이 그랬고, 91년 5월 투쟁이 그랬고, 2006년 5월 평택 투쟁이 그랬다. 80년 5월이 2006년 5월을 구성하고 있으며, 5월 평택 투쟁은 ‘현재’를 구성하고 있다.
우리는 이번 평택 투쟁을 통해서 80년 5월을 보았다. 권력의 야만과 폭력을 보았다. 전두환의 얼굴에 노무현의 얼굴이, 군사독재위에 신자유주의 독재가 겹쳐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배후에는 언제나 미국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은 중심에서 빠져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남한의 민중과 국가권력뿐이다.
5․18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이란 반독재 반외세 정신으로서 군부독재와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자주와 민주주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평택 투쟁도 자주와 평화, 민주주의와 인권 투쟁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무엇보다 광주와 평택의 구조적 동일성은 양자 모두 지배계급이 사활적으로 추진하는 반동적 질서 재편과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배계급은 잔혹한 폭력과 막대한 이데올로기 공세를 취하고 있다.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과 철저한 계획 따라 강경 진압을 보이는 반면, 피지배계급들은 상당히 소박하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려고 한다. 이것이 적극적인 저항과 소극적인 굴복 등으로 나타나 내부의 교란이 요인이 되며, 이를 틈타 기회주의가 침투하여 상황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도 동일하다.
색깔론은 여전히 판치고 있다. 80년 광주나 2006년 평택이나 조중동 같은 수구언론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정당한 저항을 북한의 간첩과 불순세력의 사주에 의한 폭도들의 폭동으로 몰고 가 선량한 민중들에게 색깔론을 덧씌웠다. 더욱이 보상금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주민들을 돈 밖에 모르는 파렴치범으로 몰고 가는 탐욕론까지 가세한 것이다.
생존권적 요구와 민주적 열망, 국민에 대한 무시, 미국의 비호와 압박 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등 현재 평택은 본질적으로 26년 전 광주와 동일하다.

4) 평택 투쟁과 한미FTA

평택 투쟁이 한미FTA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 제국주의는 각 대륙의 군사정치적 요충지에 FTA를 체결하면서 정치군사적 동맹(예속) 체제와 경제 동맹(예속)을 결합시키고 있다. 그럼으로써 미 제국주의의 경제․정치․군사적 패권화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용산미군기지의 이전은 한 나라의 수도 서울 복판에 120여년간이나 외국군대가 주둔해온 역사를 청산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1988년부터 우리가 요구하여 추진해온 사안이다.”

“우리나라 고부가가치 서비스업 경쟁력을 높이는 자극제로서 미국을 자유무역협정(FTA) 파트너로 선택했다.” “어느 날 갑자기 미국과 FTA를 추진한 게 아니라 상당히 오랜 기간 준비해 왔다.”

이러한 발언을 감안하여, 전략적 유연성과 한미FTA 모두가 한국정부의 끈질긴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정부의 친미사대주의는 심각한 지경이다. 지난 1월 19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 2월 2일 한미FTA 협상 개시 선언, 5월 4일 평택 침탈, 5월 9일 이종석 통일부 장관의 개성공단 방문 등 한미 간 정치·경제․군사 분야에서 일련의 변화들이 발생한 시점이 일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전략적 유연성이 한국을 사실상 미국의 전방위 군사 기지로 전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듯 한미 FTA는 경제적으로 중국을 위시한 대륙세력을 고립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한중일 혹은 동아시아 경제권 형성의 말뚝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동아시아 공동체가 중국의 주도로 형성될 경우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 경제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한국과의 FTA를 통해 동아시아 시장과의 연계를 강화하려는 전략을 펴고 있는 것이다.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한-미간 자유무역협정(FTA)을 위한 협상이 두 나라 모두에게 윈-윈이며 “한국 관세를 낮춤으로써 미국 상품의 한국 수출이 늘어날 수 있고, 미국은 한국을 발판 삼아 동북아지역 다른 나라에 진출할 수 있으며 한국과 전략적 유대가 더 강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미 FTA 체결과 한미 동맹의 정치적 연관성을 인정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도 이미 2월 3일 양국의 협상 개시 환영 성명에서 “자유무역협정은 미국의 아시아 개입을 확대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한미FTA 체결을 통한 한미동맹은 오히려 한반도와 동북아의 불안정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동북아 패권 전략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한국은 북한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미FTA를 통해 한미일 공조체제를 형성하여 중국을 견제한다면 동북아 패권 유지에 유리한 입지를 점하게 된다. 반면 한국의 입장에서는 현재 교착상태에 있는 ‘북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거래의 형식으로서 FTA체결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 조기 개최 및 남북경협 확대를 주고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의 평택 침탈과 한미FTA 체결은 북한정권을 살리기 위한 카드이며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평택 침탈은 전략적 유연성을 위한 수단이며, 한미FTA는 개성공단을 인정받기 위한 카드에 불과한 셈이다. 개성공단을 통한 북한 회생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한미FTA가 남한사회에 초래하는 재앙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종국적으로 남북한 모두를 궤멸시키는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택 투쟁은 한미FTA 저지 투쟁과 같은 지점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공동 투쟁전선이다. 이들 투쟁은 남한의 민중뿐만 아니라 북한의 민중 모두를 살리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투쟁이다. 또한 이들 투쟁은 미 제국주의와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세계화․군사화에 맞선 투쟁이며, 노동자계급과 전체민중운동이 함께 싸워야 할 중요투쟁이다.


5. 역사의 현장으로

평택에 대한 군․경병력의 무자비한 폭력침탈이 각계각층의 분노를 일으키면서 평택투쟁은 전국의 투쟁으로 확산되고 있다. 평택 투쟁의 성패는 특히 6월 말까지 노동자 민중운동이 어떻게 투쟁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평택 투쟁의 승리를 통해 노무현 정권에게 국민은 무엇이며 노무현 정권이 말하는 평화와 ‘당당한’ 대한민국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게 될 것이다.
한국의 지배계급은 자본과 미국에 대해서 굴욕적이었다. 천박하고 비굴한 삶의 향연을 이어왔다. 강자에게는 항상 머리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었다. 이들과 함께 우리 민중들도 약자라고 도매금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대 자본과 제국주의의 착각이다. 항상 약자만이 강자에게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거칠고 힘 있고 큰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실상 가장 두려운 사람은 ‘큰 힘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바로 이 땅의 민중들이다.
마르크스는 비극의 역사가 후대에 희극적으로 반복된다고 말한 바 있다. 87년 민주화 투쟁이 바로 비극적 광주항쟁의 배경인 미국의 존재에 맞선 저항에서부터 시작되었다면, 노무현 정권의 굴종적인 모습은 얼마나 희극적인가? 세상에는 정해진 것들이 꽤 많다. 하지만 민중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현장에서 끝없이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일∕반∕논∕문Ⅰ


화폐 ․ 가치 ․ 계급

이종영󰋯성공회대 연구교수/ 사회학





1. 논점들과 명제들

자본주의 사회의 한 가지 전제는 자본이다. 자기 증식하는 가치인 자본이 취하는 첫 번째 형태는 엄청난 양의 화폐라는 형태이다. 이 화폐는, 그 자체가 자본이면서 동시에 자본을 위한 존재인 은행을 매개로 자본가계급의 손에 ‘독점’된다. 나는 이 ‘독점’의 형태를 곧바로 화폐의 두 가지 형태에 대한 짧은 고찰을 통해 새롭게 조명할 것이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손에 쥐어진 엄청난 양의 화폐를 통해 노동력을 구입한다. 그들은 노동력을 이른바 ‘노동가치’대로 구입하는 것일까? 애덤 스미스나 리카아도가 설정한 노동력의 ‘자연가격’은 과연 ‘노동력의 노동가치’에 상응하는 것일까?
이 글에서 내가 논증하려는 첫 번째 명제는 다음과 같다. 즉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노동가치’에 따라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권력관계에서의 노동자들의 상이한 위치에 따른 차별적 평가에 입각해 구입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고학력자들, 여성들, 연소자들, 이주민들은 그들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노동력 가치를 평가받는다. 노동력의 상이한 가격들 배후에 깔린 그러한 정치․사회적 가치평가의 결정체(結晶體)를 노동력의 ‘정치적 가치’라고 해보자. 내가 논증하려는 첫 번째 명제는 자본가들이 노동력을 ‘노동가치’가 아니라 ‘정치적 가치’에 따라 구입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내가 논증하려는 두 번째 명제는, ‘정치적 가치’에 따른 노동력 구입에 의해 계급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명제를 표현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있다. 첫째로, 과잉착취와 과소착취에 따라 계급이 형성된다는 것. 둘째로, 정치적 가치와 노동가치 사이의 괴리에 따라 계급이 형성된다는 것. 이 두 가지 표현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가치와 노동가치의 괴리’라는 표현을 엄밀하게, 정확하게 사용하기 위해선 ‘노동력의 노동가치’에 대한 맑스의 이론을 재검토해야할 필요가 있다. 노동력의 노동가치에 대한 맑스의 이론이 특히 교육 등과 관련하여 일정하게 부르주아적 가치질서를 수용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력 가치에 대한 맑스의 이론을 보다 꼬뮌주의적인 관점에서 다시 검토해보는 것도 이 글의 한 가지 목표를 이룬다.
요즈음 맑스의 노동가치론에 대해 많은 저널리스틱한 비판들이 행해진다. 진지한 사고와 엄밀한 과학적 노동을 결여한 그러한 비판들은 점점 더 전면화되어 가는 자본의 지배를 결코 설명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노동가치론을 ‘수호’하거나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실재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보다 정교하고 엄밀한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사고를 ‘절약’시켜주는 편견 및 도그마들과 단호히 결별하고, 오직 인식대상의 ‘실재’와의 부합만을 우리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


2. 화폐의 두 가지 형태

맑스는 󰡔자본론󰡕 2권에서 단순재생산 도식을 설명하면서 “가변자본은 그 형태가 어떠한 것이건 간에 언제나 자본가의 손에 머문다”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가변자본은 우선 자본가의 손에 쥐어진 화폐자본의 형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자본가는 노동력을 구입하기 위해 이 화폐자본을 임금의 형태로 노동자에게 지급한다. 그러므로 임금의 형태를 취한 화폐자본은 노동자의 손에 머문다. 그 후 노동자들은 생존수단과 생활수단을 구입하기 위해 이 임금을 다시 소비수단 생산부문 자본가에게 돌려준다. 결국 자본가의 손에서 나온 화폐자본은 다시 자본가의 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모든 생산이 자본에 의해 장악된 단순재생산 도식의 공간을 전제하고서 하는 얘기이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가변자본은 적어도 임금의 형태를 취할 때는 노동자의 손에 머물지 않는가? 맑스는 왜 “가변자본은 그 형태가 어떠한 것이건 언제나 자본가의 손에 머문다”고 말했을까? 그것은 첫째로, 가변자본이 임금과 교환된 노동력 형태로 자본가 손에 머물기 때문이다. 즉 생산과정 속의 노동력 자체가 가변자본이다. 하지만 둘째로, 가변자본이 “언제나” 자본가의 손에 머문다는 맑스의 표현은 노동자의 임금이 생존수단과 생활수단의 구입을 위해 다시 자본가에게 지출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모든 생산이 자본에 의해 장악된 자본의 단순재생산 공간 내부에서 임금은 단지 노동자의 손을 지나칠 뿐이다. 가변자본은 노동자의 매개를 거치지만 실질적으로는 한 자본가에서 다른 자본가로 건네질 뿐이다.
그래서 삐에르-필립 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상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교환은 없다. 교환은 단지 자본가들 사이에서만 벌어진다. 노동자에게 소비수단을 지급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자본가 사이의 교환이 그것이다.” 즉 자본주의를 하나의 ‘체계’로 간주할 때, 화폐는 결과적으로 자본가들 사이에서만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맑스는 임금의 지출을 통한 노동자들의 개인적 소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력을 유지시키는 음식들은 증기기관에 사료로 공급되는 물, 석탄과 동일한 역할을 한다.” 즉 노동자들은 임금의 지출을 통해 자본가들을 위한 노동력을 재생산시켜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임금을 지출한 후에는 새로운 생활수단을 구입하기 위해 노동력을 다시 자본가에게 팔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폐를 진정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은 자본가들이 아닐까?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화폐를 잠시 빌려쓴 뒤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자본가들의 화폐’와 ‘노동자들의 화폐’는 그 성격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닐까?
화폐의 두 형태를 나누어보자. 상호결제를 통해 자본가들 사이에 이동하는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와 노동자들이 생활수단을 구입하기 위해 지출하는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가 그것이다. 개별적 소비자가 일상생활 속에서 지출하는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의 양은 사실상 보잘것없다. 반면, 자본주의적 생산공간의 주체들인 자본들 사이에 이동하는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는 엄청난 크기를 갖는다. 이 두 형태의 화폐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화폐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유용하다.
막스 베버는 󰡔사회경제사󰡕에서 화폐의 최초 형태가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가 아니라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였음을 지적한다.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는 다양한 채무관계를 청산하는 수단이다. 왕에 대해 신민(臣民)들이 지는 채무로서의 공납, 신부의 가족에 대해 신랑의 가족이 지는 채무인 신부대, 사회에 대해 범죄자가 갖는 채무로서의 벌금 등이 그러한 것이다. 막스 베버가 “조공(朝貢)이나 수장(首長)에게 보내는 증여물, 결혼시의 납폐, 신부지참금, 살인벌금, 속죄금, 벌금” 등을 언급하듯이 말이다. 칼 폴라니도 베버의 판단을 공유한다. 즉 그는 원시 또는 고대 사회에서 교환수단으로서의 용법이 화폐의 기본적 용법이 아니었고, 지불수단으로서의 용법과 가치축장수단으로서의 용법이 교환수단으로서의 용법에 선행했음을 밝힌다.
모리스 고들리에는 원시사회에서의 재화의 여러 형태들을 나눈 뒤, 그 가운데 특히 위광재(威光財, objets précieux)가 ‘경제적 교환수단’이 아닌 ‘사회적 교환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는 ‘사회적 교환수단’을 “각각의 사회 내부에서 상품처럼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 자체의 과정 속에서, 즉 친족관계나 권력생산의 과정 속에서 증여하거나 재분배해야 하는 재화로 유통되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고들리에가 말하는 ‘사회적 교환수단’은 베버가 말한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사실상 공동체적 질서에 입각한 전(前)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의 역할은 무척 미미했던 것이다. 예컨대 고려와 조선 초기의 국가는 중국을 모방해서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를 확립하려 했지만, 거의 물물교환의 수준에 머물러 있던 공동체적 질서는 국가의 그러한 시도를 지탱해줄 수 없었다. 원유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전(鐵錢)의 주조유통을 시도한 이후 고려왕조는 동전․은화 및 저화(楮貨) 등의 각종 화폐를 유통시키려 하였다. 조선 전기에도 저화․동전과 전폐(箭幣) 등의 화폐를 발행, 유통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는 사회경제적 여건의 불비(不備)로 철전․동전․은화나 저화 등 여러 가지 화폐 중에서 어느 일정한 화폐가 계속하여 통용되지는 못하였다. 고려시대나 조선 전기에 국가의 화폐정책은 실패만 거듭”했다. 그러한 실패에는 화폐주조를 위한 물질적 기반의 미비도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고려와 조선 초기의 ‘사회’가 교환수단으로서의 주조화폐를 필요로 하지 않아서, 지불수단으로서의 주조화폐마저도 사회적 기초를 충분히 지닐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은 지불수단이 또 다른 형태로 존재했음을 함의한다.
그렇다면 15세기부터 17세기 사이에 아프리카, 멕시코, 페루로부터 유럽에 유입된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은 어떤 형태의 화폐를 구성했던 것일까? 명백한 것은, 그것들이 일상적 교환수단을 이루기보다는 자본가들의 손에서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즉 그것들은 계급적 화폐를 구성했다.
막스 베버는 화폐의 기원을 서술하면서 화폐의 계급적 성격을 강조한다. 여러 형태의 화폐가 존재했고,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계급적으로 소유되어 계급 내부에서만 유통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심지어 남성들만이 사용하는 화폐와 여성들만이 사용하는 화폐, 추장(酋長) 화폐와 비(非)추장 화폐 등이 존재했었고, 특히 상아, 특별한 성격의 큰 돌,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들은 일반적 교환수단이 아니라 “신분적 소유의 대상물”로서 지배계급의 화폐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폴라니는 화폐의 계급적 분화에 대한 여러 사례들을 제시한다. 14세기 말리 제국에서 고급 상품들은 부자들의 화폐로만 살 수 있었고 가난한 자들의 화폐로는 숯이나 수수를 살 수 있었다는 것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또 이자율의 계급적 차이도 존재해서, 메소포타미아의 사원에서는 빈농들에겐 33.3%의 이자율로 보리를 대부해주고, 자유 시민들에겐 20%의 이자율로 은을 대부해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계급적 화폐들의 병존을 보다 체계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구로다 아키노부이다. 그는 󰡔화폐시스템의 세계사󰡕에서 인도에서 은화와 패화(貝貨)의 대립이나 중국에서 은화와 동전의 대립을 서술하는데, 이들 계급적 화폐들은 유통되는 회로가 전혀 달랐고, 그리하여 거래되는 시장도 달랐다는 것이다.
화폐의 계급적 분화가 전(前)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들에 고유한 현상인 것은 결코 아니다. 페르낭 브로델은 자본주의가 성립하던 시기를 대상으로 화폐의 계급적 분화를 서술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부자들만이 그들 가까이에 금화나 은화를 두고 만지는 데 비해서 중하층의 사람들은 비용(billon) 화폐나 구리 화폐만을 손에 쥐어보기 때문이다.……사실 이중 본위제도나 삼중 본위제도에서는 하나의 화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화폐들이 공존한다. 이 화폐들은 마치 부자들과 빈자들처럼 서로 대립하고 있다.” 브로델은 고급화폐로서의 금화 및 은화와 저급화폐로서의 비용화 및 동화 사이에 일종의 환율이 존재했음을 지적한다. 마치 외국 화폐들 사이에서처럼 말이다. “일용 노동을 통해서 살아가는 하층민들을 위한 돈”이었던 저급화폐는 작은 규모의 소매거래에서만 사용되었고, 고급화폐에 비해 끊임없이 가치가 하락했다. 이에 따른 실질임금의 하락과 화폐상인의 착취 등으로 인해 브로델은 “화폐는 확실히 놀라운 교환수단이지만 동시에 특권층에게 봉사하는 속임수”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지만 계급적 화폐들이 서로간에 반드시 질료적 차이 또는 형태적 차이를 가질 필요는 없다. 자본주의 국가의 단일본위제 하에서도 계급적 화폐들이 존재한다. 즉 은행에서 신용 대부되는 화폐는 기본적으로 자본가계급을 위한 화폐이다. 그리고 비록 자본가계급의 화폐는 아닐지라도, 심지어 ‘소비자 금융’마저도 명확히 계급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쉬잔느 드 브뤼노프는 일상적 교환수단 또는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와 은행에서 대부하는 화폐 자본이 전혀 성격을 달리 하는 두 종류의 화폐들임을 지적한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구아타리는 쉬잔느 드 브뤼노프의 이러한 지적에 입각해 임금생활자의 화폐와 기업회계의 화폐를 구분한 뒤, 화폐의 이러한 두 질서를 “동일한 분석 단위로 측정하는 것은 은하계들 사이의 거리나 원자 내부의 거리를 미터나 센티미터로 측정하는 것과도 같은 순수한 허구, 우주적 사기”라고 말한다.
자, 자본가들의 화폐와 노동자들의 화폐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두 화폐가 완전히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은행에 집적되어 있는 자본가들의 화폐는 노동자들에게 나뉘어졌다가 다시 자본가들에게 되돌아온다. 자본가들은 그들의 화폐를 노동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나누어줄까?


3. 정치적 가치로서의 노동력 가치

맑스는 󰡔자본론󰡕 3권에서 이윤율의 균등화에 따른 “자본가들의 코뮌주의”를 언급한다. 맑스에 따를 때, 이윤율의 균등화에 따라 형성되는 평균 이윤은 각각의 개별적 자본들에게 그 크기에 비례하여 나누어지는 잉여가치의 총량이다. 그리하여 자본가들은 “참여비율에 따라 일괄적으로 이윤의 몫을 나누어 가지는 주식회사의 단순한 주주들”이 되어버린다는 것이고, 그 결과 “자본가들의 코뮌주의”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가들의 코뮌주의”라는 맑스의 표현은 일종의 은유적 표현일 뿐이다. 자본가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결코 이윤율의 균등화가 아니라, 한편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들의 계급투쟁이고, 다른 한편으로 은행이다. 은행이 자본가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은행의 손에서 화폐가 ‘자본가계급의 화폐’로 전화되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은행을 매개로 화폐를 집합적으로 소유하면서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된다.
맑스는 은행가들을 “화폐자본의 총괄적 경영자들”로 간주하면서, 그 원천이 어찌되었건 간에 화폐가 ‘화폐자본’으로 은행에 의해 경영되면서 자본가들의 화폐로 전화됨을 시사한다. 레닌은, 흩어져 있는 자본가들이 은행을 매개로 집단적 자본가로 탄생한다는 것을 보다 명확히 말한다. “모든 종류의 화폐소득을 모아 자본가계급의 관리에 맡기는” 은행은 개별 자본가들에게 신용을 제공하거나 박탈함으로써 계급적 귀속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또한 이사회나 감사회를 통한 은행과 거대 기업들 사이의 인적 결합에 주목하는데, 그러한 인적 결합은 자본가들을 계급으로 결합시키는 모태를 이루는 것이다.
물론 은행에 대한 레닌의 논의는 19세기말 20세기초의 경험에 입각하는 것이지만, 레닌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그 이전의 은행들이 단순한 중개자적 역할만을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적어도 16세기경부터 은행은 자본 형성적 기능을 행한다.
1545년 캘빈은 교회가 금지하던 이자부 대여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이자부 대여는 그 이전에도 이미 환어음을 통해 실질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이미 12세기부터 성립한 유럽의 정기시(定期市, foire)들은 신용제도를 발전시키고 자본시장을 제공한다. 정기시들에는 환어음들이 모여들어 서로의 부채를 상쇄하고, 해결되지 않은 부채는 연 10%의 이자율로 다음 번 정기시로 이전되었다.
유럽에서의 은행과 신용의 역사를 13세기 피렌체로부터 추적하는 브로델은 당시 은행들이 기업에 신용 대부를 했다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15-16세기의 푸거 가(家), 벨저 가, 메디치 가 같은 거대한 은행 가문들의 정치적 투자도 계속되지만 말이다. 브로델은 이자율 하락을 신용 대부 활성화의 지표로 간주한다: “자본이 경제에 주입되면 이자율의 변동을 가져오는데, 이것은 경제와 교환의 건강성을 재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유럽에서 15-18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이자율이 떨어졌다는 것, 1600년경 제노바의 이자율이 거의 형편없이 낮았다는 것,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또 그 다음 시기에 런던에서 이자율이 엄청나게 하락했다는 것은 모두 축적의 결과로 자본의 양이 크게 증가했으며, 자본이 풍부해지자 자본의 비용, 다시 말해서 이자율이 떨어졌고, 상업 거래량의 증가가 자본 축적의 리듬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활기찬 국제경제의 중심지들에서는 자본의 대부가 대단히 활기차고 빈번하게 이루어져서 일찍이 자본가들과 예금주들이 만나게 되고, 접근이 용이한 화폐시장이 만들어졌다.”
유럽의 역사에서 15-18세기는 엄청난 양의 화폐 축적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이 화폐들은 은행을 매개로 자본가계급의 화폐로 전화된다. 브로델은 이미 13세기의 파리에 노동시장이 존재했다고 하지만,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두 요소인 화폐자본과 노동력 가운데, 화폐자본이 먼저 형성되고 그 이후에 노동력이 형성되었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18세기 중엽에 들어 산업자본의 수익성이 보장되면서부터 화폐자본은 상업보다는 산업에 본격적으로 투자되기 시작한다. 자, 그렇다면 화폐를 집합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어떤 방식으로 구입했을까?
리카아도는 󰡔정치경제학과 조세의 원리들󰡕에서 ‘임금의 자연가격’을, 노동자가 그의 가족이 생활을 늘리거나 줄임이 없이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생활수단을 구입할 수 있는 가격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리카아도는 흥미롭게도 그러한 수준의 생활수단의 양이 ‘관습’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관습’이란 어떤 것일까? ‘관습’은 모든 사회적․이데올로기적 지배관계로부터 벗어난 중립적인 것일까? ‘관습’ 그 자체가 이미 사회적 지배관계 하에 놓여있는 것이 아닐까?
맑스는 노동력의 가치를 두 가지 방식으로 규정한다. 첫째는 노동력의 노동가치에 의해서이다. 다른 요소들을 사상(捨象)하고서 말하자면, 노동력 형성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그것이다. 둘째는 리카아도처럼 “평균 노동자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로 규정하는 것이다. 맑스는 그러한 가치가 “일정한 사회, 일정한 시기에는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불변적 크기로 다루어질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일정한 사회, 일정한 시기”의 ‘관습’에 의해 노동력 가치가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노동력 가치를 규정하는 맑스의 두 가지 방식은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닐까? 노동력 형성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른 가치규정이 일정한 정의(正義)의 원리, 민중적 공공성의 원리에 입각한 것인 반면, 생활수단의 ‘관습적’ 양에 따른 가치규정은 사회적․이데올로기적 각인 하에 놓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맑스는 복합노동력과 단순노동력의 가치관계에 대해 말하면서도 이 두 가지 방식을 드러낸다. 즉 그는 기본적으로 복합노동을 배가된 단순노동으로, 그리고 단순노동을 추상노동으로 간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복합노동과 단순노동의 구분을 “전통적 관행”에 기초한 것으로 여긴다. 게다가 그는 “예컨대 경작자들과 같은 노동자계급의 특정 집단은 자신들의 노동력 가치를 끌어내기에는 무척 불리한 위치에 처해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때 맑스는 “노동자계급의 특정 집단의 불리한 위치”를 마치 예외적인 것처럼 간주한다. 하지만 이미 “전통적 관행” 자체가 권력관계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한다면, 오히려 복합노동력과 단순노동력의 가치관계가 순수하게 노동가치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오히려 예외적이게 된다.
첫 번째 중요한 사실은, 복합노동과 단순노동의 배치 자체가 이미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복합노동과 단순노동의 짜여짐이 원래부터 자연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특정한 착취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생산양식이 성립하면서 정치적으로 재조직․재배치된다는 것이다. 즉 생산이 자본주의적으로 재조직되면서, 전(前)자본주의적 노동능력들이 조직적으로 파괴되고, 새로운 형태의 복합노동과 단순노동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인적(匠人的)인 복합적 노동능력을 완전히 파괴당해 모든 특별한 가치를 상실한 노동력의 가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물론 그러한 노동력은 단순노동력의 가치만을 가질 뿐이다. 그렇지만 남는 사실은 그 노동력이 순수한 단순노동력이 아니라 오랜 기간의 교육과 훈련을 통해 형성되었던 노동력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노동력의 노동가치는 원칙대로라면 무척 높은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노동력 소유자가 판매하는 것은 오랜 교육과 훈련을 통해 형성된 높은 노동가치의 노동력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는 전혀 무관한 단순노동력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펼치는 이유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말하고 있는 “노동력 그 자체의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하나의 생산양식이 성립하면서 생산은 전체적으로 재조직된다. 그리고 노동력은 “그 자체의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재조직된 생산-착취관계 내에서의 위치에 따라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가치를 착취관계 내에서의 사용가치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기존 착취관계 내에서 불필요한 노동능력은 자본가에 의해서 구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본가는 자본주의적 착취관계 내에서 유효하게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만을, 다시 말해 자신에게 필요한 노동력만을 구매한다. 그러한 노동력은 ‘자본주의적 착취관계 내의 사용가치’에 따라서 구매된다.
둘째로 중요한 사실은, 자본은 잉여가치 착취에 유리한 모든 조건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자본은 노예제나 농노제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이 노예적 착취관계나 농노적 착취관계를 실현하지 못하는 것은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여러 형태의 저항으로 인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자본은 언제나 과잉착취의 기회를 노린다. 사실상 과잉착취는 여성노동이나 아동노동, 이주노동 같은 예외적인 경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과잉착취는 오히려 자본주의적 착취의 일반적 형태일 수 있다. 물론 앞으로 보듯이 과소착취도 존재한다. 잉여가치의 최대 착취를 위해 오히려 특정 집단의 과소착취가 필요한 한에서 말이다. 즉 과소착취는 ‘착취관계 내의 사용가치’가 높은 노동력에 대해 행해지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착취관계 재생산을 위한 계급동맹의 필요에 부응한다.
생산의 자본주의적 재조직에 따른 복합노동과 단순노동의 재배치는 과잉착취와 과소착취의 특정한 접합구조를 수반한다. 과잉착취와 과소착취의 존재가 뜻하는 것은 노동력이 노동가치대로 구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자본가는 노동력을 노동가치대로 구매한 다음에 거기에 잉여가치를 덧붙이는 것일까? 이것은 우리가 통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우선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자본은 노동력을 노동가치대로 구입해야만 하는 경제학적 필연성을 갖는 것인가? 그러한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 한에서 자본이 노동력을 차별적으로 착취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여기서 확고히 말해두어야 할 것은 노동력 가치를 규정하는 맑스의 두 가지 방법이 명확히 모순된다는 것이다. 그 하나가 성립하면 다른 하나는 성립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노동력 가치가 생활수단의 관습적 양에 의해 규정된다면, 노동력은 노동가치에 따라 판매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활수단의 관습적 양은 계급적 생활양식에 의해 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급적 생활양식은 과잉착취와 과소착취의 접합구조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논리전개를 해보자. 1) 노동력 가치는 생활수단의 관습적 양에 의해 규정된다. 2) 생활수단의 관습적 양은 계급적 생활양식에 의해 규정된다. 3) 계급적 생활양식은 과잉착취와 과소착취의 접합구조의 귀결이다. 4) 과잉착취와 과소착취의 접합구조는 노동력이 노동가치대로 판매되지 않고 있음을 말해준다.
자, 자본가계급은 은행을 매개로 화폐를 집합적으로 소유한다. 산업자본의 수익성이 보장되는 시점부터 자본가계급은 본격적으로 노동력을 구입한다.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노동력을 구입할까? 첫째로는, 착취관계 내의 사용가치에 따라서이다.
착취관계 내의 사용가치를 형식적으로 둘로 나누어보자. 한편으로 순수 경제적 사용가치 또는 생산수단으로서의 사용가치와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사용가치가 그것이다.
생산수단으로서의 사용가치는, 하이데거가 현대 ‘기술문명’이 인간을 단지 생산의 ‘재료’로 간주할 뿐이라고 한 의미에서, 생산과정 속의 ‘재료’로서의 사용가치이다. 단순한 착취대상으로 사물화(事物化)된 존재의 사용가치, 그리하여 인격적 소통의 대상이 되는 사물적 존재의 순수 경제적 사용가치가 그것이다.
반면 정치적 사용가치는 착취관계의 경영과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노동력들의 사용가치이다. 그러한 노동력들의 사용가치가 정치적인 것은 그러한 노동력을 소유한 노동자들이 자본가계급과 정치적 동맹관계를 맺기 때문인 것이다. 물론 그러한 노동력들이 순전히 정치적 사용가치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노동력들은 또한 경제적 사용가치도 갖는다. 우리는 그것들의 순수 경제적 사용가치에 덧붙여진 ‘추가적 사용가치’를 정치적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여러 노동형태의 결합적 배치 가운데 그것들의 위치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노동력들의 사용가치는 그 이상으로 정치적이다.
물론 착취관계 내의 순수 경제적 사용가치와 정치적 사용가치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착취관계 내에서 상이한 사용가치들의 배치는 정치적 권력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또 거꾸로 그러한 ‘사용가치들의 교환가치’가 정치적으로 규정되면서 정치적 권력관계가 새롭게 구조화된다. 보다 명확히 말해보자.
자본가계급은 노동력들을 착취관계 내의 사용가치에 따라 구입한다. 하지만 사용가치에 따라 ‘구입’한다는 사실이 전제하는 것은 ‘사용가치의 교환가치’에 대한 양적 측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양적 측정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으로 행해진다. ‘정치적’이라는 것은 사회적 권력관계의 위치에 따라 규정된다는 뜻이다. 즉 한 집단의 노동력의 가치(사용가치의 교환가치)는 그 집단이 사회적 권력관계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권력이 상대적으로 작은 집단은 과잉착취되고, 권력이 상대적으로 큰 집단은 과소착취되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이처럼 결정되는 가치를 정치적 가치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가치는 사용가치의 교환가치이다. 이러한 정치적 가치는 노동력의 시장가격 밑바탕에 언제나 깔려 있다. 즉 이러한 정치적 가치는 리카아도가 말한 ‘임금의 자연가격’처럼 존재한다.
정리를 하자. 첫째로, 자본가들은 노동력을 착취관계 내의 사용가치에 따라 구입한다. 둘째로, 그러한 사용가치의 교환가치는 정치적으로 규정된다.


4. 차별적 착취와 계급형성

정치적 가치에 따라 노동력 구매가 결정됨에 따라, 상이한 정치적 가치를 갖는 동일한 노동력들이 차별적으로 착취된다. 예컨대 단순노동력의 8시간 지출이 토착인 남성의 경우 8만원, 토착인 여성의 경우 4만원, 외국인 남성의 경우 6만원, 외국인 여성의 경우 3만원이라는 식으로 차별적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하지만 차별적 착취가 동일한 노동력에 대해서만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상이한 노동력들도 차별적으로 착취된다. 만약 노동력의 노동가치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상이한 노동력들 사이의 가격 차이가 그 노동력들 사이의 노동가치 차이와 지나치게 괴리될 때, 차별적 착취가 행해진다. 예컨대 어떤 복합노동력과 단순노동력의 가격 비율이 4:1이고 노동가치 비율이 2:1이라면, 차별적 착취가 행해지는 것이다. 이를 다른 식으로 말해본다면, 노동가치와 가격(정치적 가치에 의해 규정받는) 사이의 괴리비율이 노동력들 사이에 서로 다를 경우 차별적 착취가 행해진다.
알뛰세르의 제자들인 크리스띠앙 보들로와 로제 에스따블레 등은 이른바 ‘신중간계급’ 노동력들을 대상으로 노동가치와 가격 사이의 차이를 계산한다.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1969년 프랑스에서 고급관료는 노동가치보다 55.4%를 상회하는 임금을 받았고, 엔지니어, 고등학교․대학교의 교수, 중학교 교사, 일반 행정관료, 기술자, 초등 교사는 노동가치보다 각각 47.9%, 41%, 24%, 43%, 26.7%, 6.9%를 상회하는 임금을 받았다. 즉 ‘신중간계급’을 구성하는 집단들이 각각 상이한 비율로 과소착취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소착취는 그들의 노동력의 정치적 가치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다. ‘신중간계급’의 과소착취가 노동자계급의 과잉착취를 전제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분화는 정치적 가치에 따른 과잉착취와 과소착취의 접합구조에 의해 이루어진다. 노동력들이 노동가치에 따라 구매되고 단지 평균적 잉여가치만이 덧붙여질 뿐이라면, 특히 노동자계급에서의 높은 노동강도를 감안할 때, 현재와 같은 계급구조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과잉착취와 과소착취의 접합구조는 단지 계급형성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았듯이, 동일한 계급 내부에서 착취율을 달리 하는 계급분파들도 형성하는 것임에 유념해야 한다. 즉 정치적 가치의 개념에 따라 계급분파들의 형성도 보다 논리적으로 설명되기에 이른다.
‘신중간계급’이 과소착취된다는 사실은 ‘신중간계급’의 ‘중간적’ 성격에 대해 일정한 의문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과소착취된다는 것은 이른바 ‘신중간계급’이 지배계급의 편이 되어 지배계급과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는 것, 또는 더 나아가 자본가계급과 계급동맹을 통해 지배계급 자체를 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끌로드 메이야수는 여태까지 ‘신중간계급’의 이름 하에 포괄되던 집단들을 자본가계급의 ‘사회적 신체들’이라고 규정한다. 즉 하나의 독자적 계급이라기보다는 자본가계급의 기능들을 위임받은 집단들이라는 것이다. 메이야수에 따를 때, 자본가계급의 ‘사회적 신체’는 크게 보아 국가기구 담당집단, 자본의 지휘기능 위임집단, 테크노크라트 그리고 자본의 이데올로그라는 네 집단으로 구성된다.
이들을 자본가계급의 ‘사회적 신체’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들이 과소착취되는 이유를 보다 적절히 설명해주고,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이들의 구조적 위치를 더욱 잘 드러내준다. 하지만 나는 자본가계급과 이들을 합쳐 ‘부르주아계급’이라고 부르는데,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이들이 갖는 지배계급적 성격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자본가계급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지배계급이라면, 부르주아계급은 부르주아적 지배양식의 주체이고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지배계급이다.


5. 노동력의 노동가치에 대해

노동력이 노동가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가치에 따라서 구입된다고 한다면, 일반 상품의 가치도 기본적으로 정치적 가치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다. 죽은 노동에 체화(體化)되어 있는 것은 산 노동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의 상품이 언제나 결합노동에 의해 생산된다고 할 때, 상품의 가치는 상이한 정치적 가치들의 접합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다. 즉 상품의 가치는 과소착취와 과잉착취의 접합구조를 체현(體現)하는 것이다.
사실상 상품의 노동가치는 민중적 공공성에 입각해 선험적으로 추론된 것이다. 헤겔은 1805년 예나에서 쓰여진 초고에서 노동 속에서의 상호인정을 통한 사회성의 성립을 주장한다. 즉 타자의 노동이 나의 노동과 동일한 가치를 갖는 것임을 깨닫게 됨에 따라 노동의 질적 동등성이 성립하고, 그에 따라 노동의 양적 교환이 행해져서 사회성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공동체적 교류의 질서를 벗어나게 됨에 따라 상이한 노동력의 가치들이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받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박영은은 조선시대의 사농공상 질서를 지탱하던 이데올로기적 가치이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로, 순수한 생산물을 창조하는 농민의 노동이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고, 둘째로, 수공업적 노동은 특정 양의 원료에 작용을 가해 형태를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좀더 가치가 적은 것으로 여겨졌고, 셋째로 상업적 노동은 가치를 교환시킬 뿐 가치증식에는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일 가치가 없다고 평가되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의 노동력 가치도 이처럼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맑스는 그러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규정의 일부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임금의 국민적 차이를 논하면서 “노동력의 절대적 또는 상대적 가치를 규정짓는 정황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통상적인 필요의 폭, 생활필수품의 가격, 노동자가족의 평균 크기, 노동자 교육비용, 여성과 아동의 노동이 차지하는 역할, 노동의 생산성, 길이, 강도.” 이를 단순화 시켜 노동력 가치의 ‘절대적’ 구성요소를 이루는 네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자. 1) 노동자의 생활비용, 2) 가족 부양비용, 3) 노동자의 교육비용, 4) 노동의 강도.
그 가운데 1)과 2)가 계급에 따라 차이가 난다면, 그것은 다만 정치적 가치의 실존을 말해주는 것일 뿐이다.
3)과 관련해선, 복합노동력의 소유자가 그의 노동력 형성 비용을 사후적으로 보상받고, 그러한 보상을 통해 그의 단 한 명의 자녀에 대해 그의 같은 수준의 교육비용을 투자할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가정 자체가 자본주의적 교육제도를 전제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백보 양보해서, 만약 복합노동력 소유자의 자녀 교육비용 지출이 단 한 명의 자녀만을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교육하는 비용을 넘어서게 된다면, 그것은 노동력 가격이 정치적 가치에 의해 규정됨을 말해준다.
4)와 관련해선, 세계적 수준에서 일반적으로 단순노동의 강도가 복합노동의 강도보다 훨씬 더 높다는 것은 명백하다. 오랫동안 서있기, 무거운 것을 들기, 고통스런 자세의 유지, 진동과 충격, 위험․소음․통제되지 않은 환경에의 노출, 눈과 귀의 긴장, 끝없이 반복되는 동작 등등이 그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훨씬 강도가 높은 단순노동이 그러한 강도에 상응하는 가격을 받지 못하는 것은, 복합노동력과 단순노동력의 가치비율이 정치적인 것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노동생산물은 노동의 자연적인 보수 또는 자연적인 임금을 이룬다”고 말한다. 생산활동이 일반적으로 결합노동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해보자. 결합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생산물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이것이 노동력의 비(非)정치적인 정당한 가치를 사고하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이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승려, 교사, 점술가, 시인, 경찰, 관리인, 목수, 대장장이, 도공, 이발사 등을 촌락공동체가 집합적으로 고용하는 인도의 사례를 언급한다. 이 경우 인도의 농민들은 그들의 고용인들의 노동력 가치를 어떻게 계산했을까? 만약 목수의 노동력 형성비용이 농민의 노동력 형성비용보다 더 들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목수의 노동력 가치를 어떻게 결정했을까? 노동력 가치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원칙적으로 새롭게 사고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