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상황을 보면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문제를 생각한다

최갑수󰋯서울대 교수/ 서양사학

노무현 정권의 무능을 탓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실정이다. 불과 2년전만 해도 여론의 거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여당이 창당 3년 만에 스스로 간판을 내리겠다고 한다. 처음에는 보수언론의 근거 없는 공세려니 치부하기도 했고 노 대통령의 다소간 경박스런 언행에서 비롯한, 정권적 차원에서 보면 비본질적인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려니 여긴 것도 사실이지만, ‘바다이야기’를 지나 아파트 값의 폭등사태를 통해 현 정권의 무능이 실체적 근거를 갖게 되면서 ‘운동권’, ‘진보’, ‘좌파’, 심지어 ‘민주주의’ 자체가 희화화되는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흥미롭기도 하고 또 의아스럽기도 한 것은, 노 정권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는 점이다. 현 정권은 한쪽에서 좌파, 친북 인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반민중적인 정부이고, 스스로에게는 ‘참여정부’이다. 사실 이런 규정에 현실적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현 정권의 담당자 가운데 상당수가 운동권 출신이고 또 우리 사회의 정치 지형에서 민주노동당 지지층을 제외하고 대체적으로 왼쪽 블록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그렇고, 이라크에 자이툰 부대를 파견하고,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평택미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고, KTX 비정규 여성승무원의 정규직화를 거부하고 특히 미국과 FTA의 체결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김영삼 문민정부(정권 내에서 문민성의 몫이 1/3) →김대중 국민정부(문민성이 2/3)→노무현 참여정부(문민성이 100%)로 이어지는 문민적 정통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또 하나의 역설은 현 정권에게 무슨 뚜렷한 구조적 부패나 어떤 혐의가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데는 특장을 보이는 반면에 재벌과 이른바 ‘시장’에는 비굴할 정도로 약하고 일련의 개혁정책의 추진에서는 철저하게 무능력하다는 점이다. 현 정권이 기득권층의 지지를 받지도 못하고 또 그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것 같지도 않으면서도 결국 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우리는 정치공학의 차원에서 현 정권의 담당자들의 무능이나 재벌이나 보수세력 내지 언론의 영향력, 또는 미국의 존재, 아니면 더 심원한 차원에서의 지역구도나 이데올로기적 대립구조와 같은 특정 정치문화 등의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요인으로는 평가의 엇갈림을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역설을 적절하게 담아내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것이 이른바 ‘민주화 과정’이 갖는 한계와 관련이 있다는 판단이다. 잘 알다시피 민주주의란 공공재(公共財)이다. 그것은 이른바 민주화를 추진한 세력에게만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치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분배된다. 따라서 이를테면 12·12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극소수의 정치군인과 그 추종자들은 권력을 독점해 유신독재체제를 이어나갔고, 그 군부독재를 극복해가는 민주화의 과정에서 결국 정권을 놓치기는 했지만 정치적 행위자의 한 요소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의 민주화가 혁명적인 상황을 수반했다면 아마도 다소간 유혈적인 과정을 겪고 또 그 민주주의의 내용이 상당히 충실해졌겠지만, 단계적이고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민주화는 결국 절차적 민주주의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 채 국가보안법의 폐지라는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멈춰 서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이 민주화 과정의 의의나 성과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기는커녕 그것은 정녕 우리 사회의 저력을 보여준 밑으로부터의 거대한 분출이요, 산업화와 결합하여 근대화를 일정 수준으로 끌어올린 결정적 계기가 아닐 수 없다. 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 고문전문가를 감옥으로 보낼 수 있었음은 이제 우리 사회에 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금단의 영역이 그만큼 축소되었음을 뜻하며, 우리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과거의 고통을 드러내놓고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어둡고 침침했던 다방이 큰 통유리로 안이 투명하게 보이는 커피집(카페)으로 바뀌었음은 민주화가 야기한 밝음의 효과를 웅변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돌이켜 본다면, 그것은 필시 기득권층과 민중층의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이렇게 된 것은 물론 양 세력의 역학관계가 그런 정황을 빚어냈기 때문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가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동시에 진행된 결과였다. 즉 자본주의의 발전이 경제적 영역의 자율적 영역으로의 분화 및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절화를 심화시키는 가운데 절차적 민주주의의 정착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사법적 조건을 강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민주화를 통해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국가는 강제력을 독점해 가는 한편에, 자본주의적 소유권에 생산 자체를 조직화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해 줌으로써 사적인 경제적 권력을 가능케 하였다. 바꿔 말하면 민주화의 최대의 수혜자는 다름 아닌 재벌이었고, 절대적 소유권과 계약관계 그리고 그것들을 떠받치는 일련의 사법기구는 중립적인 외양에도 불구하고 친재벌적 속성을 갖게 마련이었다. 심지어 국회의 결정(곧 민의에 의한 정치적 결정)조차도 헌법재판소의 위헌판정의 대상이 되는 정치과정의 사법화가 일어나고 있으니, 이 역시 우리의 헌정을 정상화시켜 절차적 민주주의를 전진시킨 지표로 볼 수 있는 동시에 민의보다는 시민사회의 권력관계를 반영할 가능성은 그만큼 커졌다고 하겠다.
이렇듯 부산하고 현란한 정치과정(투표, 유세, 여론조사, 시위, 진압과 저항, 국회, 지방의회, 심지어 단식 등)의 이면 내지 아래에서는 냉혹하고 준엄한 경제권력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으니, 여기서 인민이라는 이름의 민중이 얻어낸 성과란 거의 전무하다. 그래도 민주화의 열기가 한창 뜨거울 때는 노동투쟁, 대중투쟁을 통해 부의 재분배에서 제한적이나마 개선이 있었지만, 일단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정 단계에 도달하자 오히려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IMF사태’는 잉여노동의 전유가 경제적 수단을 통해 경제적 영역에서 발생하게끔 제도적 장치를 일신했으니, 이제 국가가 아니라 ‘시장’을 통해 자본세력은 사적 전유와 생산조직의 통합을 미증유의 수준에서 이룩해내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민주주의로부터 얻은 것이 없다는 허탈감과 ‘민주주의가 뭐 밥 먹여주나?’라는 자조는 결코 역설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의 자본, 특히 재벌이 21세기의 벽두에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 속에서 정치권력을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화할 수 있었던 필연적 귀결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자본주의의 철폐 내지 죽음이라는 역사적 대전환에 대한 전망을 배제한다면 오직 두 가지 대안만이 남는다. 하나는 민주주의의 실체화를 통해 국가의 성격을 바꾸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민중의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일이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이런 민주주의가 존재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이다. 흔히 고대 민주주의와 근대 민주주의의 차이를 전자는 직접 민주주의, 후자는 간접 민주주의 하는 식으로 우리는 정리하고 있으나 이는 본질적 파악이 못된다. 양자의 근본적 차이는 고대 아테네에서는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공동체(폴리스)의 조화를 깨뜨릴 정도로 커졌을 경우에 민회의 결정으로 부채를 탕감해주든지 심지어는 소유의 변경이나 제한을 기했다는 점에 있다. 그러기에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선 계급투쟁이 빈발했으며, 민주주의는 예컨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하는 귀족 출신의 사상가에게서 결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사실 아테네가 페르시아전쟁에서의 승전 덕분에 구축했던 델로스동맹의 해상제국이 무너지게 된 것도 다름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제국도 희생시킬 용의를 보였던 아테네의 인민 때문이었으며, 이후 민주주의는 루소가 나타날 때까지 정치사상가 사이에서 결코 옹호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일련의 시민혁명, 그리고 19세기를 통해서도 모든 성년남성에 의한 보통선거권의 행사를 뜻하는 민주주의는 결코 유럽의 지배층이나 부르주아지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으며 사회주의와 함께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적대적 이데올로기였다. 민주주의가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부분적인 실험을 통해 노동자에게 선거권을 주어도 소유권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1900년을 전후하여 대의제 자유주의와 선거제 민주주의가 결합하여 자유민주주의가 되면서 민주주의는 일약 서구 정체성의 핵심적인 요소로 부상하였다. 이후 자유민주주의는 경쟁적인 타 민주주의를 제압하면서 민주주의의 상품적 가치를 독점하는 한편, 민주주의 일반의 발본적이고 저항적인 속성을 마모시켜 갔다. 이렇듯 유럽의 부르주아지는 오랜 진화과정을 거쳐 인민민주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추방하고는, 가급적이면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에 부합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로 축소시키고, 양보가 불가피한 경우에는 최소한 자본주의와 양립 가능한 사회민주주의의 수준으로 국한시키려고 했다.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의 차원을 넘어설 수 있는 계기로는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근대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전국적인 수준의 계급전선의 등장이다. 먼저 21세기의 우리의 현실에서 근대혁명이 터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덜 발달한 곳에서, 그것이 낡은 생산의 형태와 공존하는 곳에서, ‘경제외적 강제’가 생산조직과 잉여노동의 수취에서 더 큰 역할을 하는 곳에서, 국가가 자본의 이익만이 아니라 전자본주의적인 지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곳에서, 요컨대 경제투쟁이 정치투쟁과 분리되지 않고 국가가 가시적인 계급의 적으로서 대중투쟁의 초점으로 부각되는 곳에서 발발하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다. 심지어 더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 대중의 전투성은 ‘경제외적 강제’에 반응하여 고조되는 경향성을 보이게 마련이다. 우리 사회로 보자면 20여년에 걸치는 군부독재의 시기가 바로 이에 부합되는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다른 하나는 치열한 계급전선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사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생산관계 자체를 해체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본주의를 위기 속에서 지켜내는 관리자 역할을 했지만, 그것 자체는 참으로 자본주의의 철폐를 노렸던 국제 프롤레타리아운동에 대해 부르주아지가 일정한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던 타협의 결과물이다. 물론 그것은 자본주의 폐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국가의 계급성을 크게 완화시켜 역사상 소득의 불평등이 가장 적은 사회를 만들어냈다. 이런 대안이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가능한가?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쟁이 생산 현장에 위치하고 잉여의 전유를 둘러싼 싸움이 경제적 갈등의 형태를 띤다는 점에서 계급투쟁은 항상적이며 국지적이며 특수적이고 분파적이다. 그러기에 발달한 자본주의에서 혁명적 사태의 폭발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로 노동계급의 ‘경제주의’를 계급의식의 저개발상태로 간주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문제를 우리는 제기할 수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덜 발달한 단계가 아니라 더 발달한 단계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경제주의’가 정치의식의 결핍이라기보다는 정치의 입지점이 변화한 것으로, 곧 자본주의 생산의 바로 그 구조에 고유한 정치투쟁의 영역과 목표가 변화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경제주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의 과제는 한편으로 그것을 대중적 규모의 계급의식과 계급조직으로 묶어내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것을 자본주의 생산의 원심력과 정치적 쟁점의 탈정치화에 맞서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진보적 지식운동의 역할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즉 그런 노동운동에 상상력을 발동하여 대안적 전망을 제공함으로써 국지성과 특수성을 극복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상관성을 확보해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