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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적 불평등, 신보수정권 시대의‘복합적 반신자유주의 정치’
 새로운 보수체제의 성격과 대응실천에 대한 급진민주주의적 시각

진보평론  제36호
조희연󰋯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소장

1. 머리말

2008년 4월 9일 총선결과를 보면서 필자는 “어느 정치집단도 다 자기 방식대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선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수당이 된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조경태·최철국 후보의 예에서 보듯이 호남 이외의 전국 전지역에서 당선가능성을 확인한 통합민주당, 공천탈락자들을 가지고 박근혜의 이미지에 기대어 선전(善戰)한 친박연대, 여당실세를 꺾고 당선되고 비례대표 의석까지 획득한 창조한국당, 권영길·강기갑 후보가 지역에서 당선되고 5.8%의 정당지지를 획득한 민주노동당, 비록 3%진입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조봉암 이후 50년만에 수도권에서 노회찬·심상정 의원의 당선가능성을 확인한 진보신당, 심지어 아무 배경 없이 돈만 내고도 비례대표에 당선될 수 있는 ‘돈만 가진 비례대표 후보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선거였다.
2007년 12월 대선은 이명박 후보의 압도적인 승리이고 그 승리로 새로운 보수지배의 시대를 맞이하였지만 그것의 ‘때 이른’ 내적 균열과 모순은 우리 사회에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총선 이후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2008년 4월 미국 FTA관련 쇠고기협상의 타결은 130만명이 넘는 ‘이명박 대통령 탄핵 인터넷 서명’ 사태를 유발하였고 2만명이 모이는 촛불집회를 촉발하였다. 이는 투표자 중 50%를 넘는 지지로 당선된 이명박 정부의 출범이 ‘안정적인’ 보수정권 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다양한 균열을 드러내는 ‘위기의 시대’의 개막이며 저항진영의 실천 여하에 따라서는 다양한 경로를 밟을 수 있는 시대의 개막임을 뜻하는 것이다. 촛불시위는 이명박 정부 시대의 위기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생각된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절망의 심정’이 아니라 ‘희망의 심정’으로 새로운 고민을 해야 하는 소이가 있다.
단적으로 필자는 한국사회는 지난 20년 동안 자유민주주의적 개혁단계를―상대적으로―‘성공’적으로 거치면서 이제 한 단계 높은 사회진보의 단계―필자는 이를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적) 민주주의’ 개혁단계로 표현한다―로 가는 병목지점에 직면했다고 생각한다. 즉 한 단계 높은 민주주의와 사회진보의 단계로 이행해야 하는 병목지점에 도달했는데, 그 병목지점을 ‘돌파’하지 못하고―구(舊) 보수세력이 변형된 형태로 재집권한―새로운 보수정권 시대라고 하는 우회로(迂廻路)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는 79년 박정희의 죽음 이후 한국사회가 민주화 이행의 경로로 곧바로 직행(直行)하지 못하고 신군부정권이라고 하는 우회로로 들어섰던 것과 유사하다. 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우회로에서 ‘도약의 동력’을 갖게 된다.
이 글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의 새로운 ‘균열지점’들을 분석하면서 우리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기 위해서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가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런 견지에서 이 글은 87년 이후의 민주개혁 국면, 그리고 이명박 정부 이후의 새로운 상황의 구조적 의미를 분석하면서, ‘급진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이명박 정부 시대의 급진진보세력 혹은 넓은 의미에서의 좌파세력의 과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2. 이명박 정부의 구조적 성격

이명박 정부의 성립은 97년 체제의 전환의 의미를 갖는다. 이명박 정부의 성립은 국민정부와 참여정부 하에서 긴장 속에서 결합하고 있었던 ‘신자유주의적 경제와 민주개혁적 정치의 모순적 결합’이 해체되고, 신자유주의적 경제와 그에 잘 조응하는 신보수정치(신우파정치)의 결합이 출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적 기조는 이미 국민정부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예컨대 문민정부에서의 세계화 국정기조의 등장과 우루과이라운드에의 참여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국민정부와 참여정부를 관통하며 이러한 기조는 정부와 정당의 기조로 광범위하게 삼투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개혁적 정치에 의해서 제한되거나 복합화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민주개혁적 정치와 신자유주의적 기조 간에 긴장도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명박 정부 하에서 양자 간에 긴장과 모순이 없어지면서, 신자유주의적 기조는 더욱 전면화하고 대중들의 수준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라고 할 때 한편에서는 시장 경쟁원리를 전사회의 지배적인 운영원리로 만들고자 하는 시장절대주의(market fundamentalism)적 지향과 다른 한편의 전면적인 개방화 지향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절대주의적 지향과 개방화 지향을 두 축으로 하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기조를 이명박 정부는 더욱 전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서구에서 신보수세력이 계급권력을 회복해 가는 과정과도 자못 유사한다. D. Harvey(2007: 1장)에 따르면 6·70년대의 ‘계급타협체제’로 인하여 ‘착근된 자유주의(embedded liberalism)’가 성립하였다. 국가는 적극적으로 산업정책에 개입했고 다양한 복지체계(보건의료, 교육 등)를 구축함으로써 사회적 임금을 위한 표준을 설정하려고 했다. 이것은 시장과 기업활동이 사회적·정치적 제약과 규제에 둘러싸이게 되는 것이었는데,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러한 제약으로부터 자본을 탈(脫)착근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70년대 이후 경제적 위기 속에서 균열을 맞게 되고 이에 기반하여 보수세력이 스스로의 계급권력을 회복하여 탈착근을 위한 친자본적 정책을 취하기 위한 대반격이 바로 신보수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조희연, 2004: 226).
한국의 경우에도 87년 6월 민주항쟁이라고 하는 민중적 저항에 의해 한국사회가 민주주의 이행의 도정에 들어서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조직적·정치적 발전, 대중들의 사회경제적 요구의 수용 등이 일정하게 진전되었다. 이것에 대한 보수세력의 대반격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대중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강렬했고 한국경제의 전반적인 호조가 민중적 요구의 수용을 위한 경제적 공간을 유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의 자본세력과 보수세력은 국민정부와 참여정부 하에서의―제한적이나마 ‘제도화’를 수반하는―민주개혁적 정치의 확장, 그 과정에서의 제한적인 사회정책의 확장(예컨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등의 제정)에 의해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다른 한편에서는 97년 경제 위기 이후 상대적인 한국경제 호조건의 퇴조, 개방화 이후의 자본의 축적기제의 전반적인 재조정, 세계경제의 불안정 등에 의해서 위기의식을 갖게 되면서 계급권력의 회복을 위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개발독재의 전략적 지원을 받으면서 이미 크게 성장해 있는 경제적 자본가계급의 물적 기반, 강력한 보수적 언론권력의 대중적 영향력 등에 힘입으면서 반격이 성공하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출범한 이명박 정부의 성격에 대해서 논의해보기로 하자. 필자는 이명박 정부를 한국형 권위주의적 신보수정권으로 규정한다. 신보수정권은 6·70년대의 박정희 식 개발독재를 구(舊)보수정권으로 하는 대칭규정이다. 당연히 구보수 정권과 신보수정권은 차별성과 연속성을 갖는다. 차별성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신보수는 기산업화 단계의 개발독재와는 ‘구별’되는 ‘포스트-독재 정부’이고, 또한 신보수는 반북(反北)적 보수나 냉전적인 안보형 보수와는 구별되는 시장형 보수 혹은 신자유주의적 보수가 그 특징이다. 구보수가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신보수는 시장자율주의와 개방주의를 표상한다. 정치적 측면에서, 신보수는 독재정권 시대의 특징인 ‘독재 대 반독재’, 민주화 국면에서의 ‘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세력의 집권을 의미한다. 2004년 탄핵사건이나 2006년 9월 태국에서의 군사쿠데타가 역설적으로 독재 대 반독재, 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를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면 신보수의 등장은 과거의 ‘독재 대 반독재’ 구도에 대해 ‘해체적’ 효과를 동반한다. 반대로, 연속성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개발독재적 보수·반(反)개혁적 보수를 계승하는 정치세력이 집권당으로 재복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신보수는 구보수의 가장 핵심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개발주의’와 ‘성장주의’를 새로운 형태로 정확히 계승하고 있다. 또한 신보수는 탈규제와 시장자율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구보수의 ‘친기업주의’, ‘친자본적 성격’을 정확히 계승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6·70년대 초기산업화 단계에서는 한국의 기업과 자본들 스스로의 물적 기반이 취약했다. 그래서 개발독재의 막강한 국가지원을 선호했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수출 및 성장을 확대하는데 개입해주기를 바랐다. 박정희식 개발독재국가는 대기업과 자본이 ‘자기발로 서지’ 못하고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성장해야만 했던 ‘원시적 축적’ 단계의 친기업주의에 부응하는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발독재의 지원으로 성장한 한국의 대기업과 자본은 이제 스스로의 물적 기반을 확충한 상태에서 자력으로 중소자본과 시민사회를 통제하고자 하며 국가적 지원 없이도 글로벌 자본축적을 수행하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이처럼 대기업과 자본의 변화된 조건에 부응하는 새로운 친기업주의를 구현한다고 할 수 있다. 친기업적 성격과 친자본적 성격은 연속되고 있다.
한국의 신보수정권은 지구화 시대에 전지구적으로 지배적 지위를 갖는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지향과 기조―작은 정부, 공공부문의 해체와 민영화의 확대, 국가 실패의 명분 하의 시장자율의 확대, 비정규직화를 포함하는 노동시장의 유연화, 탈규제, 국제경쟁력 강화, 경쟁원리의 전사회적 확산, 사회정책을 주변화하는 경제정책의 중심성 등―를 전면화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이명박 정부를 ‘신자유주의적 경쟁국가’로 그 국가론적 성격을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J. 히르쉬는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출현한 민족적 경쟁국가(national competition)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B. 제솝은 슘페터적 근로국가(Schumpeterian workfare state)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복지국가가 수요측면에 개입하였다고 한다면, 이제 공급측면에서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국가의 적극적인 선도와 혁신 지원 기능이 전면화된 국가를 선보이고자 할 것이다. 한국의 신보수정권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지배적으로 존재하는 포스트-복지국가의 일반적 성격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3. 보수정권의 유형적 차이와 내적 모순

‘한국형’ 신보수정권 혹은 신우파정권은 서구의 신보수정권과 비교할 때 유형적 특수성을 갖는다. 먼저 한국형 신보수정권은 복지국가를 전제로 하여 그것을 비판하면서 80년대 이후 출현하는 서구 신보수정권과 차이를 갖는다. 즉 ‘포스트-복지국가적’ 신보수가 아니라 ‘전(前) 복지국가적 신보수’인 것이다. 서구의 신보수정권은 사회민주주의시대의 문제점을 ‘복지병’, ‘산업공동화’, ‘과부하 국가’ 등으로 진단·비판하면서 출현했다. 사민당 정부 스스로도 ‘복지 요구의 확대와 그것을 충족시킬 조세 기반 간의 괴리’라고 하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존재한 적도 없는 복지국가, 또는 제대로 된 복지정책을 취한 적도 없는 중도 자유주의정부를 ‘좌파사회주의정부’로 비판하는 우파의 이데올로기적 추동력을 바탕으로 신보수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것은 6·70년대 복지국가를 통한 자본주의의 ‘개량화’가 진전된 상태의 신보수정권과 다르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민주노총 내부에서 온건파가 리더십을 가져도 자본으로부터 아무 것도 양보 받을 수 없는 ‘비타협적인’ 자본과 대면해야 한다. 이것은 구 보수정권도 그랬던 것처럼, 신보수정권도 대중의 체제 개량적 포섭의 가능성이 제한되고 그만큼 불안정할 것임을 말해준다.
둘째, ‘한국형’ 신보수정권은 ‘신국가주의’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전지구적으로 존재하는 글로벌 신자유주의는 개별 국가 내의 계급적·사회적 역관계에 따라 상이하게 구현된다. 신자유주의적 국가라고 하더라도, 북구형의 ‘신조합주의적 유형’, 영미 식의 ‘순수 신자유주의적 유형’, 동아시아의 신국가주의적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Peck). 한국형 신보수정권은 동아시아의 ‘신국가주의적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신보수가 시장자율과 자율경쟁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개발독재적 국가개입주의의 관성과 친자본적 국가개입, 경부운하와 같은 친자본적인 대규모 국가프로젝트의 개발 등과 결합하면서 복합적 특성을 가질 것임을 말해준다.
셋째, 신보수정권은 동아시아적 친미주의에 의해 규정된 특수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전후 냉전체제 속에서 상대적으로 친미주의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지역이 바로 동아시아인데, 이런 조건 때문에 좌파적·급진적 대안의 사회심리적 공간이 제약되어 있다. 그 결과 인종적·사회적으로 동질적이고 잠재적이지만 강력한 평등주의적 지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좌파적·급진적 대안이 대중 수준으로 부상하는 것을 제약한다. 이는 중도자유주의 개혁정부의 붕괴가 남미에서 좌파적 경로를 열었던 것과는 대비된다. 이처럼 대중의 평등주의적 지향이 급진적 지향으로 표현되는 것이 제약된 조건에서, 거대한 계급적·사회경제적 기득권세력의 조력을 디딤돌로 하여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부응하는 신보수정권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넷째, 서구와 달리 한국형 신보수정권은 ‘보수적 도덕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으며, 가족의 역할 확대가 아니라 ‘사회의 역할 확대’가 요구되는 사회적 기반 위에서 성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구에서 신보수는 이전 시기의 국가 실패를 강조하고 ‘큰 정부’를 축소하여 작은 정부를 구현하고자 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한편에서는 시장 역할 확대와 다른 한편에서는 ‘가족의 강조’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보수적 도덕주의’를 동반한다. 동성애나 낙태 반대 같은 것이 우파를 결집시키는 도덕적 이슈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한국의 신보수정권은 ‘도덕성이 밥 먹여주냐’라는 식의 ‘탈(脫)도덕적 경제주의’로 무장하고 있다.
또한 사회복지가 미발달된 조건에서 한국의 가족은 ‘과부하’ 상태에 있다. 97년 경제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경제적 양극화로 인하여 많은 중하층 가족은 사회의 부담을 이전보다 과도하게 떠안게 되고 그 부담으로 인해 해체 위기가 커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신보수정권은 ‘가족의 역할’ 확대가 아니라 ‘사회의 역할 확대’를 요구받는 조건 위에서 성립하고 있다. 여기 신보수정권의 딜레마와 위기가 존재한다. 이명박 정권의 최대의 화두가 경쟁이라고 할 때, 이러한 경쟁의 논리가 더욱 전면적으로 대중들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 확대될 것이다. 이는 예컨대 사교육비의 증가가 한국의 가족을 충분히 위기 속에 몰아넣는 것처럼, 대중들의 삶에서 해체적 위기를 동반하게 될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한국의 신보수정권은 상이한 국가-시장-시민사회-가족관계 위에서 작동하고 구현된다.
다섯째, 한국의 신보수정권을 성립시킨 대중들의 요구가 단지 보수적 요구만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라고 하는 중도자유주의 정부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에 기초하여 성립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불신에는 양극화와 소득분배 악화의 극복, 사회복지 확대, 일자리의 확대 등 진보적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 여론조사를 보면, 각종 진보적 요구들이 다 이명박 정부에 투사되어 있다.
중도자유주의 정부에 대한 보수언론의 적극적 비판은 보수정권에게 더 많은 정치적 지지기반을 제공하였지만 반대로 대중들의 기대수준을 높이는 계기도 제공하였다. 이에 대해 필자는 ‘조중동의 진보적 효과’(조희연, 2007a)라고 부른 바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서구의 신보수정권과 달리 사회복지적 기반 같은 것은 제약되어 있고 반대로 대중의 사회경제적 기대수준은 높은, ‘괴리’상태가 한국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대처정권은 6·70년대 복지국가라고 하는 제도적 기반 위에서―복지병을 고친다는 개혁을 하더라도 복지국가의 기반 위에서―신보수적 개혁들을 수행하면서 존립할 수 있었고, 1955년 이후 일본의 자민당 체제는 사회당의 파트너인 노동자계급과 중간층에 대한 헤게모니적 포섭체제로서 장기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는 일부 대기업 노동자들을 제외하고는 체제에 ‘순응적 대중’으로 살아가기에는―대자본의 천민적 비타협성으로 인하여―다수의 노동자 계급과 심지어 중간층 및 하층 자영업자층까지도 생활기반 자체가 위협받고 있으며 이를 상쇄할 수 있는 복지의 제도적 기반이 취약하다. ‘벼랑 끝 전술’을 쓰지 않고서는―예컨대 노동자들과 철거에 직면한 도시빈민들이―자신들의 권리를 누릴 수 없는 ‘낭떠러지 사회’와 같은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보수 정권이 정치·사회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한국형 신보수정권이 ‘권위주의적 통제정책’을 병행하지 않을 수 없음을 예시한다. 신보수정권이 신자유주의적 기조를 전면화하면 할수록 정치·사회적 불안정성은 증대되고 이에 대한 저항은 확대되게 되고 이에 대해 신보수정권이 권위주의적 정책수단에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이명박정권을 한국형 ‘권위주의적 신보수정권’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여섯째, 통상적으로 보수가 배외적인 민족주의적 성향을 띤다면 한국의 보수는 3.1절과 8.15에 친미데모를 할 정도로 왜곡된 보수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한국의 보수가 극우적 반공주의, 일면적인 성장주의, 전통적인 보수의 국가자율적 배외주의와는 대립되는 극단적인 친미주의, 복지와 공동체적 삶에 대해 전혀 고려가 없는 천민적 친자본주의적 성격 등을 갖는 것 자체가 바로 한국적 보수의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3·1절과 8·15에 친미데모를 하는 것이 바로 뉴라이트의 모습이다.
사실 돌이켜 보면,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식민지, 냉전, 개발독재, 약탈적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구성적으로 변화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보수는 어떤 의미에서 역사가 없는 보수이다. 이제 서서히 박정희 시대를 보수의 중요한 역사적 자산으로 해가고 있다. ‘자신의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군주제의 붕괴, 해방 이후 분단이라는 상황 속에서 철저한 반북·반미주의로 무장한 한국의 전후 보수, 개발독재 시기를 통해서 ‘자주적 근대화’를 성취한 새로운 보수의 자부심을 가져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한국의 보수가 이명박 정부 하에서 자신의 근대화적 성장주의를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로 전화하면서 스스로를 재구성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의미의 보수와 진보의 대립구도가 존재하며 그것의 이념적, 정치적, 사회경제적 성격은 상이하게 변화하고 그 내적 구성이 변화하면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신보수정권 혹은 신우파정권이라는 규정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6·70년대의 파쇼적 지배와는 다른 ‘복합적 실천’으로 구성되는 새로운 지배를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그 새로운 지배의 핵심으로 가면 반노동자주의, 친자본적 성격, 위기에 처하면 언제든지 권위주의적 억압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경향성 등이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다. ‘계급본질적 연속성’은 확연히 거기에 있다(물론 국가를 ‘도구’화하는 자본가계급의 물적 조건이 달라지고 자본축적이 초국적 프레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얼굴로 대중들 앞에 있다는 것이다. 파쇼적 지배가 동원한 물리적 억압정책 뿐만 아니라 이른바 ‘욕망의 정치’ 혹은 S. Hall이 대처 정권에 대해서 사용하였던 헤게모니적 ‘문화정치’가 결합된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거대한 흐름은 대중들로 하여금 새로운 성장주의와 그에 대한 개인적 경쟁을 새롭게 촉진하고 동시에 새로운 ‘욕망’을 창출하면서 그러한 자발적 욕망의 동학에 의해서 탈저항적인 보수적 존재로 나타나게 하고 있다.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부르주아적인 복합적 실천의 총체로서의 새로운 지배양식에 대응하는 새로운 복합적인 대항헤게모니적 실천으로 우리를 풍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보수정권 출범 수개월 만에 우리가 그 성격과 관련하여 주목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경제기조를 전면화하는 신보수정권이 결코 대중의 자발적 동의를 향유하는 ‘헤게모니적’ 체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특별히 ‘전(前)복지국가적 신보수정권’은 대중에 대한 포섭의 기반 자체가 협소하다. 사실 글로벌 신자유주의 자체도 대중들을 그 체제의 논리―예컨대 경쟁논리―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하고 있으나 그것이 사회경제적 포섭에 의한 자발적 순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대중의 전반적인 삶의 영역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그 결과 다양한 탈주를 촉발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그러한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일반적 모순에 더하여 한국적인 특수한 모순이 결합되면서 더욱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을 수 있다.


4. ‘복합적인 반신자유주의적 정치’의 주요 이슈영역

그럼에도 신보수정권의 출범은 시민사회 및 민중진영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현대사의 사이클의 시작을 의미하고 새로운 경쟁과 쟁투(爭鬪)의 대상이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65%에 이르는 보수 지지(한나라당 지지, 자유선진당 지지 포함)를 염두에 둔다면 그 경쟁과 쟁투의 대상이 대중에 대한 강력한 호소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1930년대 파시즘의 대두가 중간층과 자영업자층, 심지어 노동자계급 등의 압도적인 지지에 의해서 가능했었음을 상기할 때, 급진진보 혹은 좌파세력이 고민을 해야 할 대목이다.
2008년 이후의 상황을 필자는 ‘신자유주의 불평등/신보수정권 시대’로 규정하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급진진보세력 및 좌파세력의 응전과제에 대해서 서술하여 보기로 한다. 이미 국민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민주개혁의 과제가 진전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확대되고 그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불평등’이 전면화되기 시작하였고 이처럼 민주정부가 응전하지 못한 신자유주의적 불평등은 신보수정권의 성립을 낳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성립은 신자유주의적 불평등과 신보수정권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자, 이제 신자유주의 불평등/신보수정권 시대에 급진진보세력과 좌파세력에게 제기되는 조건 및 과제에 대해서 서술하여 보기로 하자.
1) 복합적인 반신자유주의적 정치의 강화

이러한 신자유주의 불평등/신보수정권 시대의 급진진보 및 좌파세력의 핵심적 과제를 ‘복합(複合)적 반(反)신자유주의적 정치’의 강화라고 표현하고 싶다.
앞서 서술하였듯이, 사실 국민정부와 참여정부 하에서 반신자유주의적인 정치·사회적 실천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료되지 않은 민주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 때문에 참여정부나 국민정부가 ‘복합적’ 성격을 가짐으로써, 반신자유주의적 이슈들은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경제살리기와 줄푸세’(“세금과 정부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라는 슬로건에서 보듯이 ‘전면적인 신자유주의적 경쟁국가’를 지향하는 전면적인 신자유주의적 정권이다.
이것은 분명 6·70년대의 ‘파쇼적 보수’와는 다른 것이지만 우리가 신자유주의라고 명명하는 어떤 현상에 대해서 대중들의 수준에서 그 문제점과 모순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성립은―보기에 따라서는 진보세력에게 재앙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일 수도 있다. 더욱 전면적인 급진화가 가능한 조건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응전에 따라서는 반신자유주의적 정치의 대중화 속에서 진보적·급진적·좌파적 세력들의 대중적 기반을 형성하기가 용이할 수도 있다. 2차 대전 전의 서유럽에서 자본주의가 파시즘화하면서 이에 대응하는 레지스탕스 과정에서 좌파세력이 헤게모니를 확대하게 되고 이것이 전후의 좌파 약진의 토대가 되었던 것을 상기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불평등/신보수정권 시대에 진보를 확장하되 급진진보 혹은 좌파세력이 헤게모니를 강화하면서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제반의 대중적 이슈들의 사회성과 정치성을 부정하고 그것을 탈(脫)정치적인 경제적 쟁점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탈정치적 경제주의에 맞서 신자유주의적 경제를 정치적 쟁점, 그것도 급진정치적 쟁점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재정치화 전략과 병행되어 전개되는 급진적 정치화 전략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2) 복합적 반신자유주의 정치의 3가지 이슈영역

(사회)공공성을 중심으로 하는 ‘복합적 반신자유주의적 정치’의 강화를 위하여 3가지 투쟁영역으로서 급진적 민생정치, 급진적인 지역풀뿌리정치, 급진적인 생활세계 정치로 나누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1) 급진적 민생정치

복합적 반신자유주의적 정치의 강화를 위한 첫 번째 중요투쟁영역은 ‘급진적인 민생정치’로 표현된다. 2008년 4월 총선에서도 보였듯이 대중의 사회경제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들이 중요해지고 있다. 점점 더 대중의 사회경제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들이 중요해지는 조건에서, 주거, 보건의료, 교육, 노후생활, 고용 등 핵심적인 복지영역에서 지난 10년과는 다른 대치선을 쳐야 한다. 이것이 급진적인 민생정치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이슈들이면서 어떻게 보면 ‘사회적 임금’으로 표현되는 영역이자 ‘사회적 재생산 영역’의 이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투쟁활동이며 동시에 민중생존권 투쟁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전의 투쟁에 비해서 전계급계층적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된다.
2007년 12월 대선과 2008년 4월 총선에서, 대중들은 자신들의 생활문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신보수적 정치’―예컨대 고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 또한 뉴타운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개발전략―에 희망을 건 것이다. 일종의 신보수적 민생해법이 호소력을 가지고 다가가고 있는 형국이다. 대중들은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이슈에 대해서 공적·사회적 해결방식을 ‘비현실적’으로 인식하고 시장적인 프레임 내에서 개인주의적 방식으로 치열하게 경쟁(예컨대 자식들의 교육에 올인하는 경쟁)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공적 복지, 사회정책을 통한 삶의 문제의 해결양식에 대해서 여전히 낯설어하는 대중들을 변화시켜야 한다. 2004년 총선에서 ‘4대 개혁입법’이 쟁점화되었던 적이 있다.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 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 등은 분명 중요하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우리는 그러한 법들의 후퇴를 방지하기 위한 대열에 안타깝지만 서있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한 후퇴 방지 대열뿐만 아니라 더욱 전향적인 사회경제적 대치선을 형성해 내야 한다. 건강보험 민영화나 의료산업화 반대와 같은 이슈영역에서도 복지후퇴 반대투쟁이 있어야겠지만 더욱 높은 수준의 실질적인 복지국가이슈를 형성·실현해내는 전향적 투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견지에서 새로운 ‘4대 사회경제 개혁입법’ 같은 것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예컨대 ‘1가구 2주택 금지’ 같은 법이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대학등록금이 1,000만원이 넘는 험악한 현실에 대한 투쟁은 단순히 등록금을 600만 원대로 내리는 투쟁만이 아니라 대학등록금을 더욱 공적으로 해결하는 사회적 방안을 실현하기 위한―어떤 의미에서 한 단계 도약을 위한―투쟁이 될 수도 있다.
4대 사회경제 개혁입법이 ‘임금연대’를 포함하는 이른바 ‘사회연대 전략’적 쟁점까지 포괄할 것인지, 소유와 생산에 대한 민주적 통제까지 포함하는 이른바 ‘사회화’ 전략적 쟁점까지 포괄할 것인지는 반신자유주의적 투쟁의 수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참여정부 하에서 진보적 운동들이 돌파해내지 못한 병목지점들을 정책적으로 분명히 하고 대중에게 정면으로 설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감세(減稅) - 증세(增稅)냐’ 논쟁에서 많은 시민단체는 사실 어떤 의미에서 ‘비겁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보수언론은 ‘세금폭탄’이라는 담론으로 대중의 의식에 ‘융단폭격’을 가했고 이것은 이명박 정부가 성립할 수 있는 사회심리적 기반을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복지사회는 불가피하게 가진 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매기는 방식으로 성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자.
이명박 정부의 각종 규제 완화가 사실은 ‘대기업과 가진자들에 대한 지원정책’이자 반노동자적인 계급적 성격을 내장하고 있음을 명확히 해야 한다. 예컨대 경부운하는 환경적 차원에서도 문제이지만 이것은 ‘토건 재벌 특혜지원정책’이며 대자본의 축적에 대한 국가적 지원프로젝트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여러 정책적 지점에서 돌파할 것은 욕을 먹으면서라도 돌파하면서 대중의 의식을 전환시켜 내야 한다.
뉴타운 개발 등으로 표현되는 대중의 새로운 물질적인 ‘욕망’은, 사실 민주화과정에서 억압되고 소외된 정서가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을 소외시켰던 개발독재 시대의 수혜자들이 누렸던 혜택을 자신들이 향유하고자 하는 ‘모방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적·사회적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개발프레임 속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이번 총선에서 표현된 뉴타운 개발 선풍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70년대로 넘어가면서, 1차 개발의 ‘성공적 추진’에 의해서 나타나는 새로운 모순에 대응하는 형태로 공적·사회적 대안을 현실화하는 식으로 갈 수밖에 없다.
급진적 민생정치를 사고하는데, 구조적 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실 한국사회는 개발독재의 시대와 민주화시대를 거쳐, 최근 신자유주의시대/개방화의 시대에 진입하였다.
이러한 급진적 민생정치는 초기산업화 단계와 구별되는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빈곤화와 배제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을 쟁점화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개발독재 하에서―구 정치적 독점과 연결된―구 개발독재적 독점구조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독점과 수탈기제가 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70년대 초기 산업화단계의 시장독재나 자본독재가 정치적 독재와 일체화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이제 시장독재와 자본독재는 민주주의적 외양을 띠면서 스스로의 물질적·계급적 힘에 기초하여 노동자계급과 대중에 대한 지배를 실현하고 있다. 이제 정치적 독재와 자립한 ‘자율적인’ 시장적 기제를 통한 신독점화와 신빈곤화 및 배제가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계급과 대중에 대한 새로운 시장독재와 자본독재에 대항하는 투쟁을 급진진보세력 혹은 좌파세력이 선도하는 과정 자체가 급진세력의 대중적 기반을 강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 급진진보세력이나 좌파세력이 ‘대중적인 투쟁’에 개입하기보다는 다종다양한 정치·사회적 실천의 이념적 성격을 판별하는―‘개량적’이라거나―‘이념적 검열관’으로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대중적 쟁점에 급진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을 통해서라야 오히려 급진진보세력과 좌파세력이 지향하는 사회진보의 대중적 기반이 강화되며 스스로가 대중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2) 급진적 지역풀뿌리정치

다음으로 복합적인 반신자유주의적 정치의 강화를 위해서는 급진적 지역풀뿌리정치의 확산이 필요하고 이에 급진진보세력과 좌파세력이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 풀뿌리 정치는 일종의 ‘진보의 사회적 펀더멘털(fundamental)’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역풀뿌리 수준에서 수구적·보수적 세력이 강고한 기반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신보수세력의 헤게모니화의 중요한 근거였다고도 할 수 있다.
진보의 사회적 펀더멘털을 강화하는 것은 풀뿌리 수준에서 그리고 지역수준에서 진보의 굳건한 대중적 기반을 확장하는 것에 기초를 둘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진보는 이 점에서 취약했다. 더욱 급진적으로 여겨지는 PD가 NL에 비해서 대중사업이 취약한 것, 시민사회운동이 중앙정치를 둘러싼 사업에서는 영향력을 갖지만 풀뿌리 대중의 삶의 수준에서 기반이 취약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87년 이후 지난 20년 동안 일정한 진전이 있음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진보가 바로 이러한 ‘사회적 펀더멘털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민주화 20년을 돌이켜 보면, 중앙정치의 민주화가 일정하게 성취되었지만 여전히 풀뿌리 대중의 삶의 수준에서는 보수의 기반을 균열시키지 못하였다. 민주화의 한 차원으로서 지방화 혹은 지방분권화의 지향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 중앙의 개발주의를 넘어서고 중앙과 결합된 지역의 풀뿌리 보수를 극복하는 과정보다는, 중앙에 집중화된 개발을 지방에 일정하게 재분배하는, 즉 ‘개발의 지방화’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는 전국적인 부동산 가격 상승 등 새로운 문제점을 동반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중앙정치적 수준에서의 일정한 진보개혁의 진전이 지구적 차원에서의 신자유주의적인 흐름과 지역 및 풀뿌리 수준에서의 보수적 흐름에 압도당하는 형국이 현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87년 이후 20년 동안 성취하지 못한 풀뿌리 및 지역 수준에서의 대중의 삶 속에서 진보가 뿌리내리도록 하는―동시에 보수의 영향력을 펀더멘털한 수준에서 균열시키는―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점에서 새롭게 급진진보적 관점에서 그리고 좌파적 관점에서 지역으로, 지역대중의 삶 속으로 뚫고 들어가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지역대중의 삶을 재발견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진보정치의 재구성을 향한 새로운 접근은, 생산활동과 생활이 만나는 시공간으로서의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린다는 시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조현연). 급진적 민생정치를 통해서 대중과 결합하는 현장도 바로 지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있어 지역풀뿌리 현장은 현재까지는 ‘정치’의 장소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치의 새로운 장소로서의 공동체’(서영표. 2008), 즉 지역풀뿌리 공간이 재발견되어야 한다.

(3) 급진적 생활세계정치―새로운 급진적 진보성의 접합(接合)·전유

셋째, 급진적 생활세계 정치의 과제이다. 진보가 대면하는 대중의 생활세계는 이미 6·70년대의 그것과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개발 자본주의’에 의해서 주어지는 새로운 생활세계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산업화단계와는 전혀 다른 욕망과 감수성을 가진 대중들이 존재한다. 이처럼 포스트-개발 자본주의의 새로운 물질적·경제적 조건과 거기에서 출현한 새로운 대중의 생활세계의 쟁점을 급진적으로 대면하고 쟁점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급진적 그룹들이 민주개혁 국면에서 ‘제도화’되어 가면서 급진적 젊은 그룹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젊은 세대의 문화적·생활세계적 감수성을 급진적으로 전유하고 쟁점화하기 위해서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급진적 생활세계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생활세계 이슈에는 경부운하 반대와 같은 환경이슈가 포함될 수 있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경제적 효율성의 전면화는 환경이슈를 둘러싼 투쟁이 확산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이슈 뿐만 아니라, 기존의 생활세계적 규율을 둘러싼 대치선도 확산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활세계 내에 존재하는 각종 권위주의, 규율, 금욕적 세계관을 넘어서서 급진적 문화정치의 관점을 진보운동과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 내가 학생들과 대면하면서 느끼는 것은 젊은 세대의 감수성과 욕망은 시민운동을 주도하는 구세대의 감수성과 욕망의 흐름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1968년 혁명 때 공산당이나 파시즘에 맞서서 싸웠던 ‘좌파 레지스탕스’들이 신세대의 문화적 반란을 퇴폐적이거나 무정부주의적이라고 비판했던 것을 상기해볼 수 있다.
사실 한국의 시민운동은 신사회운동으로 등치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민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국가와 시장의 민주화와 합리화를 촉진하는 ‘구사회운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신사회운동의 급진적 요소보다는 ‘개혁적 요소’를 담지 했다고 생각된다. 한국의 시민운동도 그런 방향에서 노력해야 하겠지만, 급진진보운동과 좌파운동은 신사회운동의 급진적 요소를 재전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급진적인 생활세계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자유와 자율의 급진적 확장’이라는 가치지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구세대의 ‘금욕의 정치’를 과감하게 벗어나서 예컨대 ‘급진적인 성정치학’의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후기 소비자본주의의 ‘욕망의 정치’를 급진적인 ‘가치의 정치’와 결합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예컨대 고등학교에서 두발 자유화와 학교 규율에 대해서 구세대 전교조 교사와 대립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전교조의 ‘참교육’은 민주교육뿐만 아니라 이러한 급진적인 인권정치를 내포화하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 진보운동이 신세대의 감수성을 올바로 대면하고 그것과 결합하는 방향으로 ‘문화적 급진화’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운동가들의 다수는 ‘문화적 보수주의자’라는 성찰적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진보와 문화적 급진주의의 결합은, 구세대에 속하는 개인들이 문화적으로 급진화되는 방식보다는 새로운 감수성을 갖는 급진적인 새 저항주체들이 탄생하고 새롭게 진보운동과 결합하는 방식을 통해서 실현될 것이다.
새로운 급진적 민생정치, 풀뿌리 지역정치, 생활세계 정치는 구세대의 견결함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하지만, 새로운 주체와 그들의 새로운 역동성과 감수성, 주체성들이 결합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진보가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 단지 여기서 급진적 생활정치와 사회경제적 투쟁, 혹은 물질적·경제적 이슈를 둘러싼 투쟁과 이른바 ‘욕망의 정치’ 혹은 ‘생활세계 정치’를 대립시키는 ‘대체론적’ 사고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새로운 지배가 더욱 ‘복합적 실천’으로 이루어지고 우리가 기존의 대치선의 유지 및 재구성을 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전선 구성―욕망의 정치전선―에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급진적 생활세계 정치는 급진적 문화정치적 실천을 내포할 것이다. 신보수정권 하에서 당연히 구 계급적·경제적 대립관계는 지속된다. 단지 신보수정권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부르주아적 지배양식’은 대중들의 새로운 욕망과 문화적 감수성, 소비욕망 등을 전유하는 방식으로 재생산된다. S. Hall은 이를 영국 신보수정권의 ‘문화정치 전략’으로 파악하였다. 새로운 문화정치적 전략으로 민중에 대한 새로운 지배양식을 구축하여야 한다. 문제는 진보적 세력과 좌파적 세력들이 보수세력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를 급진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이런 점에서 한편에서는 급진적 문화정치적 전략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급진적 대안문화의 지점이 어디인지, 그것들이 급진진보적·좌파적 실천 속에서 어떻게 드러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사실 이런 점에 대한 고민은 생태주의자들에게만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조현연 교수가 진보신당의 재창당 과정에서의 혁신의 한 과제로서 ”칙칙한 엄숙주의, 자기들끼리만의 폐쇄적 집단주의, 문화적 보수주의, 기계적 근본주의와 나만이 옳다는 오만함 등으로 상징되는 운동‘권’ 문화와 활동방식으로부터 벗어나서 현실 속의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새로운 운동의 문화, 대안 정치의 문화와 활동을 창조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좌파와 진보는 19세기와 20세기의 좌파와 진보와는 다른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 점에서 “기존의 진보와 그 일부로서의 좌파와 급진그룹은 반독재적 진보성과 반미주의적 진보성, 초기 산업화 단계의 계급적 진보성, 90년대 민주개혁적 진보성에 기반하였다고 한다면,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경쟁드라이브가 촉발하는 신빈곤과 새로운 양극화에 대응하는 신계급적 진보성, 생태주의적 진보성, 신좌파적·신사회운동적 진보성을 어떻게 결합시켜 낼 것인가하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4) (사회)공공성투쟁

여기서 이러한 복합적인 반신자유주의정치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투쟁을 잇는 주(主) 프레임(master frame)을 필자는 (사회)공공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의 시작과 함께 과거 ‘민주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가 이제 신자유주의적 불평등/신보수정권 시대에 ‘친신자유주의 대 반신자유주의’로 재설정되는 경로로 가게 된다고 생각된다. 반신자유주의적 정치의 강화는 민주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투쟁전선을 신자유주의적 불평등을 둘러싼 투쟁전선으로 재편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신보수정권은 신개발주의·신성장주의를 전면화하고 시장경쟁의 원리를 대중의 전 삶의 영역으로 확장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이명박 정부나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사회는 ‘경쟁의 부족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과잉경쟁사회’이며, 경쟁이 내포하는 ‘합리성’을 뛰어넘어 그 과잉경쟁으로 인해서 오히려 경쟁이 갖는 일정한 합리성마저 파괴되는 상황이라고 생각된다. 시장경쟁원리의 확산으로 인해 자연히 대중의 전 삶의 영역에서―잠재적으로나 현재(顯在)적으로나―다양한 저항이 전개될 것이다. (사회)공공성 프레임은 바로 그러한 다양한 저항의 의미를 규정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대중의 전 삶의 영역을 시장화·상품화·상업화하고자 하는 흐름이 강화될 것이고, 이에 대항하여 (사회)공공성의 이름으로 시장적 질서를 공적·사회적으로 규율하며 대중의 더 많은 삶의 영역을 공공재에 의해서 지원하려는 흐름을 강화시키기 위한 투쟁이 확대될 것이다. 이로써 시장화를 지향하는 친신자유주의적 세력과 공공성을 지향하는 반신자유주의적 세력의 대치선이 선명하게 될 것이다. 반신자유주의적 정치연합은 시장화의 공세에 의해서 파괴되면서 제기되는 다양한 대중의 요구를 수렴하는 (사회)공공성연합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여기서 신보수정권의 친기업적인 신개발주의·성장주의에 반대하는 (사회)공공성 연합전선은 급진진보세력, 좌파세력, 노동세력과 민중세력만이 아니라 민주개혁적인 자유주의세력의 다수가 친신자유주의적 기조로부터 이탈하여 참여하는 폭넓은 대중전선이 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2002년 ‘노무현이라는 상징’을 중심으로 당시의 다양한 개혁적 지향이 수렴되는 식으로 나타났다. 노무현 정부 하에서는 역으로 노무현 정부로부터 다양한 이반(離叛)들이 ‘이명박이라는 상징’을 중심으로 새롭게 수렴되었다. 필자는 이명박 정부 하에서 다양한 이반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러한 이반들이 한 단계 높은 사회진보와 결합되어 대안적으로 수렴될 것인가하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사회)공공성이라는 지향을 중심으로 하는 대안적 수렴점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수렴점은 이명박 정부로부터의 다양한 이반들의 ‘헤게모니적 접합’점이 될 것이다. (사회)공공성은 다양한 투쟁들의 헤게모니적 접합의 ‘연결(bridging)’프레임이 될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불평등시대/신우파정권 시대에 진보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과 연관된다. 시대적 상황의 전환에 따라서, 민주개혁 시대의 보수와 진보의 경계가 재(再)경계화되는데, 예컨대 2006년부터 시작된 FTA 반대투쟁 속에서 민주개혁적 진보의 일부인 자유주의적 사회운동세력의 많은 부분이 반FTA투쟁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는 반신자유주의적 진보가 풍부화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의 표와 같이, 이제 신자유주의적 불평등·신보수정권 시대에 새롭게 보수와 진보의 경계,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구성은 변화해갈 것이다. 국민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반(反)개혁적 보수는 점차 신자유주의적 보수로 변신하였고―민주개혁적 진보의 일부를 이루었던 세력이 집권세력이 되어 새롭게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포섭되었다. 그런 속에서 민주개혁적 자유주의세력은 다수의 친신자유주의적 세력과 일부의 반신자유주의적 세력(혹은 사회적 자유주의세력)으로 분화되어갔다. 필자의 입장에서는―일부 반신자유주의적 방향으로 선회한―자유주의 세력을 견인하면서 광범한 진보세력―그 내부에 급진진보·좌파세력이 최대한 이니셔티브를 갖는―이 연합하는 반신자유주의적 대중정치전선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지난 20년간 민주개혁을 지향했던 민주주의자들이 민주개혁 정신의 급진적 재해석 위에서 ‘신자유주의적 불평등시대의 새로운 진보’로 전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80년대 반파쇼투쟁의 경험을 상기해본다면, 대중적인 반파쇼투쟁은 급진적인 반파쇼 지향을 갖는 개인이나 집단이 모이는 과정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온건보수적 지향을 갖는 존재들이 스스로를 전환시켜서 반파쇼투쟁에 합류하는 과정을 통해서 출현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반신자유주의전선의 대중화 과정을 급진진보세력 및 좌파세력이 얼마나 선도하고 그 과정에서 이니셔티브를 가질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민주화의 상황

반개혁적 보수 민주개혁적 진보





극우적보수
반개혁적보수
(conservatives)
민주개혁추구하는
중도자유주의세력
(liberals)
민주개혁의 철저화와 사
회화를 추구하는 급진 진보세력(radicals)
신자유주의적보수
신자유주의적 리버럴
사회적
리버럴
시장수용적 급진
반자본주의적 급진






친신자유주의적보수 반신자유주의적 진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도전

여기서 신자유주의 불평등/신우파정권 시대에 폭넓은 반신자유주의적 진보를 묶는 담론은 바로 (사회)공공성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동요하는 자유주의적 세력들이 전투적으로 선도하지 못하는 (사회)공공성 투쟁을 급진진보세력 및 좌파세력이 선도적으로 어떻게 수행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3가지 이슈영역에서의 급진적 투쟁을 엮는 주(主)프레임(master frame)이 바로 (사회)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다. 복합적인 반신자유주의적 정치의 강화와 대중화를 위하여 (사회)공공성 투쟁에 급진진보세력과 좌파세력이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통해 급진세력의 헤게모니를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4. 진보정당운동의 향후 진로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신자유주의 불평등 시대/신우파정권 시대에 대응하는 급진진보적·좌파적 실천은 사회운동적 차원과 정당정치적 차원 모두에서 전개된다. 87년 이후 20년 동안의 민주화과정 속에서 제도정치의 영역이 확장되었기 때문에―또한 제도정치 내에 진보적 세력들이 진지전적 투쟁을 할 수 있는 공간과 기반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이러한 확장된 제도정치영역에서의 대안적 실천과―제도정치 외부에서의―급진적인 사회운동적 실천이 동시에 이루어지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두 트랙(two track)’의 급진적 실천이 전개된다.
이런 점에서 의회를 포함하여 제도정치적 공간에서의 ‘진보적 정치실천’과 제도정치적 공간 외부에서의 ‘진보적 사회운동적 실천’을 어떻게 상승적 관계로 결합시킬 것인가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앞서의 서술은 주로 사회운동적 차원을 중심으로 논의하였다고 한다면, 여기서는 (급진)진보적·좌파적 정치실천과 관련하여 몇 가지 사안을 토론의 소재로 제시해보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2008년 2월 3일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진보신당 그룹이 분화함으로써 두 개의 진보정당 시대로 진입하였다. 이러한 분화의 현실을 전제로 하면서 몇 가지 토론점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1) 진보정당의 ‘분열’과 ‘분화’에 대하여

필자는 개인적으로 분당반대론에 서 있었다. 사실 필자는 NL이나 PD 등으로 상징되는 노선이나 이념의 ‘차이’가 현실에서 어떤 조직적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어느 하나의 방향만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NL적 정당과 PD적 정당, 다수의 급진진보정당이 경쟁하면서 공존하는 경우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들의 의식조건과 전반적인 정치사회적 조건에 대한 타산 위에서 선택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진보정치주체들이 이미 그렇게 선택한 상태이고 되돌리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제 ‘분당’이 현실화된 시점에서 ‘분화’로 이를 파악하고 이 두 진보정당이 ‘갈등적 협력’을 하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분화가 오히려 두 진보정당 내부에서 PD는 ‘NL적 PD’로 확장변화하고 반대로 NL은 ‘PD적 NL’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까지는 하나의 진보정당 내에서 자주파적 그룹과 평등파적 그룹이 각자 자기 고유의 색깔을 가지면서 활동해 왔고, 결국 민주노동당은 두 가지 성격을 갖는 활동을 한 셈이다. 종북주의 논쟁에서도 쟁점화가 된 것이지만 ‘일탈적’ 행위가 문제이지 한국의 진보적 투쟁에서 자주파적 이슈들과 평등파적 이슈들은 모두 중요한 이슈를 구성한다. 그러나 두 정파의 분립으로 인해 이제 두 진보정당이 상이한 방식으로 상대방의 이슈를 전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NL적 이슈를 다루는 자주파의 방식과 평등파의 방식의 차이가 드러날 것이다. 필자는 자주파와 평등파가 경쟁집단의 이슈를 자기 방식대로 전유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면 분화가 ‘NL과 PD의 상호침투’와 자기확장이 일어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정당으로의 분화는 양자 사이에 치열한 경쟁을 불가피하게 한다. 잘못하면 ‘적대적 갈등’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비적대적인 갈등’이 되도록 하는 목적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전국 254개 지역구는 적절히 분할해서 상호 중첩되지 않는 식으로 기반을 확장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차제에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다양한 분화가 나타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NL은―PD도 그러한데―더욱 분화되고 ‘분열’되어야 한다. 즉 NL그룹 내의 다양한 차이가 차제에 부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NL적 정치세력 내부에 이른바 주사파적 일탈이 출현하기도 하지만 분단상황과 친미패권적 구조와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현실은 NL적 정치의 중요성을 지속시킨다.
단지 계급적·정치적·민족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서 NL적 정치의 의미와 내용이 달라진다는 점이 반영되지 못하였다. 필자는 NL적 정치 내부의 다양한 차이들이 주목되고 비주사파적인 흐름들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NL적 정치의 핵심적 지향은 ‘반(反)식민주의 정치’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NL의 합리적 핵심인 ‘반식민주의’적 정신은 근대제국주의적 맥락 혹은 2차대전 이후의 ‘신식민지’적 맥락에서 민족의 자립을 억압하는 반민족적 외세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적 정신으로 구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주의적 힘은 남한에서의 자본주의적 개발의 ‘성공’으로 그 물질적·계급적 기반이 변화하였다. 식민주의적 힘은 ‘민족적 외세’로서의 미국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며 이미 남한의 친미적 세력들, 남한 내부의 자본세력들, 시민사회의 보수세력 등으로 ‘자립’하여 존재하고 있다(남한의 대자본은 이미 독자적으로 남한민중에 대한 식민화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NL의 정신은 ‘반미주의적’ 정신으로만이 아니라 ‘반자본적’ 정신 등 다양한 반식민주의적 정신으로 구현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있다. 또한 반식민화의 동력은 반민족적 외세에 대항하는 ‘민주기지’로서의 북한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며 이미 남한 내부의 다양한 급진적 진보역량으로 구성되고 있다. 특별히 남한에서 변혁운동의 복원은 북한과는 구별되는 ‘반외세적 남한진보역량’의 독자적 존재를 가능하게 했다. 이런 점에서도 NL은 결코 종북적 흐름으로만 이해되어서도 안 되며 식민화의 지배적 힘의 변화를 고려할 때 다양한 반식민주의적 흐름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NL은 NL들’로 파악되어야 한다(이수혁).
이런 점에서 반식민주의적 행동주의는 단지 ‘민족-민족주의’적 범주 속에서 고착되어 표현될 필요는 없다. 식민화의 흐름에 대항하는 반식민지 행동주의는 국가 내부에, 국가 외부에, 그리고 시장영역에서, 시민사회 내에서, 대중의 생활세계에서 관철되는 다양한 식민주의적 힘에 대한 ‘총체적인 저항’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본다.
2) 민주노총당과 노동자당, 사회운동당이라는 ‘낙인’에 대하여

둘째, 진보정당은 노동자계급 정치화의 선도역할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노동자계급 자체의 ‘재구성적 강화’의 촉진역할을 담당하는 상호작용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돌이켜 보면, 노동자계급의 역사는 노동자계급의 ‘재구성적 형성’의 과정이었다. 즉 자본에 의한 노동자계급의 ‘탈주체화적 해체’ 전략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의 ‘주체화적 구성’의 과정이었다. 현재의 난점은 초기산업화 단계의 계급형성이 ‘중단’되고 어떤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2차 산업화과정에서의 노동자계급의 ‘해체적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자본과 국가에 의한 비정규직의 창출은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해체적 분열을 낳는다. 이에 대응하여 정규직-비정규직의 경계를 뛰어넘는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재구성적 형성의 과제가 제기된 것이다.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1차 산업화 단계의 노동자계급의 객관적 확장을 기반으로 하여 노동자계급의 정치적·계급적 형성을 완료해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해체적 분열의 흐름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러한 어려운 조건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재구성적 형성의 과정을 진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87년 이전의 반독재 운동과 87년 이후의 노동 운동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흐름이 확대되는 90년대 말 이후 침체된 것은 이러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신자유주의적 보수혁명’의 흐름은 자본에게는 더 큰 자유와 힘을, 노동자계급에게는 더욱 어려운 자기구성의 조건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편승하고 그것을 담지하는 신보수정권의 등장(‘파쇼적 보수’에서 신자유주의적 보수로의 전환)으로 인하여 노동자계급과 대중들의 정치적 저항성이 약화되고 새로운 순응, 개별화와 파편화가 촉진되면서 이러한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어려운 조건을 돌파하는데 ‘왕도(王道)’가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적 보수혁명’ 속에서 어렵더라도 노동자계급을 재구성해 나가야 한다. 진보정당은 노동자계급을 정치의식으로 무장시키는 선도 부대의 역할, 노동자계급의 재구성을 촉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여기서 ‘민주노총당’, ‘노동자당’, ‘사회운동당’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물론 어느 지점의 혁신지점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명예로운 별칭’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그것을 부정적인 낙인으로 만드는 조건을 ‘돌파’해야 하지 우회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퀴어(queer)’가 부정적인 의미에서 긍정적인 자기정체성의 표현으로 변화한 것도 상기해볼 수 있다. 물론 진보정당에 대해 ‘정규직당’, ‘귀족당’이라고 비판하며 혁신을 요구하는 상황은 별개의 차원이다.
이와 관련 구체적인 쟁점으로, ‘배타적 지지’ 방침의 견지 혹은 폐기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현재의 배타적 지지와 부문 할당제의 구도를 해체하기보다는 유지하는 바탕에서 문제점들을 보완해가는 것이 좋지 않은가 생각된다. 진보정당의 분화 구도 속에서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원칙이나 당-노동조합의 관계 설정 문제 등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다.
이 점에서도 진보정당의 분화로 인해 노동자계급이 ‘분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는 새로운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i)현재의 배타적 지지를 유지하면서 노동조합원의 획득을 위한 경쟁을 벌이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다. ii)다음으로는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를 ‘제한적인 다원적인 지지’로 전환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만일 다수파 지위를 가진 지도부가 ‘배타적 지지’를 ‘기득권’의 형태로 활용하고자 한다면, 진보신당은 그 배타적 지지를 허무는 식으로 경쟁해야 한다. 자주파가 다수파인 노동조합에서 ‘배타적 지지’ 원칙을 민노당에 대한 지지로 활용하는 방식이 아닌 ‘진보적 개방투표’같은 형태를 사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즉 노동조합의 지도부들이 보수적인 정당들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진보적 정당들에 투표하되 진보적 정당들 중에서 선택의 자유를 갖는 방식 말이다.

3) 노동자계급 급진주의와 중간층 급진주의의 긴장

셋째, 노동자 계급정치의 구현과 신좌파적 진보성의 결합이라는 과제가 비록 긴장을 내포하고는 있지만 21세기 급진진보정치 혹은 좌파정치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긴장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통과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정치를 구현하고 노동자계급의 대중적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는 노력은 중간층의 획득 문제와 긴장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생태, 평화, 자율 등의 가치를 가지고 신좌파적 진보성을 결합시키고자 하는 진보신당의 경우에는 고민이 더 클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치들은 현재로서는 ‘중간층 급진주의(middle class radicalism)’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의 경우, PD적 그룹의 NL적 그룹에 대한 비판지점(신좌파적 진보성을 획득하는 과제)과 대중화를 위한 당의 혁신의 지점(노동자계급을 급진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노동자계급 급진주의‘ 강화의 과제)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불일치의 측면이 강하다. 이른바 ‘쉐보르스키의 딜레마’, 즉 노동계급 등 자기 대중을 획득하는 과제와 중간층을 포함한 일반대중을 획득하는 과제 간에 긴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진보정치운동에서 전자가 대단히 일천한 수준에―노동자계급도 민주노동당을 찍지 않는 현실―있다. 사실 문국현 공간의 획득이나 민주노동당의 ‘대중적 혁신’의 과제는 사실 중간층을 포함한 일반대중의 획득문제라고 생각된다. 단지 현재의 같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중도자유주의 정부의 실패로 대중생활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중간층도 급진적인 요구를 수용할 공간이 커지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이 양자 간에 긴장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 양자가 긴장관계이기는 하지만 모순과 대립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렵지만, 노동자계급의 계급정치적 급진화와 새로운 진보적 가치를 통한 급진적 중간층의 획득이라는 것을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이 양자 간에 긴장을 인정하되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노동자 계급정치의 기반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이슈영역에서 중간층 급진주의를 결합시켜 내도록 하는 병행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 계급정치(굳이 이야기한다면 구 좌파적 정치)의 강화와 신좌파적 급진주의(신좌파적 정치)의 접합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진보의 다원주의에 기초한 진보의 재구성과 재창당 과정이 노동자 중심의 정당 건설이라는 기본 노선, 즉 노동자를 정치의 중심으로 세워내고 노동자들이 더 많은 것을 표현하도록 만들어내야 하는 기조를 해쳐서는 안 된다”(조현연, 2008)고 생각된다.

4) 복수 진보정당 구도, 두개의 진보정당 혹은 다수의 진보정당?

넷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진보정당이 분화되어 있는 구도에서 민주노동당은 자연히 과거 자주파적인 운동의 전통에 기반하면서 자신을 확장하고자 노력하게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민주노동당은 대중조직 내에서 상대적으로 자주파의 기반이 광범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의 민주노동당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확장노선을 추구하는데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여기서 문제는 진보신당과 진보 신당을 뛰어넘는 급진진보·좌파 정치세력이 어떤 분립형태를 취할 것인가하는 것이다. 제도정치와 관련해서 급진진보세력 내부에는 반(反)정치적 지향이나 반국가적 혹은 반제도정치적 지향을 취하는 급진진보세력들도 있다. 이러한 세력들을 논외로 할 때, 제도정치영역을 급진적 관점에서 개입하고 있거나 진입하고자 하는 세력들의 경우에 신자유주의 불평등 시대/신보수정권 시대에 정당적 분립을 어떻게 할까라는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
현재 진보정당의 ‘두 진보정당 경쟁구도’의 가능성도 있고 ‘진보정당들의 다원적 경쟁구도’의 가능성도 있다고 보인다. 향후 복수의 진보정당구조와 관련하여, 문제는 진보신당과 좌파정치 지향세력들이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러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다. 첫째 좌파정치세력이 사회운동 세력으로 지속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좌파정치세력들이 진보신당과는 구별되는 독자정당으로 분립하여 일종의 ‘다수의 진보정당 구도’로 가는 것이다. 프랑스 같은 경우가 될 것이다. 이 경우 민주노동당과 여러 진보신당이 분립한 상태에서 선거국면에서 여러 정당이 선거연합을 구성하거나 경쟁하는 구도가 될 것이다. 셋째, 진보신당과 좌파 정치세력들이 연합하는 구도이다. 이것은 일종의 좌파연합정당이 만들어지는 경우이다. 진보신당이 (급진)사회민주주의정당의 성격을 띤다고 하면 (급진)사회민주주의를 뛰어넘는 좌파적 지향을 갖는 세력들과 연합하여 일종의 ‘범PD연합정당’을 형성하는 경로이다. 물론 이것은 과거 정파운동의 역사와 그 과정에서의 인간관계를 전제로 할 때 현실성이 약하기 때문에 첫째의 구도나 둘째의 구도로 가게 될 개연성이 크다.
그러나 필자는 노동자 계급정치의 지향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의 힘, 사회당, 해방연대, 사회주의노동자연합 등 급진진보적·좌파적 정치를 지향해온 그룹들이 범좌파연합정당을 구성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 진보신당이 보유하고 있는 여러 가지 정치적 자산들―심상정 및 노회찬 등의 정치적 상징성, 진보정치세력화의 상징적 자산으로서의 민주노동당의 상징성의 일정한 분유(分有) 등―은 진보신당의 좌측에 있는 다양한 정치세력에게 제도정치의 ‘진입의 장벽’을 통과하는 데 공통의 자산일 수 있다. 진보신당으로서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가지 않고 한국제도정치에 대중적 좌파정당의 지평을 열기 위해서 또한 스스로의 현장 대중기반을 새롭게 강화하기 위한 상층단일전선을 형성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노동자의 현장기반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도 비(非)자주파적 집단들이 정치적으로 분립되어 있는 상황은 노동자의 대중적인 반신자유주의적 정치를 강화하는데도 또한 비자주파적 노동자대중의 진보정당과의 결합에도 적절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급진진보·좌파세력들의 노동자 현장 대중기반의 취약성이 사실 자주파의 패권을 유지하게 하는 요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대중의 힘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도 필자는 좌파연합정당도 토론에 올려놓아야 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5. ‘대중의식의 급진화 없이 사회진보 없다’

향후 신보수정권 하에서의 투쟁은 민주화 20년, 민주정부 10년 동안에 성취한 개혁의 후퇴를 막기 위한 ‘방어적 투쟁’이 상당 부분 중요시될 것이다. 그러나 방어적 투쟁 그 자체만으로는 자유주의세력의 재헤게모니화로 이어질 수 있다. 예컨대 이명박 정부가 ‘위기’에 처하는 상황이 올 때 현재와는 다른 상황을 형성하여야 한다. 최소한 자유주의세력의 단독헤게모니는 균열되어야 한다. 여기서 한 단계 높은 사회진보를 위한 반신자유주의적 정치와 여타의 급진화 투쟁이 전개될 필요가 있다. 급진진보세력 및 좌파세력의 개입지점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한국사회의 한 단계 높은 사회진보를 위해서는 대중의 급진화 혹은 더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의 급진화가 진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지난 20년 간의 자유민주주의적 개혁단계에서 한 단계 높은 사회(적) 민주주의로 가는 민주주의의 사회화와 사회진보로 가는 병목지점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 병목지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서술한 다양한 급진투쟁들을 통하여 더욱 급진화된 노동자계급과 민중이 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한국민주주의의 사회(적) 민주주의로의 도약과 사회진보의 최대의 병목지점을 규정하는 대중의식적 조건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강남사람은 계급의식이 투철한데 강북사람이 계급의식이 없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박정희식 선진화와 친기업적인 신성장정책을 추진하는 신보수정권이 대중, 그 중에서도 노동자계급까지 포획하는 것이 바로 현시기 한국민주주의와 사회진보의 최대의 병목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사회는 근대적 계급정당이 뿌리내리기 전에, 즉 본격적인 계급투표로 이행하기 전에, 포스트-계급투표적 양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도 표현해 볼 수 있다. 신보수정권의 친기업적인 성장정책의 문제점을 대중들이 체험하면서 신성장연합으로부터 대중들이 폭넓게 이반하고 새로운 반신자유주의적 연합 혹은 (사회)공공성 연합이 구성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돌파해야 할―우회할 수 없는―계급역관계가 존재한다. 17대 대선은 ‘대중의 합리적 선택’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이는 진보세력의 깊은 성찰과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진보세력, 그 일부로서의 급진진보세력, 그 일부로서의 좌파세력이 극복해가야 하는 대중적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욱 높은 수준의 한국민주주의와 사회진보를 위해서는 현재의 계급적·사회적 역관계를 잘 살펴야 하며, 급진적인 대중의식을 형성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사회는 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서 형성한 ‘계급적 역관계’의 틀 내에서 성취할 수 있는 민주개혁과 사회진보의 한계지점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87년 이후의 민주개혁을 가능하게 했던 계급적 역관계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새로운 진보를 추동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사실 앞서 양극화, 고용불안정 등의 새로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사회정책을 참여정부가 취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는데, 사실 이러한 사회정책은 우리 사회의 거대한 계급적·사회적 기득권세력의 저항에 의해서 시행되지 못했다는 구조적 요인이 존재한다. 2007년 초 필자와 최장집, 손호철 교수 등의 진보논쟁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 하에서의 ‘민주주의의 위기’는 참여정부 통치주체들의 주체적 한계에 기인하지만 구조적으로는 이미 개발독재를 통해서 거대하게 성장한 계급적·사회적 기득권세력의 강고한 힘에 기인한다는 점을 주장한 바 있다(진보논쟁). 비록 개발독재는 물러갔지만 개발독재의 강력한 국가적 지원에 의해서 성장한 자본가계급과 다양한 계급적·사회적 보수세력들은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적·정치적·시민사회적 기제들을 통하여 ‘부르주아적 지배’에 도전하는 위협적 요소들을 무력화하면서 이 땅의 보수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의해서 고통 받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에게는 정작 투철한 계급적 의식이 존재하지 않으며 ‘변형된 반공주의’―과거의 수평적인 대결적 반공주의에서 ‘체제우월론적 반공주의’로―에 의해서 그 계급적 각성이 지체 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 글로벌한 차원에서 ‘국제경쟁력 강화’와 같은 과제를 불가피한 시대적 과제로 인식케 하면서 대중들이 새로운 시장경쟁에 순응하면서 경쟁력 제고를 향하여 달려 나가도록 촉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효과가 존재한다.
정작 이러한 현실의 최대의 피해자가 되는 계급과 계층들은 그에 상응하는 계급의식과 계층의식이 없는데, 반대로 최대의 수혜자 계급과 계층은 ‘투철한’ 의식을 가지고 ‘종합부동산세’에 저항하고 자유주의적 정권을 ‘좌파정권’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작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옹호하는 진보정당을 사표심리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상층계급은 자신의 이해를 보호하는 정당을 잘 알고 적극 지지하는데 노동자들과 하층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적 정당을 잘 알지 못하고 지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현존 계급적·사회적 역관계의 의식적 내용이다. 바로 이러한 의식적 조건들을 급진적으로 변화시켜 내지 않는 한, 신보수 정권시대의 새로운 모순들이 현재화되더라도 그것은 진보적 지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다. 한 단계 높은 사회진보를 실현하고 한국 민주주의와 국가를 반신자유주의적 사회국가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더욱 급진화된 대중주체들이 출현해야 한다. 부유층에 대한 세금 중과 정책에 대해서―스스로 세금을 내는 위치가 아니면서도―‘세금폭탄’이라고 인식하는 대중들이 존재하는 한 반신자유주의적 사회국가로 가는 길은 요원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괴적 결과에 저항하는 분노한 노동자, 농민, 다양한 하위주체들이 출현하지 않는 한 ‘민주개혁’을 뛰어넘는 진보를 성취하기가 어렵다. 신보수정권이 전면적으로 추진하는 신자유주의정책의 파괴적 결과에 대응하면서 반신자유주의적인 사회적 국가를 상상하도록 하는 새로운 계급적·정치적 의식을 확보해 내야하고 이 점에서 급진진보세력과 좌파세력이 앞장서지 않을 수 없다.
향후 이명박 정부 하에서 대중의 지향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는 하나의 경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향후의 변화와 관련하여 제도정치의 구도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보수(우파)정당이 패권적 지위를 갖는 일본형 정당정치 경로, 진보정당이 착근하지 못하고 보수정당과 중도자유주의정당이 경쟁하고 정권교대를 하는 미국형 정당정치 경로, 보수(우파)정당과 진보(좌파)정당이 기본축으로 경쟁하고 거기에 다양한 좌우 군소정당들이 경쟁하는 유럽형 정당정치 경로 등이 있다. 물론 여기에 더욱 ‘우파적인 구도’도 가능하고 더욱 ‘좌파적인’ 경로도 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우파 정당이 특별한 경쟁정당 없이 거의 만년 집권당으로 지속되는 어떤 경로, 좌파정당이 만년 집권당으로 존재하는 어떤 경로도 상상해볼 수 있다. 후자로는 몽골과 같이 사회민주당 쯤 되는 민주당과 공산당이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우리의 경우 유럽형 정당정치의 경로에서 사회민주주의정당 뿐만 아니라 공산당 등 좌파정당이 제도정당으로 진입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다양한 가능성 중 어느 것을 현실화할 것인가는 신보수정권 하에서 급진진보 혹은 좌파세력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상당 부분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도전 속에서 반독재 자유주의 집권세력이 헤게모니를 상실했으나 다시 스스로의 변형을 통해서 신보수세력에 대응하는 새로운 헤게모니 세력으로 부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신보수정권에 대한 투쟁 속에서 급진진보세력 및 좌파세력의 헤게모니 투쟁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심지어 급진진보세력이 주변화되고 고립되어 ‘게토화’되는 경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불평등 시대에 자유주의세력의 대안세력으로의 변신도 지체되고 급진진보세력도 대항헤게모니 투쟁에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보수세력의 헤게모니가 지속되는 경우가 될 것이다. 예컨대 차기 정권 교체 시에 보수진영의 또 다른 분파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보수정권 시대가 등장하는 경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오히려 민주개혁 국면에서 반신자유주의적 투쟁이 주목받지 못하였던 것에 비하면, 이제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기조를 전면화한 신우파정권 하에서는 급진적 투쟁이 대중에게 다가갈 가능성은 더욱 크다고 생각된다. 신자유주의적 불평등 시대/신우파정권 시대에 다양한 모순과 갈등도 분출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신우파정권의 대중적 기반도 균열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신보수정권의 균열과 위기가 자유주의적 세력의 재헤게모니화가 아니라 어떻게 급진진보 세력 혹은 좌파세력의 헤게모니 강화로 이어질 것인가에 있다. 최소한 연합리더십의 상태로라도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적 불평등시대/신우파정권 시대에 다양한 이슈영역―급진적인 민생투쟁, 급진적인 지역풀뿌리 투쟁, 급진적인 생활세계 투쟁―에서 반신자유주의적 정치를 대중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투쟁에 급진진보세력 혹은 좌파세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니셔티브를 강화하는 노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된다. 한국민주주의의 급진적 확장도 바로 여기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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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0 16: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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