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사상과 행동에 큰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뒤죽박죽의 배후에는 민중을 억압하려는 우파 이데올로기가 숨어있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엉뚱한 용어가 등장했고, 기득권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독재정부가 통일운동을 추진하더라도 그것은 역사적인 진보라는 사상도 등장했으며, 재벌을 앞장세워 세계시장을 정복함으로써 우리나라 경제와 국민을 잘 살게 해야 한다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전략이 더욱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 실업자 특히 청년층의 실업자가 많고 중소기업들은 몰락하고 있으며 비정규직은 낮은 임금수준과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허덕이고 있고 농민들은 농산물의 시장개방으로 큰 타격을 받고 있어 현재의 사회경제체제를 타도할 수 있는 민중의 분노는 불타오르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민중을 더욱 희생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파하려는 사이비 진보 이데올로기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영국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1929년 총선에서 집권한 노동당의 맥도날드 수상은 세계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실업수당을 크게 삭감했다가 노동당으로부터 쫓겨났으며, 1974-75년에 폭발한 세계공황에서는 노동당이 노동조합에게 실질임금을 삭감하는 사회협약을 3년 동안 강요해 실시하다가 1979년 총선에서 대처의 보수당에게 지고 말았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크게 대립하고 있는 사상을 예로 든다면, 첫째는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는가, 기득권자의 이익을 옹호하는가이고, 둘째는 남북통일을 지향하는가, 또는 저해하는가이며, 셋째는 민주주의를 확대하는가, 또는 축소하는가이다. 흔히 말하는 좌파와 우파, 또는 좌경화와 우경화의 대립은 첫째의 사상적 대립을 가리킨다. 최근 “민중의 이익이나 기득권자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앞세워야 한다.”는 국가주의가 사이비 진보층에서 크게 대두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상 기득권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의 사상적 대립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정부의 한반도 전략을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의 문제, 나아가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와도 관련을 맺고 있다. 셋째의 사상적 대립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확대하는가, 축소하는가의 문제 이외에도 사회적 민주주의(복지국가의 건설)와 경제적 민주주의(기업운영에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하는 것)를 실현하려고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도 포함하고 있다.
위의 세 가지 사상적 대립 속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상은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남북통일을 지향하고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사상일 것이고, 가장 보수적인 사상은 기득권자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남북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축소하는 사상일 것이다. 그 사이에 상당히 폭넓은 각종의 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사상적 대립을 세 가지로 한정하지 않고 더 많은 영역으로 확장한다면 사상의 다양성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개인이나 어느 집단의 ‘정체성’을 한 마디로 뭉뚱그려 규정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그리고 더욱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첫째 또는 둘째, 셋째의 사상적 대립이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또는 원초적으로 규정한다는 주장들이다. 예컨대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 남북통일을 추진하는 것,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것 중 어느 하나가 다른 두 개를 해결하는 열쇠를 쥐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보수층이 아니라 진보층이 진지하게 제기하면서 진보층의 적전 분열을 유도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의 사상적 대립 속에서 먼저 몇 가지 해명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로 민중의 이익이나 기득권자의 이익보다 앞세워야 한다는 ‘국가의 이익’은 무엇인가? 국가는 각종 특수기구들과, 그 기구를 통해 공적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엘리트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엘리트가 누구를 위해 또는 무엇을 위해 국가권력을 어떻게 행사하는가이다. 자본가계급이 정치․경제․문화의 모든 면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국가엘리트가 외형적으로는 각종 이해대립의 중재자 또는 선의의 제3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득권자인 자본가계급의 이익에 봉사한다. 물론 국가가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지만, 이것은 국가가 자본주의체제를 유지 옹호하기 위해 자본가계급의 단기적 이익을 희생시키면서 민중의 요구를 일정한 범위 안에서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예컨대 노동조합의 결성권, 단체협약권, 단체행동권을 법률로 보호하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 국가의 이익은 기득권자의 이익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우리는 국가(the State)와 나라(country)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국가의 이익을 국민 전체의 이익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지만, 각양각색의 이해관계를 가진 국민 전체로부터 어떻게 공통의 이익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기득권자들과 그들의 대변인은 국민 전체의 이익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사실은 이것은 기득권자의 이익을 감추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박정희 체제를 찬양하는 학자들은 박정희 정권이 대내외의 이익집단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어서 국가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박정희 정권은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를 확립하려고 노력한 것일까? 미국 정부가 주한 미군과 한국 군대의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의 군사원조와 경제원조가 아직도 국가 재정의 큰 기둥이었으며,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미국 정부의 호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박정희 정권의 대외적 자율성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광범한 민중을 지지기반으로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재벌에 더욱더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국가의 이익은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가리킨다.
둘째로 정치적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과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은 동일한 것인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가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대에 기여하기 때문에 자기를 좌파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자본가계급을 위해 실업자와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농민을 희생시키는 것은 우파이지 좌파가 아니다. 참여정부의 고위층은 영국의 대처수상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대처수상은 신자유주의를 처음 체계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자본가계급을 위해 가장 크게 봉사한 극우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대처는 1979년 집권하면서 노동조합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재정금융긴축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기업들을 도산시켜 실업자를 양산했고, 1984년 ‘비경제적인’ 탄갱의 폐쇄에 반대하는 광부노조의 파업에 1년 동안 대결함으로써 광산업과 광부들의 가정을 파탄시켰고 파업자들과 파업 이탈자 사이의 갈등을 고조시켰으며 새로운 광부노조를 설립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노동조합운동은 크게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 전체적으로 볼 때 경제성장률은 오히려 저하했고 실업률은 오히려 상승했으며 이자율과 물가상승률도 상승했다. 결국 ‘깡패’ 대처는 1990년 동료 국회의원들의 배척에 의해 당수 자리와 수상의 자리를 빼앗겼던 것이다.
셋째로 재벌을 앞장세워 세계시장을 지배하게 함으로써 한국경제를 부흥시킨다는 아이디어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한국계 초국적 자본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것을 찬양한다면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지배한 것과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온갖 압력을 넣는 것도 ‘당연하다’고 체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재벌은 한국의 땅에서 이윤을 낼 수 없다면 언제나 한국의 땅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사실 다수의 재벌이 생산과 금융의 중심지를 외국으로 옮기고 있다. “외국자본의 경쟁으로부터 재벌을 보호하자.”는 주장에는 재벌이 한국의 정부나 국회의 요구에 순응하여 국민들을 위해 자기의 이익을 희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있지만, 외국자본이나 재벌 모두 자본의 가치증식을 위해 행동한다는 점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 재벌이라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가, 재벌이라고 회계의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가, 재벌이라고 정치권에 뇌물을 주면서 흥정하지 않는가, 재벌이라고 노동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가! 재벌의 대외팽창을 위해 민중이 희생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도대체 경제성장이나 경제발전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재벌의 수출 증대와 대외팽창을 위해 임금수준을 인하하고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며 정규직이 비정규직으로 강등되고 노동운동을 삼가며 민중의 생활을 희생해야만, 즉 민중이 점점 더 희생해야만 재벌이 수출을 더욱 더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내수시장이 점점 더 좁아져서 더욱 더 수출 증진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또 나올 것이다. 이리하여 수출의 증가와 민중생활의 저하가 악순환을 이루게 될 것이다. 수출과 경제성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넷째로 노동자를 모두 비정규직으로 만들고 임금수준을 낮추고 자본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임금노예’로 만든다고 고용이 얼마나 증가할 것인가?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의 10대 경제대국이기 때문에 단순반복노동에 걸맞은 노예 같은 노동자는 사실상 크게 필요 없다. 정보통신산업과 같은 첨단산업은 창의력이 있고 재기발랄한 노동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임금노예를 만들어 고용을 증가시키려는 정부의 시도는 성공할 수가 없다. 외국자본도 노예를 원하지는 않는다. 또한 내수시장이 부족하다고 거대한 규모의 신용불량자를 만든 나라에서 임금수준을 삭감하면 내수시장이 더욱 축소되는 것을 왜 모르는가?
심각한 장기불황을 민중의 희생 위에서 탈출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렇게 하다가는 결국 전쟁을 통해 기득권자와 민중이 모든 것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미국의 부시 정권이 계속 이곳저곳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장기불황을 민중의 희생위에서 탈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민중이 들고 일어나 새 사회 건설 연대를 구성하고, 재벌과 대기업을 국민들의 소유로 전환시키며, 정부를 민중의 정부로 갈아 치우자! 주어진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생각하지 말고 자본주의체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체제를 모색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