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5.31지방선거의 역설

이번 5.31지방선거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열린우리당의 패배,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제1야당 한나라당이 제기한 ‘중앙권력심판론’과 집권 열린우리당의 ‘지방권력심판론’이 서로 대립하면서 출발한 이번 선거는 현상적으로는 ‘중앙권력심판론’이, 역대 선거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의석점유율로, 집권 여당을 따돌리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면 무엇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는가. 이를 논의하기 이전에 과연 이들이 제기한 ‘중앙권력심판론’과 ‘지방권력심판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번 5.31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각각 ‘지방권력심판론’과 ‘중앙권력심판론’을 내세우며 서로에게 비판의 날을 세웠지만, 이러한 주장 자체는 설득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담론은 결국 이들 양자가 이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문제유발세력임을 서로 인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중앙권력’이라고 말하는 노무현정권과 집권 열린우리당은 신자유주의의 신봉자가 되어 비정규직 확대, 한미 FTA 강행, 군사력을 동원한 평택미군기지 건설 강행, 새만금 방조제 마무리 등 ‘역사에 길이 남을 굵직한 사업’을 추진하여 이미 양식 있는 대중의 비판과 저항을 한 몸에 받아 왔다.
그렇다면 중앙권력을 심판하자고 한 한나라당은 이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미 알려진 대로 한나라당은 이들 문제에 대해 열린우리당보다 더 완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그것의 ‘전위세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오히려 한나라당은 수구언론들과 공조하며 이런 사안들에 대해 노무현정권과 열린우리당이 너무 유약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강한 불만을 토로하며 비판해 왔다. 또한 사학법개정과 관련된 일련의 논의과정에서 보듯이, 한나라당은 아직 극우반공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화석화된 국가정체성의 주술’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5.31지방선거 이후 실시된 당 대표 경선 과정에서 재야 출신 후보에 대한 ‘색깔론 공방’으로 다시 표현된 바 있다.
다른 한편 2002년 지방선거 이후 지방정부와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은 시민사회단체들, 양식 있는 대중들로부터 지역의 건설 및 상업자본, 토호들과 결탁하여 부정과 부패를 조장하는 세력으로 지목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집권 열린우리당은 책임이 없는가. 역시 한나라당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오십보백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지난 4년 여 동안 한나라당이 주도하는 가운데 발생한 지역의 난개발과 이로 인한 환경‧생태의 파괴, 열악한 교육 및 주거환경, 노인과 일하는 여성 등 소수자의 복지문제, 학교급식 등 아이들의 먹거리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열린우리당은 혼신의 노력을 다 한 적이 있는가. 그런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나의 예로 민주노동당이 추동하고 지역 주민들의 총의에 의해 추진된 학교급식조례가 지방 의회에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공조에 의해 모두 부결되고만 현실은 이를 증명해 준다. 지금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지배하고 있는 지방정치에서 공통의 업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곤 도로정비라는 이름 아래 수 억에서 수십 억 이상의 혈세를 ‘상가 정비와 보도블록 교체’에 쏟아 부은 것이 손꼽힐 만큼 빈곤하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지난 5.31지방선거 공약에서도 ‘개발환상의 붐’을 타고 재현된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그 편차에도 불구하고 이들 양자를 ‘중앙정치’와 ‘지방정치’에서 환상적인 협력자가 되어 대중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고통에 빠뜨리는 ‘구악’과 ‘신악’을 대표하는 세력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과도하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항상 대립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거시적인 중앙권력’과 ‘미시적인 지방권력’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현재 이 사회에 상존하는 일련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난제들’이 이들의 ‘유기적 결합’ 속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심판받아야 할 대상들이 스스로 심판의 주체라고 역설하니 난감한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한데, 그들의 주장 속에는 선거 때만 되면 그들이 존경해마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주권자로서의 대중’, ‘심판자로서의 대중’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를 오직 권력획득을 위한 선거공학 쯤으로 생각하는 그들에게 대중은 의식을 지닌 주권자가 아니라 단지 조작과 지배의 대상으로만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은 이번 선거 결과와 연관해 생각해 보면, 더 역설적이다. 특히 이번 선거결과의 원인에 대한 분석들 가운데,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가속화에 따른 사회양극화 심화로 ‘개혁적인 중간층’과 ‘서민’이 노무현정권, 열린우리당으로부터 이탈한 반면, 한나라당의 전통적 지지세력은 박근혜대표 피습사건을 계기로 더욱 결집함으로써 한나라당이 유례 없는 의석점유율로 압승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접할 때 더욱 그렇다. 즉 이번 5.31지방선거 결과는 이들 양자에게 매우 차별적으로 나타나 이들 모두가 노동자, 서민들의 삶의 고통을 증폭시킨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 전도사들이라는 점을 무색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가운데 집권 열린우리당이 ‘완패’를 당하고 제1야당인 한나라당이 ‘완승’을 거두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질문은 또 다른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반대를 외치며 노동자, 민중의 대변자임을 역설해온 민주노동당, 나아가 초록의 가치를 설파한 초록정치연대 등에 의미 있는 대중적 지지가 결집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5.31지방선거 결과의 원인들, 그것들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반추해보고, 향후 진보정치세력들이 어떤 정치적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 지금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한국형 제3의 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열린우리당의 ‘완패’ 원인: ‘개혁 정체성’의 분해와 지역주의의 부활

일반적인 평가처럼 ‘개혁적 중간층과 서민’의 이탈이 지난 5.31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완패하게 된 이유라고 한다면, 그 ‘개혁적인 중간층’과 ‘서민’은 누구이며 이들이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개혁적인 중간층’이 요구한 개혁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이다. 이것은 그 동안 개혁 정치세력을 자임해 온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에 대한 검토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제기된 개혁의 의제는 크게 두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국가보안법, 언론관계법, 사립학교법, 그리고 과거사규명법 등 4대개혁입법과 같은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개혁 목록에 포함되는 것들이다. 여기에서 전통적이라 한 것은 그것이 인권의 고전적 목록, 자유주의의 근거라 할 수 있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에 대한 침해, 국가폭력에 의해 초래된 신체의 구속, 그리고 ‘사유재산 보호’ 등의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시장에 대한 개혁’이다. 이것은 다시 두개의 하위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에 대한 공공적 통제에 무게를 두는 개혁이다. 사실 과거 김대중정권의 출범 시기에 나온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이라는 언술은 이러한 양 측면을 봉합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유신체제 이후 반독재운동을 주도해 온 민중지향적이고 개혁적인 자유주의 좌파들의 성격이 일정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양자의 호명이 단순한 병렬적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민주주의가 외적인 구색 맞추기로 호명된 것이 아니라면, 시장개혁은 단순히 ‘정경유착의 단절’이나 ‘부패의 완화’에 무게 중심이 있었다기보다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을 포함하여 노동과 자본 사이에 조성되어 있던 기존의 비대칭적, 억압적 관계들의 변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오랜 동안 지속된 권위주의 혹은 파시즘의 지배를 극복하는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시장의 투명성’은 당연히 ‘시장의 문제’이면서 ‘민주주의의 문제’, 나아가 ‘경제의 문제’이면서 ‘정치의 문제’인 것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개혁의 내용이면서 집권 자유주의정치세력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문제는 단순히 노무현정권과 열린우리당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자유주의정치세력 전체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내용의 개혁은 지금까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
먼저 4대개혁입법으로 표현되는 전통적인 개혁과제는 길게는 김영삼정권 등장 이후, 짧게는 김대중정권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국가보안법은 강정구 교수사건에서 보이듯 여전히 살아 움직이면서 이 사회를 내리누르고 있으며 사유재산권 침해, 혹은 교육계를 장악하기 위한 ‘좌파(혹은 전교조)의 음모’ 등으로 비판받았던 사립학교법 개정은 애초 의욕은 있었지만, 누더기가 되는가 싶더니 이제 어디에서 숨쉬고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언론관계법, 과거사규명법도 용두사미격으로 되어버린 지 오래다.
다른 한편 시장의 개혁은 이미 지적한 노동시장 주체들의 비대칭적 관계를 해소시키는 방향으로, 혹은 그것을 제도화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기보다 노동에 대한 공세를 강화시키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재벌의 ‘투명한 내부거래’ 확립 정도가 가장 중요한 개혁이슈인 것처럼 보일 정도인데, 그것마저도 유명무실한 것으로 될 상황에 처해 있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노동 없는 민주주의’로 상징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집약하는 것이다.
애초 김영삼정권의 노사개혁위원회 이후 현재의 노사정위원회 등은 그 참여 주체들이 지니고 있는 인식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비대칭적 관계의 변화를 모색하기 위한 기제였다는 점이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현재의 노사정위원회가 계속 공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측면을 간과하거나 주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답보상황은 이른바 ‘공익적 성격’을 지니는 시민사회단체의 대표들로 그 구성을 보강한다고 해서, 다른 한편 주기적으로 돌발하는 ‘노동운동위기론’을 유포시키고 노동운동의 비도덕성을 부각시킨다고 해서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금 유명무실화된 노사정위원회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미 ‘시장의 개혁’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관계재정립이라는 과제를 배제시키면서 신자유주의 시장개혁과 동일시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는 자유주의정치세력이 내세우는 민주주의가 생산현장의 비대칭적, 억압적인 사회관계들을 문제시하지 않는 것이기에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맥락 위에서 노무현정권과 열린우리당에 개혁을 요구했던 지지층이 이탈하게 된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한나라당이 주도한 대통령탄핵 이후 실시된 2004년 총선에서 대중의 무차별적 지지로 과반수 의석의 다수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열린우리당은 이러한 개혁과제들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성과들을 내지 못하였다. 신자유주의의 구체적 표현인 사회양극화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지니계수는 더욱 악화되고 있으며 사업 실패로 인한 자살률 또한 IMF시기보다 더 증가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사회양극화 해소를 주요 정책의 하나로 내세우면서도 그것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 예견되는 한미FTA 협상을 관료주의적으로 강행함으로써 오히려 대중적 우려와 비판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4대개혁입법과 합리적 시장개혁을 지지하였던 개혁적 중간층이 노무현정권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호의와 지지를 철회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반 대중들이 열린우리당보다 한나라당을 서민의 정당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는 이러한 대중의 지지철회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지점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실제 대중의 삶을 규정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서는 한나라당과 커다란 차이가 없으면서 4대개혁입법 등을 정략적으로 이용, 그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정치적 지지를 얻고자 하는 노무현정권과 집권 열린우리당의 정치행태가 일반 대중들은 물론 그 지지자들에게조차 식상함과 피로감, 나아가 정치적 반감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열린우리당이 말하는 4대개혁입법은 대중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정치 의제로서의 효과를 상실하여 더 이상 개혁입법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처럼 보인다. 결국 김대중정권 이후 매번 논쟁만 하다가 제대로 된 성과도 없이 끝나버린 ‘개혁이벤트’는 한편으로 열린우리당의 개혁성에 주목한 지지층의 신뢰와 결속력을 약화시키고, 반면 삶에 고통 받는 대중들에게는 개혁혐오증을 내재화시키는 부메랑 효과를 낳으면서 노무현정권과 열린우리당을 나락으로 빠뜨린 것이다.
물론 상황이 이렇다고 하여 이러한 개혁목록들의 역사적 시효가 만료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집권 자유주의정치세력이 이것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그것도 지리하고 소모적인 논란의 과정을 거치며 길게는 10여 년을 끌고 오는 동안 그 소중한 내용과 의미조차 희화되어 버렸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노무현정권, 열린우리당을 ‘무능한 정권, 무능한 정당’으로 인식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도개혁정당’,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임을 내세워 왔던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이 현실 속에서 허구적인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이번 5.31지방선거에서 노무현정권과 열린우리당이 ‘참패’한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어떠한가. 한나라당은 2002년 지방선거에 이어 이번에도 ‘대승’하였다. 한나라당은 자본 등 이 사회의 지배세력, 기득권세력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정치세력이다. 4대개혁입법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시장의 개혁에 대해서도 공공성의 측면보다는 ‘작은 정부’를 핵심으로 하는 국가의 간섭배제 및 규제철폐를 핵심사안으로 삼아 관철시키려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보수정당이다. 세금논쟁에서 보이듯 이들은 감세를 주장하는 듯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법인세 인하 등 자본의 입장에서 그것을 제기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에 대한 대중의 반감에 편승하여 ‘서민경제 파탄’ 운운하며 현재의 양극화 심화를 노무현정권과 열린우리당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 여기서 ‘반사이익’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이익이 단순히 노무현정권과 열린우리당의 내용 없는 사회정책, 혹은 그것의 실패 때문에 결과했다는 측면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4대개혁입법, 사회양극화 해소를 위한 논의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나라당의 정책이 실제 현실화될 때, 현재의 문제들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점, 따라서 그들의 정책이 하나의 의미 있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측면에도 주목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한나라당은 단지 집권당이 아니기 때문에 대중의 주요한 비판의 대상으로부터 비켜나 있을 뿐,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한편으로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그 이면에서 자본과 기득세력들의 이해를 견고히 대변하는 ‘대중영합적인 포퓰리즘’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정치세력의 전형이라 평가할 수 있다.
지금은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척하지만, 집권하면, 그 상처를 너무 긁어 곪아터지게 할 가능성이 농후한 정치세력이 한나라당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일면 한나라당에 대한 대중의 ‘자발적 선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한나라당은 한편으로 노무현정권의 ‘정체성 와해’에 따른 지지대중의 이탈을 ‘무능한 정권’이라는 담론과 연결시키며 그들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 ‘투기열풍과 맞물린 개발열풍’을 대중 속에 조장, 내면화시키면서 자본과 지역토호의 이해를 ‘국민적 담론’으로 만드는데 성공함으로써 이번 5.31선거에서 또 다시 ‘압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5.31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참패’하고 한나라당이 ‘압승’하였다는 평가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열린우리당의 패배 원인을 분명히 하기 위해 다시 한번 숙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획득한 의석비율, 개별 지역에서 나타난 양당 후보들 사이의 현격한 지지율 차이는 ‘참패와 압승’이라는 수사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여전히 해석의 여지는 남아 있다. 이번 지방선거의 전국투표율은 51.2%로 지난 2002년의 48.9%보다 2.3% 높았다. 이런 가운데 이번 선거에서 광역의회 비례대표 득표율의 경우, 열린우리당은 21.2%를, 민주당은 9.7%를 얻었는데, 이를 합한 30.9%는 2002년 분당하기 전 민주당이 얻었던 29.1%와 비교할 때, 오히려 1.8% 증가된 수치이다.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2002년 52.2%와 대동소이한 52.8%였다. 광역단체장 선거 결과 또한 2002년 지방선거와 비교할 때, 당시 민주당이 4석을 차지했는데, 이번에는 열린우리당 1석, 민주당 2석, 도합 3석을 차지하여 1석을 잃었을 뿐이며 한나라당은 이번 선거에서 1석을 더 차지했을 뿐이다. 기초단체장의 경우, 한나라당이 159석으로 2002년보다 19석을 더 차지하였고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은 각각 21석과 19석으로 2002년 민주당의 40석에 비해 4석 줄었다. 국민중심당은 자민련보다 10석이 적은 6석을 차지하였고 민주노동당은 2석을 모두 잃었으며 무소속은 30석에서 5석 준 25석을 차지하였다. 이 결과는 한나라당이 충청지역의 국민중심당, 그리고 무소속 등의 부진을 자신들의 성과로 가져갔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면 지지율의 이러한 양상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의 패배를 ‘참패’로 기록하게 만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선 탈지역주의를 내걸고 민주당에서 분당함으로써 지역주의에 근거한 지지표를 결집할 수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확고한 지역기반이 없는 열린우리당은 호남에서 민주당에, 충청지역에서 자민련의 후신인 국민중심당에게 밀려났고 반대로 이들은 연고지역에서 여전히 일정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 중대선거구제의 단순다수대표제라는 변화된 선거제도가 지역주의 투표와 맞물리면서 지지율 차이에 비해 의석수의 현격한 차이를 결과함으로써 ‘참패하였다’라는 평가를 기정사실화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나라당은 자신의 텃밭인 영남은 물론, 서울과 수도권에서 광역, 기초단체장을 독점한 것은 물론이고 다수의 선거구에서 기초의원 두 명 이상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지난 2004년 총선에서 호남에 기반한 민주당으로부터 분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에 몰표를 주었던 대중들이 다시 이러한 지역주의 투표행태를 반복하며 열린우리당에 등을 돌린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이미 살펴본 바대로 ‘개혁적인 전국정당’,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을 자임한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이 허구였다는 점을 대중들이 삶이라는 가장 민감한 세포로 감지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로부터 찾을 수밖에 없다. 결국 ‘지역주의를 넘어서지 못한 개혁’을 문제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5.31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른바 권력실세로부터 흘러나온 ‘노무현정권=부산정권’ 등의 발언은 탈지역주의를 내세우면서도 그것을 현실 속에서 관철시킬 수 없었던, 그리하여 끊임없는 지지도 하락에 놓여 있던 노무현정권과 열린우리당의 딜레마와 고충을 반증해 주는 것이었다.


3. 진보정치세력의 답보: ‘조합주의적 자족정치’의 한계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구악과 신악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이라면 그들을 넘어 나가고자 하는 진보정치세력은 이번 5.31지방선거에서 어떤 결과를 얻었고 그 결과는 무엇으로부터 기인하였으며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이번 선거에서 진보진영 가운데 가장 커다란 패배를 경험한 세력이 초록정치연대라는데 이견이 없다. 이번 선거에서 초록정치연대는 춘천과 과천에서 각각 1명씩 두 명이 당선되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탈락하였다. 지난 2002년 선거에서 초록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주목받았던 고양과 도봉에서 기존 기초의원들은 모두 재선에 실패하였다. 초록정치연대의 패배는 여러 가지 요인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이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번 선거와 무관하게 초록의 문제는 이제 이 사회 구성원들의 현실적인 삶의 질과 분리될 수 없는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제도의 수준에서 패배의 이유로 거론되는 것이 기초의원정당공천제의 전면 실시이다. 이것은 이번 5.31선거에 참여하고자 했던 비정당정치세력 모두에 해당되는 것으로, 초록정치 또한 기성의 정당들에 인적 자원을 빼앗길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한계로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5.31지방선거를 앞두고 출마가 예상됐던 초록후보자를 포함한 시민운동 출마 후보자가 애초 수백 명에 이르렀으나 실제 출마자는 30명 내외로 축소되었다는 지적은 이를 반증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고민해 볼 것이 있다. 만일 정당공천제에 편승해 기성 정당들, 특히 보수정당들로 갈아탈 정도의 발상과 행태를 지닌 초록후보군들이 있었다면, 이들의 이전은 장기적으로 볼 때, 오히려 초록정치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보수정당들과 초록정치연대는 화합하기 힘든 상이한 가치와 정책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더 중요한 것은 만일 정당공천제로 인해 조직과 자금을 가진 기성 보수정당의 후보들과 경쟁하는 것이 버겁다고 느껴 많은 출마예상자들이 입후보를 포기하였다면, 이것은 여전히 초록정치의 대중적 토대가 미약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선거제도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초록정치연대 패배의 중요 원인으로 꼽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비생산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생태운동진영’의 분화와 각개약진으로 인한 힘의 분산을 원인으로 꼽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번 5.31지방선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 녹색연합과 환경운동연합은 각기 다른 정치적 행보를 보인 바 있으며 2002년 지방선거에서도 이 문제는 반복되었다. 따라서 5.31지방선거에서 초록정치연대의 패배를 생태운동 진영 안의 힘의 분산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것이 일반적 양상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일까. 이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여전히 초록정치가 내세우는 가치와 정책이 대중 자신의 문제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개발주의가 심화되면 될수록 그에 상응하여 초록 가치의 중요성 또한 더욱 제고되리란 발상이 존재한다. 이러한 논리는 80년대 이후 전개된 진보운동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매우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인데, 그것은 ‘노동에 대한 탄압과 억압이 심화되면 대중의 변혁에 대한 욕구 또한 강화된다’라는 논리와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지구화로 인한 자본의 무한경쟁과 맞물려 개발, 성장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 심화되고 있다. 물막이 공사로 일단락된 새만금 방조제 건설은 자본과 권력이 유포하였지만, 개발이 가져다 줄 이익에 대한 환상이 대중적 기대와 맞물리며 극대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번 5.31지방선거에서도 각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선거공약의 대부분은 바로 개발과 자본유치에 대한 공약이었고 이것은 초록의 가치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대중들은 초록이 내세운 가치들, 정책들을 지지하기보다 개발이 가져다줄 이익 혹은 그것의 ‘확산 효과’(trickle down)를 기대하며 개발주의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물론 개발, 성장주의를 주도한 보수정당들도 노골적으로 초록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대중들에게 초록의 가치 혹은 운동은 여전히 배우고 여유 있는 사람들의 것 내지 그들이 하는 운동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름대로 대중적 기반이 있다는 생활협동조합운동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초록의 가치는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 그 때 추구해야 할 ‘숭고한 가치’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실제 생태운동의 여러 갈래들은 상대적이지만, ‘배우고 여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 초록의 가치를 선점하고 있는가에 있다기보다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내용을 가지고 초록정치를 하고 있는가이다. 이런 측면에서 초록정치연대는 여전히 명확한 자기전망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대한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시대에 자본과의 대결은 단지 노동운동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자본은 노동, 환경 및 생태, 여성,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의 사회관계들을 압박하는 거대한 힘이 되어 있다. 흔히 초록운동들이 비판하듯이 노동은 자본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초록운동은 본질적으로 자본과 공존할 수 없는 모순관계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첨예한 대결이 요구되는데도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언술은, 이미 자본과 권력이 더 즐겨 사용하는 말이 되어버렸고 그에 따라 이러한 수사는 자본의 지배라는 현실의 핵심문제를 비껴가는 우회로의 표지판으로서 기능한 지 오래이다.
결국 초록정치 또한 신자유주의 지구화로부터 배제된, 소외된 부문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대에 초록의 가치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들의 삶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설득해 내지 못하는 한, 초록정치는 이번 5.31지방선거에서의 패배와 같은 쓴 맛을 다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제도 안에서 노동자, 서민의 사회정치적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임을 자임하는 민주노동당은 어떠한가. 민주노동당이 거둔 선거결과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현상유지(혹은 약간의 진전)와 패배로 대별된다.
전자는 2002년 보다 증가된 득표율과 더 많은 후보가 광역, 기초의회에 진출하게 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광역비례의 경우 12.1%로 지난 선거에서 거둔 8%보다 4.1% 많은 득표를 하였으며 당선자는 총 81명으로 2002년의 45명보다 36명 늘었다. 물론 2002년에 비해 입후보자가 3배 이상 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흡족한 결과라고 할 수만은 없다. 이와 달리 패배라고 평가하는 쪽은 이른바 민주노동당의 텃밭이라고 하는 울산 광역단체장 선거에서의 패배와 두 곳의 기초단체장 재선 실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아가 애초 민주노동당이 예상했던 300만표, 15% 지지율을 밑도는 결과를 선거패배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울산이 민주노동당의 텃밭이 아니라는 점은 지난해 10.26재‧보궐선거에서 이미 확인된 바, 이것은 패배를 뒷받침하는 의미 있는 논거가 되지 못한다. 이러한 평가는 민주노동당의 위상을 희망에 근거하여 과대설정한 후 그것에 비추어 패배라는 평가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객관적이지 못하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주관적 기대치에는 미달했을지 모르지만, 일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2002년 지방선거, 2004년 총선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일정한 지지기반을 확인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그 내용을 볼 때, 상대적이지만 전국적으로 고른 득표를 보였다는 점, 2002년 지방선거에서 낮은 지지율을 받았던 지역에서 지지율이 상승했다는 점, 민주노동당의 새로운 전략지역이라 할 수 있는 광주, 호남지역에서 선전하였다는 점, 여성이 당선자 가운데 근 40%에 이른다는 점 등은 의미 있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지난해 10.26 울산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제1기 지도부의 사퇴와 과도지도체제의 출범, 뒤 이은 당직선거로 인해 중앙당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선거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결과는 오히려 ‘기대 이상의 과도한 성과물’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이 이번 5.31선거에서 패배하였다고 한다면 그 준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민주노동당이 제도 안에 존재하는 진보정치세력의 대표주자라는 사실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에 비판적인, 혹은 우호적인 정치적 태도의 존재 여부와 무관한 객관적 현실이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은 그러한 위상과 성격에 부합하는 정치를 수행해왔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민주노동당이 이번 선거에서도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 빈곤에 시달려야만 했고 나아가 기존 보수지배의 정치구도 속에서 그것을 넘어설, 의미 있는 정치사업 또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5.31지방선거 전 민주노동당이 실시한 한 조사 결과에서도 확인되었지만, 민주노동당은 정체성의 측면에서 열린우리당과의 차별성을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각인시키지 못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실제 민주노동당의 핵심 지지층이 고학력의 30-40대 화이트칼라층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들이 민주노동당 뿐만 아니라 열린우리당의 지지층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함께 움직인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는 하나의 예로 제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과 달리 노동자, 서민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만들어진 진보정당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중이 열린우리당보다 한나라당을 더 서민적인 정당이라고까지 생각한다는 사실은 열린우리당에게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며 사실 민주노동당에게 더욱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열린우리당은 실제로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정당이지만,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서민을 대변하는 ‘대안정당’, ‘수권정당’임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 등 이 사회 저변의 가장 어려운 대중들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다른 한편 정체성의 흔들거림은 정치사업의 부재로 이어지고 있다. 이 문제는 그 동안 수 없이 지적된 민주노동당의 정파문제, 지도력 빈곤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진영의 단결과 연대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의미 있는 행보도 취하지 않았다. 이른바 ‘좌파 안의 좌파’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제도 안의 사회당, 시민사회운동진영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크게는 그들과 어떻게 연대하여 보수정치세력에 대항할까라는 ‘헤게모니 전략’이, 작게는 ‘선거대책’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득표율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진보정치가 지향해야 할 그 어떤 정치사업의 전형도 제시할 수 없었다. 이것이 지난 5.31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승리, 패배를 거론하기 이전에 진보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이 또 다시 노출한 가장 커다란 취약점이며 한계이다.
지금 민주노동당은 대안정당은 차치하고 수권정당으로서의 위상 또한 포기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진보진영의 단결, 지지를 끌어내지 못하는 이상, 민주노동당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혹시 기우에서이지만, 그 공백을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심화 속에서 그것과 대면하기보다 틈새시장을 찾아 살아남고자 고심하는 주류 시민운동진영이 메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정치적 행보는 그나마 불투명한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을 하향조정하라는 직간접적인 요구, 압력과 맞물려 진행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처럼 5.31지방선거 결과에 직면하여 대중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보수정치세력들의 압승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른바 그들을 넘어서겠다고 공언하면서도 조합주의적 정치행태를 반복하는 진보정치세력들의 모습이다. 거기에서 진보정치의 미래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초록정치연대나 민주노동당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한 때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해 열정적이었던 희망사회당은 지금 어떠한가. 이 질문은 장애인 등 소수자들 스스로가 자기목소리를 내도록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희망사회당의 존재와 그 가치를 폄훼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특정정당과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하지 않겠으며 대리주의와 선거주의를 넘어서겠다고 공언한, 그리하여 실제 5.31지방선거를 보이콧한 노동자의 힘은 어떤 존재인가. 지금 그들의 경계 너머에 있는 대중들은 정치를 하고 있는 그들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4. 제도정치의 위기에 대항한 진보정치의 재구성: ‘한국형 제3의 길’ 넘어가기

이번 5.31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압승과 열린우리당의 패배는 ‘제도 정치의 위기’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물론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해도 이러한 진술은 커다란 수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들 보수정치세력들은 문제해결집단이라기보다 문제유발집단이고 결국 그로부터 야기되는 고통과 부담은 노동자를 포함한 대중들이 부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초록정치연대, 민주노동당 등의 패배, 여타 진보정치세력들의 의미 있는 정치적 행보의 부재는 이 위기의 해소, 극복 가능성을 더욱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이미 초록정치연대나 민주노동당 등이 실제 대중적인 기반을 갖추지 못하였거나 혹은 조합주의적인 정치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첫째, 초록정치,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치세력, 나아가 급진적인 계급운동세력은 여전히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변증법에 대한 이해를 실천적으로 체화하지 못하고 있는 바, 이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운동정치와 제도정치는 권력관계를 포함한 비대칭적이고 억압적인 사회관계들을 해소, 극복하기 위한 수단들이다. 물론 기성 제도의 매개 여부에 따라 양자의 작동 메커니즘은 상이한 양상을 노출하지만.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운동정치와 제도정치 양자를 대립시키면서 그것을 화해할 수 없는 선택지로 몰고 가는 것은 결국 이들 수단을 목적으로 격상시키는, 따라서 권력 자체를 목적으로 만드는 행태로, 그것은 80년대 이후 진보운동이 경험해 왔던 오류를 되풀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제도정치와 운동정치 사이에 높은 경계를 쳐 놓고 제도정치 자체를 목적시하는 보수정치와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진보정치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좌파 안의 좌파’니, ‘개량 정당’이니 하면서 소통을 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분법의 경계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발상과 행태가 만들어낸 적지 않은 폐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경계를 허물려 하지 않고 서로 비판만 하며 순결성 경쟁을 한다면 그것은 정치를 도덕으로, 혹은 관념으로 만드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결과 그 속에서 진보정치의 주체이자 대상인 노동자 등 대중은 더욱 소외되고 그들의 고통은 해소되지 않은 채 더욱 확대, 심화될 것이다.
둘째, 신자유주의 지구화시대에 제도정치는 무엇보다 자본의 가치증식에 복무하는 기능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 이런 의미에서 정치의 사유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사유화된 정치의 공공성을 복원시키는 것이야말로 진보정치 본연의 과제이다. 공공성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 규정되어 긴장 관계에 놓여 있는 사회세력들에 대한 불편부당, 사회구성원들의 최소 합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진보정치가 추구하는 공공성은 비대칭적이고 억압적인 사회관계들 속에 있는 대중의 고통과 요구를 자기 문제화하여 그것을 해소,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핵심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것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이라는 민주주의의 심화를 목적으로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동일성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으로 이 관점에서 보면 민주주의는 결코 고정될 수 없다.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에 구조적으로 양산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지지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것도 이러한 맥락 위에서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공성의 강화, 즉 민주주의의 확장은 단지 제도정치 안에서,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여타 보수정치세력들과 경쟁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제도정치를 다시 대중의 비판과 참여에 노출시키고 연결시킴으로써 가능해 진다. 특히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정치의 사유화로 표현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총체적 공세를 다른 한 면으로 하여 관철되기 때문에 그것이 확장되면 될수록 제도정치는 대중에게 더욱 유명무실한 기제로 된다. 지금 이 시대에 ‘거리의 정치’(street politics), ‘거리의 민주주의’(street democracy)가 활성화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적이고 직접적인 대중동원의 차원을 넘어 제도정치의 영역으로부터 배제된 대중의 비판과 요구를 사회정치적 의제, 결국 공공의제로 전환시킬 수 있는 새로운 메커니즘의 구비와 작동에 대한 고민을 진보정치세력에게 핵심과제로 던져주고 있다.
셋째, 초록정치, 민주노동당 등은 ‘더 좋은 정당’을 만들기 위해, 혹은 그것으로 거듭나기 위해 내외의 요구와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민주적인 구조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런저런 내부 민주주의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급진적인 비제도 진보운동조직 또한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일단 조직이 만들어지면, 굳이 관료주의, 소수세력 배제 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수정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경우를 보면 쉽게 확인되는데, 지난 2기 지도부의 당 대표선출을 위한 결선투표 와중에서 드러난 부정 문제가 당 안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은 내부 구조의 비민주성, 관료성, 그에 따른 지도성 빈곤이 당을 어떤 모습으로 전락시키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당내 민주화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제 민주노동당의 자정능력 또한 외부의 비판에 노출될 때만이 제고될 것임을 시사하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진보정치세력들은 ‘진보정당의 생명력’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가라는 기초적인,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들리는 이러한 지적들은 무엇으로 집약되는가. 그것은 제도와 비제도에서 수행되고 있는 진보정치의 민주성 강화와 연대의 문제로 모아진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대중참여, 대중투쟁을 매개로 해서만 실질적 의미를 담보할 수 있는데, 그 위력은 미시적으로는 지난 5.31지방선거 당시 과천시 가선거구에서 나타난 성과, 그리고 거시적으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미FTA 반대투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과천에서 5.31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노동당과 초록정치연대의 경선을 통한 단일후보 추대는 당선이라는 결과로 이어진 것을 넘어 지역정치에서 진보진영이 어떤 정치적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인지를 보여준 의미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즉 조합주의를 넘어서는 연대와 헤게모니정치를 향한 진보정치의 상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다른 한편 지금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는 한미 FTA반대투쟁은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맥락에서 수세에 처해 있는 진보정치세력의 연대투쟁이 어떠한 내용과 형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투쟁에는 진보정당, 급진적인 운동정치세력, 시민운동세력, 노동조합, 문화단체, 학술교육단체, 의약단체 등 다양한 성격과 위상을 지니는 정치세력들, 사회운동조직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반대라는 맥락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정치세력들에서부터 한미FTA가 관료주의에 의해 졸속으로 추진되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에 이르기까지 그 목표도 다양하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이 투쟁의 결과가 어떤 질의 내용을 담보하게 될지 예단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투쟁 자체가 지니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은데, 그것은 이러한 연대투쟁을 통해 공유점과 차이를 서로 확인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양하기 위해 공동으로 모색하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결국 진보정치를 재구성하기 위한 객관적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미FTA 반대투쟁은 이 사회구성원들의 삶이 민주주의, 진보와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육장이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몇 가지 원론적이지만 중요한 문제들을 다시 환기시키는 것은 진보정치세력이 구조적인 수준에서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대응해야 할 뿐만 아니라 5.31지방선거 이후 대선이라는 권력재편기를 앞두고 진행되는 정치적 흐름에도 민감히 반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최근 ‘반보수, 비좌파’를 모토로 내걸며 등장한 ‘한국형 제3의 길’인데, 그 이유는 이 발상의 기저에 ‘좌파고립’이라는 목표가 은연 중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발상은 그 주체들의 인식,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신좌파’의 등장, 그리고 그들과의 양강 구도의 정치를 갈구하는 이른바 신우파(new right)에 대한 화답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속가능한 진보(sustainable progress)’를 화두로 하는 이들은 참여-연대-생태의 가치 추구, 분권-혁신-통합 정책의 실천, 공정한 시장경제의 실현, 경제성장과 사회통합의 추구, 혁신주도의 내생적 지역발전, 국가지상주의와 시장만능주의의 극복, 사회적 대화와 사회적 합의의 추구, 공정한 글로벌화의 추구 등을 내세우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그동안 시민사회운동의 다양한 영역에서 제기된 의제들을 한데 모아 놓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과연 철 지난 것으로 여겼던 이 ‘제3의 길’이란 무엇인가. 지금 횡행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그 하나의 길이라면, 이들이 상정하고 있는 ‘또 다른 하나의 길’은 무엇인가. 이 발상이 함축하는 ‘제2의 길’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그 어떤 과거의 발상과 실천’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제3의 길’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스스로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지금 이 사회의 다양한 영역의 관계들을 재구성하는, 대중억압적인 지배권력, 이념을 상징하는 반면, 사실 ‘그 어떤 또 하나의 길’은 지금 그 자체가 매우 유동적인 어떤 것들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일 상황이 이러하다면, 즉 ‘그 어떤 제2의 길’이 대중 억압적인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신자유주의 길과 동일한 수준에 놓고 비판하며 등장한 ‘제3의 길’은 존재근거가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객관적 현실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만일 ‘제3의 길’을 계속 역설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효과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이 발상은 그 주체들이 강조하듯 ‘지속가능한 진보’를 재구성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것은 권력교체기를 앞두고 파산된 ‘개혁자유주의’를 다시 구해내기 위한 ‘비판적 지지론’의 변이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발상이 잡다한 사회경제적 과제들, 특히 화해불가능한 것들로 보이는 목록들을 나열해 놓고 주객관적인 조건들에 대한 검토도 없이 ‘사회협약’에 의해 그것이 실현가능한 것처럼 희원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발상이 목표로 하는 효과는 이들 스스로가 진보와 민주주의의 주체일 수 없다는 점에서 ‘반보수’보다는 ‘비좌파’라는 범주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 지금 존재하지 않는 ‘노동의 헤게모니’에 반대하거나 비우호적인, 혹은 그것이 실현될까 불안해하는 잔여의 여타 시민사회운동세력을 ‘제3의 길’로 묶어세우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운위하는 ‘좌파’는 다양한 맑스주의자, 자율주의자, 소수자를 주체이자 대상으로 하는 민주주의 논의 등 진보적 발상을 통해, 거시적 혹은 미시적 정책들이 맞물리면서, 그리고 이를 매개로 다양한 영역에서 전개되는 실천들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도 재구성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현실을 무시한 채, ‘제3의 길’이 ‘과거 그 어떤 하나의 좌파’를 지금의 좌파일반으로 치환시켜 비판한다면, 자칭 미래지향적임을 내세우는 이 발상은 오히려 ‘과거에 사로잡힌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런 흐름에 대응하여 이른바 ‘좌파’를 포함한 진보진영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국형 제3의 길’이라는 발상은 신자유주의 지구화 반대를 운동의 중심으로 삼아야 할 진보진영의 입장에서 볼 때, 결국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장애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반(反)신자유주의야말로 지금 ‘좌파’, 진보진영의 핵심적인 목표인데, ‘제3의 길’은 ‘비좌파’를 내걸면서 ‘과거 좌파의 모습과 기억’을 불러내어 ‘현재 좌파의 고립’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 발상은 이른바 신우파와 통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 어떤 고립전술도 연대를 통하지 않고는 넘을 수 없다. 진보진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반대, 전쟁반대를 포함한 평화체제 구축, 초록가치의 실현을 모토로 제도 안에서, 제도 밖에서 좀더 적극적인 연대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연대의 구성 과정에서 미리 배제의 경계를 그을 필요도 없다. 혹시라도 ‘제3의 길’이 이에 동의한다면 그들과의 연대 또한 부정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모든 것은 대중적인 실천을 매개로 한 논의를 통해 검증되고 걸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신자유주의 세계화, 평화체제 위협, 초록가치의 수단화 등을 통해 대중을 고통과 불안에 빠뜨리는 국내외 사회정치세력들과 대결하는 것을 주저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보다 더 큰 장애가 진보정치세력 내부에 존재하는가. 이 시점에 운동정치와 제도정치를 분리, 대립시켜 연대를 마다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또 다시 지난 5.31 지방선거 때처럼 ‘자신들의 경계’만을 고집하면서 결국 대중을 수구보수정치의 그늘에 던져두고 또 다시 미래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자괴할 것인가.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론의 빈곤, 대안의 부재’가 아니라 진정 스스로의 경계를 넘어, 조합주의적 틀을 벗어던지고 고통 받는 대중과 함께 나아갈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전히 불투명한 미래에 직면하여 먼저 그러한 경로를 밟아 나가는 것이 너무 큰 정치적 부담이 되기 때문인가.
하지만 그 부담이 아무리 크더라도 바로 거기에 단순한 집권의 길을 넘어서는, 진보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헤게모니 정치세력이 가야할 미래의 길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려질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