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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강국의 그늘에서 쓰러져간 “또 하나의 가족”

진보평론  제36호
공유정옥󰋯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반도체 산업은 대한민국 경제의 효자로 불린다. 삼성경제연구소 자료를 보면, 메모리 반도체 분야만 하더라도 한해 생산액이 20조원을 넘고, 지난 5년간 연 14%의 성장을 이어왔다.
반도체 산업은 하이테크 산업, 초정밀 산업이라고도 한다. 제품 개발과 생산을 위해 고도의 과학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먼지 하나 들어갈 수 없는 이른바 ‘클린 룸’에서 순백색의 작업복으로 온몸을 감싼 채 뭔가 복잡해 보이는 기계 앞에서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어쩐지 멋져 보인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은 결코 청정하지도 안전하지도 않다. 일찍이 반도체 산업이 번성했던 미국, 영국, 대만 등에서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한테 자연유산과 암, 자녀의 선천성 기형 위험이 높아진다는 사실이 꾸준히 보고되어 왔다. 심지어 공장의 유해물질이 주변 환경을 오염시켜 인근 지역 주민에게도 피해가 미쳤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이 밝혀진 계기는 예외 없이 반도체 노동자들과 지역 주민의 투쟁을 통해서였다. 미국 실리콘 밸리의 ‘SVTC’, 영국 내셔널반도체회사의 암이나 자녀의 선천성 질환을 겪은 노동자들의 조직 ‘Phase 2’, 대만 신죽과학단지 노동자 건강 및 환경오염 문제에 대한 활동 네트워크 ‘TEAN’ 등의 투쟁 등을 꼽을 수 있다.
한국의 반도체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십년 일하면 불임”이라는 자조 섞인 얘기가 공공연히 나돈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두통, 코피, 탈모, 피부병, 빈혈, 근골격계 질환이나 생리불순은 다반사이다.
그러나 아직 한국 사회에서 반도체 산업의 이미지는 ‘청정’과 ‘첨단’에 머물고 있다. 고통과 피해는 있었으나 그 고통을 인지한 이도, 그 고통을 드러낸 이도, 그 고통에 귀 기울이는 이도 극히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지난 2007년 말에 발족한 “삼성반도체 집단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의 활동으로 희귀 질환이자 난치성 질환인 백혈병으로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이 쓰러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 문제가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2인 1조 공정에서 일하던 두 명이 모두 사망

수원에 위치한 삼성전자반도체 기흥공장의 3라인 디퓨전 공정, 그 중에 3베이에서 일하던 황유미 씨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스물 셋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유미 씨와 2인 1조로 작업을 하던 이숙영 씨도 동일한 병명으로 사망했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은 세계적으로는 연간 10만 명당 2명-3명이 발생하는 드문 질환이다. 65세 이상은 연간 10만 명당 12명 정도가 발병하므로, 그만큼 젊은 나이에는 더욱 희귀한 셈이다. 이처럼 희귀한 질환이 2인 1조 공정의 작업자 두 명에게서 동시에 발생했다.


우연의 일치라고 주장하는 회사
삼성반도체 사측은 시종일관 우연의 일치라고 주장했다. 정말 그럴 수도 있다. 10만 명 중에 두어 명이 갖고 있는, 그것도 주로 노년층에서 발생하는 질환이 우연히 같은 장소에서 20대 여성 두 명에게 동시에 발생할 확률은, 아주 낮지만 생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먼지만큼도 안 되는 확률을 우기기에 앞서, 더 높은 가능성을 먼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동일한 작업을 하면서 동일한 유해요인에 노출되어 똑같은 질병에 걸렸을 가능성 말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일찍이 반도체 산업이 번성했던 미국의 실리콘 밸리를 비롯하여 영국이나 대만 등에서도 비슷한 문제들이 제기된 바 있다. 반도체 공장에 다니던 노동자들한테 자연유산과 암 위험이 높아지며 심지어 공장의 유해물질들이 환경을 오염시키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여러 질병을 일으키고, 그 자녀들의 선천성 기형을 초래했다. 한국의 반도체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이 공장에서 십년 일하면 불임이 된다”라는 식의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게다가 대책위로 제보해온 기흥공장 출신 백혈병 환자의 수는 어느새 14명에 달한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많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걸렸을까>
2003년 10월에 삼성전자 기흥반도체공장에 입사하여 디퓨전 공정에서 근무하던 황유미씨는 2005년 6월, 스무살의 나이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고 1년 반 동안 투병 끝에 사망했다. 2006년 6월, 같은 공정에서 유미씨와 2인 1조로 근무했던 이숙영씨도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진단받고 두 달만에 사망했다 이밖에 1995년과 2001년, 2003년, 그리고 2008년에 각각 기흥공장 생산직 여성 노동자들이 급성 백혈병으로 퇴사하거나 사망했다.
생산직뿐만이 아니다. 이 공장에서는 1997년에도 설비 엔지니어 ㅇ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하였고, 1997년에 입사한 설비 엔지니어 황민웅씨도 2004년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은 지 일 년 뒤인 만 3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1983년에 입사하여 디퓨전 공정을 관리했던 엔지니어 출신 기술부 부장 ㅈ씨도 2006년 3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고 현재 투병 중이다. 그리고 회사 측에서 유족에게 확인해준 바에 따르면 사무관리직 노동자 중에서도 급성 백혈병 환자가 2명 있었다.
삼성반도체 천안공장에도 백혈병 피해 노동자가 있다. 1991년에 입사했던 김옥이씨는 2005년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아 현재 투병 중이며, 2005년에 입사했던 박지연씨도 2007년 9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고 투병 중이다.


진실을 알고 싶은 자와 감추고 싶은 자

삼성반도체는 현재 기흥공장의 경우 7명의 환자만을 인정하고 있다. 나머지 제보자들의 신원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흥공장의 백혈병 유병률(2만 7천여명 가운데 8년간 7명 발병 주장)이 한국 전체 유병률보다도 낮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백혈병 환자 수야말로 아무런 근거도 없다. 회사는 정확한 백혈병 환자 수를 파악한 것이 아니라, 대책위에서 주장하고 있는 환자들 중 일부를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애초에 황유미씨의 유족들에게는 “백혈병 환자는 황유미씨 한명밖에 없다”라고 했다가, 유족과 대책위에서 환자들을 추가로 찾아내면 그만큼만 추가로 인정하는 식이다.
또한 삼성반도체는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백혈병 유발요인인 벤젠과 방사선에 대하여, 벤젠은 전혀 사용하지 않으며 방사선은 완벽하게 관리하고 있다면서, 백혈병 피해자들의 업무관련성은 억측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허용 기준 미만으로 관리한다고 해서 암 발생의 위험이 전혀 없다는 주장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허용 기준은 “모든” 노동자가 아니라, “대다수의” 노동자만을 보호할 수 있는 기준이므로, 그 이하에서도 얼마든지 질병이 생길 수 있다. 특히 암의 경우에는 아무리 낮은 수준에 노출되어도 발병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게다가 반도체 공장에서는 수많은 화학물질을 사용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발암 물질이 아니라 새로운 화학물질에 의해 백혈병이 발생할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책위는 전·현직 노동자 전체를 대상으로 백혈병 환자의 규모와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문제의 원인에 접근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진실을 알고 싶은 것이다. 투명하고 진지한 접근을 통해 과연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무엇이 원인인지를 밝혀서, 힘겹게 투병하고 있거나 이미 속절없이 생명을 잃은 노동자들의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2008년 들어 산업안전공단에서 반도체 산업 노동자들에 대한 역학조사를 시작하고, 노동부에서 13개 반도체 소자 제조업체에 대한 일제조사를 실시하게 된 것은 작은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진실을 감추고 싶은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가족”을 노래하던 삼성을 보라. “가족”들 중에 십여 명이 백혈병으로 쓰러졌는데도, 그 원인을 밝히고 해결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오히려 딸을 잃고 비탄에 잠긴 아버지를 찾아와 “산업재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으면 밝혀봐라. 절대로 찾지 못할 것이다. 당신 혼자 이 큰 기업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냐”라고 조롱하는 것이 그들이다.
13개 반도체 소자 제조업체 일제조사에 나선 노동부 역시, 진실을 감추려는 기업들의 행보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한다. 대책위는 2008년 4월 22일 노동부의 「“반도체 제조업체 근로자 건강실태” 일제 조사」 결과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했고, 노동부는 5월 1일자로 결과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통보서를 보내왔다. 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공개될 경우 법인, 단체 등이 보유하는 생산기술 또는 영업상의 정보로 당사자의 이익을 해할 우려가 인정되는 정보이고 개인정보 보호에 해당"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번 조사는 대책위에서 반도체 산업 노동자들의 백혈병 문제를 제기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반도체 업체의 이익이 아니라 반도체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문제를 검토하기 위한 조사였다. 노동부가 챙겨야 할 “당사자”란, 반도체 사업주가 아니라 반도체 노동자인데, 사업주의 이익을 운운하며 노동자의 생명에 대한 조사 결과를 감추려 하는 것이다.
또한 개인 정보 보호에 해당하기 때문에 자료를 공개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반도체 업체별(원․하청)로 재직경력이 있는 근로자의 연도별/직종별/연령별/성별 구성 현황, 주요 화학물질 취급현황, 방사선 발생장치 사용현황, 건강진단 및 작업환경측정 실시현황, 백혈병 발생 현황 등을 조사한 자료에 무슨 개인 정보가 들어가 있다는 말인가. 만의 하나, 조사결과 중 일부라도 개인 정보 보호를 해야할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제외하고 공개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지, 개인 정보를 핑계 삼아 모든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차한 핑계에 불과하다.
이에 앞서 2008년 2월에도 대책위에서는 이번 조사가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사 방법과 진행 과정을 공개하고, 회사 측 자료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 노동자들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사 대상과 방법, 내용상의 문제점과 우려 지점들에 대해 노동부에 공개질의서를 보낸 바 있다. 그러나 노동부는 대책위의 요구와 질의를 묵살하고 참여를 배제한 채 비공개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과정에의 참여 요구도 거부하고, 조사에 대한 질의마저 묵살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결과에 대한 알 권리마저 침해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도 용납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요구한다, 그리고 투쟁한다

대책위는 진실이 무엇인지 밝힐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 공장 안에서 여러 명의 노동자가 같은 질병에 걸렸다면, 사업주는 최소한 그 공장의 작업 환경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찾아내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있다. 정부 역시 이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피해 당사자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투명하고 공정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대책위는 백혈병 노동자들에게 산재보험으로 보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당장은 어떤 물질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정확히 입증하기 어렵더라도, 일터에서 건강과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치료와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산재보험이며, 이들의 질병이 업무와 관련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않는 한, 근로복지공단은 지체 없이 산업재해로 인정하고 보상해야 한다.
대책위는 사업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는커녕 병든 노동자에게 퇴사를 종용하고, 현장에 한 발짝도 들어설 수 없는 유족들에게 작업환경의 문제점을 찾아낼 테면 찾아내 보라며 조롱하고, 진실 규명을 위해 단결하기 시작한 피해자들을 돈으로 회유하려 드는 삼성의 모습을 보았다. 백혈병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노동자들이 건강하게 일할 권리, 인간답게 일할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반노동 기업 삼성, 절대 권력 삼성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그러므로 대책위는 삼성 노동자들이 삼성 자본의 무노조 경영 방침에 맞서 노동기본권을 되찾기 위해 벌이는 투쟁에 함께 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동안 ‘세계화 시대의 첨단 산업’, ‘국가 경제의 일등공신’ 등으로 미화되어 온 반도체 산업의 그늘 아래에는 노동자의 건강을 해치는 유해물질들의 세계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에 맞선 싸움을 만들어갈 계획이다.


지금, 당신의 눈길과 손길이 필요하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한발 더 내딛기 위해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피해 당사자들의 결집이다. 그러나 이미 죽은 이들은 말이 없고, 살아남은 이들은 자본의 보복이 두려워 침묵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는 반도체 노동자들이 절대 다수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 대책위는 전현직 반도체 노동자들과 그 가족, 친지들이 이 싸움에 대해 알 수 있도록, 그래서 피해자들이 대책위로 제보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이에게 알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온라인 카페(cafe.daum.net/samsunglabor)를 열고, 매달 2일 “노동자 건강권 쟁취 투쟁의 날”에는 삼성반도체 공장 인근 지역에서 길거리 선전을 하며, 각종 집회와 행사를 쫓아다니며 알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대책위 역량으로는, 서울과 경기 지역 이외에 반도체 제조업이 집중되어 있는 충청 지역이나 구미, 광주 지역에서의 활동은 차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다행히도 4월 “노동자 건강권 쟁취 투쟁의 달”을 맞아, 경기/경남 지역의 노동자들이 이 문제를 소재로 선전전을 전개하고 집회를 열었다.
이런 움직임이 다른 지역으로도 확장되고, 더 나아가 각 현장과 지역에서 좀 더 일상적인 선전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눈길과 손길에 달려있다.


[덧붙임] 주변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고 있거나 과거에 일했다가 백혈병이나 암, 유산이나 불임, 자녀의 선천성 질환 등으로 고통 받은 사례가 있을 경우 아래로 연락 바랍니다. 혹은 건강 문제를 겪지 않았더라도 반도체 제조 현장에 대해 상세한 지식을 갖고 계신 분들의 제보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메일: sharps@hanmail.net
전화: 다산인권센터 031-213-2105/ 민주노총 경기법률원 031-268-9640/
건강한 노동세상 032-439-8177/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02-324-8633
 

2008-06-20 16: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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