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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몇 가지 문제와 작은 질문

진보평론  제36호
이광일󰋯성공회대 연구교수/ 정치학

1. 긴 반성, 빈곤한 성과

민주노동당에서 이른바 평등파의 분리와 진보신당연대회의(진보신당)의 창당이 중요한 계기가 된 ‘진보의 재구성’은 18대 4.9총선거가 마무리된 지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그것은 진보신당의 의회진출이 좌절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다각적으로 시도될 수 있지만, 지금 진보신당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총선 이후 실질적 재창당을 하겠다는 공언이다. 한국사회당 또한 새로운 혁신을 말하고 있다. 다른 한편 그것이 제도 안에 위치할 지, 아니면 제도 밖의 그 어디에 존재할 지 아직 알 수 없으나 이른바 계급좌파는 ‘사회주의계급정당’의 건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진보의 재구성이 어떻게 귀결될지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총선에 가려 그 재구성의 구체적 내용과 형식에 관해 의미 있는 논의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지금 이 문제가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보신당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을 의회진입 실패가 진보의 재구성과 관련해서는 모든 진보정치세력이 처음부터 다시 서로를 교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 또한 없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교감이 ‘진보의 재구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단순히 비어 있는 물리적 공백을 채우듯 진행되고 마무리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이 과정은 단지 부족한 것을 병립하여 세우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 과정은 진보정치의 역사적 궤적의 연장선에 있는 상이한 사회정치세력들 간의 긴장과 갈등을 동반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적지 않은 이론적, 실천적 차이 또한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기에 지금까지 진행된 역사적 궤적에 담겨 있는 크고 작은 오류와 한계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관련 주체들은 그 궤적들을 좋은 참고서로 활용해야 한다. 그것이 교과서가 아니라 참고서인 까닭은 ‘진보의 재구성’이 주어진 어떤 것을 단순히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변화된 현실 조건 속에서 무엇인가를 새로이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그 동안 ‘진보’가, 특히 사회주의블록의 붕괴 이후 너무 많은 반성과 자기성찰을 고백해온 반면 그 성과는 빈곤을 면치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너무 반성하고 성찰하여 적지 않은 이들은 아예 그것을 등지고 기존의 사회관계들을 옹호하는 대변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것을 아쉬워하는 것은 아니다. 떠나간 사람들의 자리는 또 다른 이들에 의해 채워지기 마련이고 지금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의 일에 신경 쓸 여유 또한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에 진정 산 자들이 무대의 전면에 나서야 할 때이다. 무엇보다 지난 20년 이상의 긴 반성과 성찰의 과정을 의미 있는 성과로 마무리 지어야 할 시점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를 개인적 윤리, 도덕, 신념의 문제로 귀결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물론 그 윤리와 도덕, 신념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다양한 소통과 실천 가능성을 제약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보의 재구성’에서 어떤 의미 있는 계기도 되지 못할 것이다. 진보정치는 특정의 정치가, 활동가, 이론가들을 위한 단순한 시험대가 아니다.
이 글은 이러한 점들에 유념하면서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진보의 재구성과 관련한 몇 가지 기본적인 논점들을 재고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제기하기보다 기존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진부한 작업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어떤 근거를 마련해보고자 하는 기대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현재 논의되고 있는 진보의 재구성이 어떠한 방향 속에서 진행되어야 하는지 간단히 언급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2. ‘진부한 것’에 대한 질문: 민주주의, 진보, 좌파 그리고 코뮤니즘

지난 4.9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의회진출이 좌절된 진보신당은 자신들의 강령 속에서 평등, 생태, 평화, 연대를 제기하고 있으며 이른바 계급좌파들은 자본주의철폐와 사회주의 실현을 내세우고 있다. 진보신당이 반자본주의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이들의 관계는 소통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지난 대선에서 ‘탈배제강령’을 내세운 바 있는 한국사회당은 반자본주의와 초록의 가치를 중심적인 것으로 내세우며 ‘초록사회당’으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진보신당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초록정치연대 또한 한국사회당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등 진보의 재구성과 관련하여 조심스런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정치를 함께 하는 것은 쉽지 않을까. 물론 함께 한다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 각자는 민주주의, 진보, 그리고 좌파를 자임하는 세력들이 아니던가. 필자는 그러한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그 차이들을 직접 비교하여 명료한 그림표로 만들기보다 과연 민주주의, 진보, 좌파 그리고 코뮤니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작은 소통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물론 지금 이들 개념은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대중적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고 있기에 이러한 작업은 ‘진부한 것에 대한 집착’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신자유주의시대의 정치가 자본과 그것이 지배하는 시장의 그늘에 있음을 고려한다면, 여전히 ‘빈곤한 성과’에 시달리는 진보에게 이러한 반응들은 오히려 당연한 것 아닐까.

1) 민주주의, ‘자기지배의 실현’을 위한 끊임없는 운동의 재구성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기지배의 실현’이다. 루소(J. J. Rousseau)의 말을 빌리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이런 민주주의가 이제껏 존재한 적도 앞으로 존재할 수도 없다는 통찰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러한 규정 자체는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그 규정 자체가 이미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민주주의에 대한 규정과 현실 속에서 재생산되는 민주주의 사이에 간격이 있음을 확연히 드러내준다. 왜냐하면 현실의 민주주의는 그 내용과 형태상의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 어떤 경계를 설정하고 그 외부에 무엇인가를 대상화하여 수탈, 배제, 억압, 차별하기 때문이다. 그 경계의 기준은 특정한 계급, 인종, 성, 민족, 종교, 문화 등이 될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현실 속에서의 민주주의는 이처럼 비민주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긴장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그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버리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설사 그것을 버리고 다른 개념을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현실의 다양한 영역에서 재생산되는 배제, 억압, 차별적인 사회관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찌 되었든 최선은 그 부당한 현실과 대면하여 그것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민주주의는 정적인 것,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이며 능동적인 것이다. 즉 민주주의는 그러한 부당한 현실의 사회관계 속에서 직접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또한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이 함께 주체로 나서 그것을 해소, 극복해나가는 운동으로 존재한다. 그와 같은 부당한 현실이 존재하는 한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의 완성, 완결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특정 주체가 그것을 선언하는 순간 그 행위는 스스로가 민주주의의 극복 대상이라는 점을 확인해 주는 것 이상이 아니다. 멀리는 ‘공산주의의 실현’을 선언한 스탈린시대가 그랬고 가까이는 민주주의의 대강이 완성되었다는 노무현정권, 그리고 그것이 과잉되었다는 지금 이명박정권이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현실의 민주주의는 오직 죽기 위해 태어날 뿐이다. 그와 함께 그 주체들도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원리와 현실 민주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역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부르주아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트민주주의’라는 개념인데, 이제는 ‘진부한 것’이 되어 버린 그것들의 다른 이름은 ‘부르주아독재’, ‘프롤레타리아트독재’이다. ‘민주주의’와 ‘독재’가 동전의 앞과 뒤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분열되어 있기에 그 어떤 누구에게는 민주주의인 것이 그 어떤 그 누구에게는 독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일까. 이미 지적하였듯이 그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핵심 근거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여부에 있다. 즉 기존의 사회관계를 더 대칭적인 방향으로 재구성하는 계기로 작동할 수 있는가 여부이다. 이런 측면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역사의 종착, 완성이라고 말하고 있기에 민주주의의 원리에 부합되지 않는다.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민주주의는 공산주의로 가는 계기, 해소의 대상으로 자신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원리상 그것에 부합한다. 이 점과 관련, 그것의 역사적 현실태-‘역사적 사회주의’-의 몰락 원인을 생각해 보면, 무엇보다 자기극복을 위한 운동(정치)의 메커니즘이 빈곤 내지 부재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고여 있는 물이 아니다.
다음으로 이러한 이해 속에서 ‘진보진영’에서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가장 빈번하게 제기되는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의 관계로 관심을 이동시켜 보자. 일반적으로 전자는 일련의 정치적 제도(절차)의 구비 문제로, 후자는 ‘삶을 규정하는 경제적인 조건들’의 실현 문제로 상징되어 왔다. 87년 6월항쟁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는 대강 완성되었으나 ‘실질적 민주주의’는 여전히 빈곤하거나 요원하다는 논의들은 이러한 인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분법적 발상은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자기지배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 모두가 그것을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이기 때문이다. 그 둘은 애초부터 어느 하나가 또 다른 하나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어느 하나가 ‘수단’이고 다른 하나가 ‘목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옳고 그름, 우열의 문제가 개입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들은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결과물–‘현실민주주의’–이자 또한 해소, 극복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바로 이 점은 ‘실질적 민주주의’의 우위를 강조해온 진보세력에게 숙고해야 할 문제를 던져주고 있는데, 바로 그러한 발상은 진보적인 사회정치세력이 절차와 형식, 그것의 집약인 법과 제도 일반을 경시하는 것처럼 대중에게 각인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지배효과를 확대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러한 논의 구도로부터 벗어나 실천하는 것이다. 진정 민주주의가 ‘자기지배의 실현’을 의미한다면,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이분법의 대립구도에 갇혀 어느 하나의 우월성을 옹호하는 태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절차적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와 동일화시키는 보수정치(학)에 대한 비판이 가능할 수 있으며 진보가 ‘법과 제도’를 경시한다는 그들의 비판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가를 드러내 줄 수 있다.
진보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비대칭적 사회관계들, 그것에 내재된 권력관계들의 응축된 표현이자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숭상의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시켜야 할 해소, 극복의 대상인 것이다. 오직 주권을 넘나드는 대중의 생동력만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원천이라는 점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거리의 촛불을 바라보면서, 혹은 그 안에서 ‘진보의 재구성’을 고민하는 정치세력들은 이 민주주의에 관하여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2) 진보, 민주주의운동의 다른 이름표

진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지배의 실현을 위해 현실의 비대칭적, 억압적, 배제적 사회관계, 그리고 그것에 내재된 권력관계를 해소, 극복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적인 일련의 실천이다. 이에 근거할 때, 기존의 부당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뒤로 돌리려는 사회정치세력은 보수 혹은 수구이다. 따라서 진보는 발전론과 그 변형들이 지금까지 주장하는 것처럼 어떤 계량화된 물리량의 정도, 등위 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의 준거 여부는 현존하는 사회관계들에 대한 태도이자 실천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그 동안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는 진보 여부를 가늠하는 핵심적인 준거로 제시되어 왔다. 이러한 준거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주어진 자연적 질서로 보고 그것을 옹호하는 세력은 보수인 반면 그것을 역사적 관계로 보며 해소, 극복하고자 하는 세력은 진보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자본주의의 극복을 강령으로 내세운 민주노동당을 ‘참다운 진보정치세력’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진보신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유는 민주노동당이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갇혀 계급문제는 물론이고 여성, 환경 및 생태, 소수자, 평화 등 여타의 영역에서 퇴행적 발상과 행태를 되풀이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비판에 근거할 때, 진보의 준거는 단지 자본주의의 극복을 내세우는 것에 있지 않다. 또한 민족, 국가와도 무관하다. 그 준거는 기존의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을 수탈하는, 소수자를 억압하는, 평화를 위협하고 파괴하는, 그리고 환경 및 생태의 가치를 박탈하는 비대칭적, 억압적, 배제적 사회관계들 안에 존재한다. 그러한 부당한 관계를 문제시하지 않는다면 진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에 철저하지 못하면 진보라는 자격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수정치(학)가 제기하는 ‘비판 아닌 비난’에 답할 수 있다. 진보는 ‘성장과 발전’을 거부하는가. 그 성장과 발전이 기존의 부당한 사회관계들을 온존, 내지 확대‧심화시키는 것을 대가로 하는 것이라면 진보에게 그것은 아무런 존재 의미가 없다.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 특히 생산력이 고도화된 지금 이 시점에서 그런 질문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다른 한편 진보와 관련하여 자주 접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노동관계에 있어서는 진보적인데 환경 및 생태문제, 양성문제 등에서는 그렇지 않은 행태를 보이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가 그것이다. 반대로 환경 및 생태, 양성문제들에 대해서는 감수성이 돋보이고 진보적인데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그것을 단지 ‘경제문제’로 보는 태도, 혹은 보수적인 행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의 문제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운동들은 불균등하게 진척되기에 그것의 다른 이름인 진보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그 불균등성을 인식하고 해소, 극복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실천 여부이다. 이것은 여타 영역의 문제를 자기 것으로 하는 과정이자 연대의 과정이다. 만일 이러한 과정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각각의 운동은 노동조합주의, 환경생태조합주의, 여성조합주의 등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진보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부당한 사회관계들을 온존시키고 연대를 훼손시키는 장애물, 경계를 세우는 행태이기 때문에 오히려 극복의 대상이다. ‘어떤 민주주의’로 ‘또 다른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것은 진보와 무관하다.
그렇다면 ‘진보의 재구성’을 말하는 정치세력들은 과연 진보적인가. 여전히 발전주의‧성장주의의 그늘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마치 자신이 관여하는 특정 분야의 운동만이 가장 민주주의적이라고 주장하며 그것만을 부여잡고 어떤 경계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3) 좌파(Left), 민주주의운동의 가장 급진적 부분

‘실용’이 범람하는 이 시기에 좌파라는 개념 자체는 구시대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 대중에게 좌파라는 용어는 크게 감흥을 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좌파’라는 개념을 버릴 수 없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새로이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가장 민주주의적인, 따라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정치세력을 일컫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대로 현실의 부당한 사회관계들로부터 유래하는 상이한 문제들을 자기 것으로 삼아 해소, 극복해나가고자 하는 목적의식적인 실천들, 즉 민주주의운동들은 상이한 내용과 형식의 불균등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좌파는 두 가지 내용을 담보해야 한다. 그 하나는 민주주의운동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등성을 가장 적게 담지하고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바로 그러한 상태를 유지, 고양시키기 위해 각 운동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과 실천의 간격을 줄여나가고 울퉁불퉁한 차이를 완화시켜 나갈 뿐만 아니라 그것을 대중과 함께 실천하는 사회정치세력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은 좌파가 단순히 자본과 노동의 모순을 지양하고자 하는 운동, 양성평등운동, 평화운동, 소수자운동, 그리고 비대칭적 사회관계들을 매개로 해서 심화되는 환경 및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 등 각 영역에 산재하는 급진적 분파들을 일컫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그와 같은 영역의 모든 문제가 ‘자기지배의 실현’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장애라는 것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가장 급진적인 세력을 지칭하는 것이다. 즉 가장 급진적인(radical) 민주주의운동세력을 일컫는 것이다.
‘계급좌파, 비계급 좌파’라는 일상의 용어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구분은 그 동안 노동정치 중심으로 전개된 운동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회관계를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준거로 해석, 편재하고 노동운동을 헤게모니세력으로 전제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계급좌파’는 생산현장에서 자본과 노동의 모순과 적대를 중심으로 민주주의 실현을 중심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하는 정치단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그것이 좌파이기 위해서는 생산현장의 ‘좌파’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지금 ‘현실의 계급좌파’는 그에 부응하는 발상과 행태를 보이고 있는가. 생산현장에서의 노동과 자본의 문제 이외의 사회관계들 속에서 산출되는 쟁점들을 혹시 자신의 외부에 설정해 두고 그것은 누군가 다른 운동세력들이 처리해야 할 것쯤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4) 코뮌주의, 민주주의 그 자체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이후 현실의 민주주의 운동, 특히 ‘좌파운동’은 무엇보다 그것이 뿌려놓은 짙은 역사적 그늘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제 사회주의, 그것의 주관적 실현이었던 ‘공산주의’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상징이 아니라 일당독재, 정보정치, 테러, 숙청, 수용소군도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 해방의 이론가들, 실천가들이 제기했던 ‘공산주의’는 모든 악의 집합처럼 간주되고 있다. 냉전시대 반공산주의 논리를 대표했던 전체주의론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렇다고 ‘더불어 사는 사회’에 대한 대중의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산주의’라는 용어와 무관하게 살아 흐른다. 그렇기에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도 그 어떤 비방을 가해도 그 꿈을 지워버릴 수 없다. 비록 대중이 그것을 논리적, 역사적으로 설명하지 못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와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민주주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그 장애들을 제거하며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운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미래의 목표이자 그를 위한 현실의 운동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재고해야 할 것이 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민주주의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의 실현”이라고 했을 때, 그러한 규정 자체가 또 다른 ‘타자’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라는 비판을 염두에 둔다면,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를 지칭하는 가장 적절한 용어는 ‘공산주의’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역사적 사회주의’에 의해 자의적으로 실현되었다고 선언됨으로써 왜곡되어진 측면이 없지 않기에, 또한 그것이 이른바 전통좌파의 권력개념과 실천관념의 한계와 오류를 반영하는 용어이기에 거북하다면 코뮌주의로 표현해도 무방하다. 이런 맥락에서 코뮌주의 또한 미래의 목표이자 현실의 운동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코뮌주의’는 지금 어떻게 존재하는가.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는 독단의 척도와 위계의 사회구조, 그것의 또 다른 형상인 ‘역사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현실의 코뮌주의’는 기존의 근대적 발상과 실천의 ‘외부’에서 코뮌주의를 실천하고자 선언한다.
그런데 현실운동으로서의 코뮌주의 또한 현실의 삶의 조건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고 그 조건들은 불균등하다. 그렇다면 ‘현실의 코뮌주의’는 여전히 ‘코뮌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대중들, 사회정치세력들’과 어떻게 교호할 것인가. ‘소용돌이를 반복(re-volution)하는 대중들’에게 이 질문 자체는 무의미한 것인가.
현실운동으로서의 코뮌주의, 즉 민주주의운동으로서 코뮌주의의 목표가 근대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 근대의 굴레에 갇혀 수탈, 멸시, 비아냥거림당하고 배제,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그것을 지양해나가는 것이 아마도 그 운동의 본령일 것이다. 상이한 조건 속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운동하면서 삶을 영위하기에 긴장과 모순의 범벅 그 자체인 사람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부대끼면서 그 역능을 찾아야하고 그것의 발전을 가로막는 경계를 함께 제거해 나가는 것이 그 정치의 핵심일 것이다. 만일 이 시대가 ‘해석과 계몽의 교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아마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혹시 여타 사회정치세력들이 여전히 근대적 발상과 조직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특히 근대적인 조직형식의 정당이기에, 또 그렇게 나아갈 잠재성을 지니고 있기에 근대의 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계를 쳐 놓고 적극적으로 ‘교호’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현실운동으로서 코뮌주의와 어울린다고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현실운동으로서의 코뮌주의는 ‘잠재성’이 아니라 ‘현재성’을 중요시하고 그것은 바로 제도 안팎의 대중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무리 실낱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해도 말이다. 그렇기에 코뮌주의가 민주주의운동의 가장 급진화된 현실운동이라면, 그 어떤 조건 속에서도 스스로를 닫을 수 없을 것이다. 애초 그 어떤 경계설정도 이 흐르는 운동을 가로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우이길 바라지만, ‘현실의 코뮌주의’는 ‘역사적 사회주의’라는 과거 역사에 너무 억눌려 있는 것은 아닌가.
3. 다시 돌아보기: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슘페터(J. Schumpeter)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를 인민이 그 대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기회를 가지고 있는 정치체제로 규정하며 자본주의,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논의한 것을 염두에 두자. 슘페터는 그가 말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필연적 연관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결국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가 될 수 있으며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보다 더 기만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슘페터의 민주주의는 그가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양립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발상과 달리 민주주의를 자기지배의 실현을 위해 현실의 장애를 해소,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운동으로 본다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그런데 우선 이 점과 관련하여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이른바 ‘진보’를 자임하는 일부 논의들조차도 자본주의가 일원일표를, 민주주의는 일인일표를 원리로 하기에 양자는 모순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설명은 대중에게 양자의 모순을 잘 포착해 드러내줄 수 있다고 믿기에 채택하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민주주의를 보통선거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양자의 모순을 말한다기보다 오히려 조응을 말하여 그 효과를 상쇄시키는 역설을 생산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선거와 동일시하는 것만큼 그것을 자본주의와 조응하는 것으로 만드는 경우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왜 슘페터가 민주주의를 엘리트민주주의, 최소민주주의에 가두어 두려고 하였는지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왜 그가 그의 민주주의를 매개로 ‘프롤레타리아트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는지 신중히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근대 이후 사회의 기능적 분화와 관련하여 대의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의 중요성이 증대되어 왔다는 주장을 대폭 수용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선거와 ‘자기지배의 실현’이라는 민주주의의 동일화를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수단 가운데 하나이며 따라서 그것을 민주주의 그 자체로 보는 발상을 차용하는 것은 그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진보와 무관한 보수정치(학)의 신조, 슘페터의 주장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본주의는 결코 민주주의와 어울릴 수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항상 복수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 가운데 그들이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그 어떤 것과 조응할 뿐이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는 생산현장에서는 물론 다양한 영역에서 재생산되는 비대칭적인 사회관계를 매개로 타자를 수탈, 착취, 억압, 배제함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 신자유주의 지구화시대의 특징, 즉 권력과 부를 독점한 10%와 그렇지 못한 90%의 긴장과 대립은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자본주의가 자기지배의 실현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기에 그것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라는 사안과 연관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자연적 질서로 포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최선이라고 강조한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부당한 사회관계들과 그로부터 야기되는 갈등과 대립에 의해 추동되는 역사를 외면한 채, ‘역사의 완성’을 말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극복의 대상임을 공지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민주주의운동이 어떻게 그 해소, 극복의 대상과 함께 어울려 갈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렇다면 자본과 그것이 지배하는 사회관계들을 해소, 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실현과 관련하여 핵심 과제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를 위한 다양한 발상과 시도가 존재해 왔다.
한편으로 민주주의에 대해 ‘최초’로 긍정성을 부여해 준 루소는 ‘불평등한 재산’이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는 주범이라는 점에 주목하였고 그래서 그는 일정한 재산을 지닌 성원들로 구성된 ‘비산업적 도시공동체 공화국’을 민주주의의 모델로 설정하였다. 하지만 이 발상은 실현될 수 없었다. 이윤추구와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한 생존이라는 자본의 지상명령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역사적 사회주의’의 실패 이전에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이른바 낭만주의적, 공상적 발상과 그에 따른 시도들 또한 여지없이 실패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러한 시도 자체가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그 뒤를 이어 이른바 ‘프롤레타리아트독재’, 그것의 다른 이름인 ‘프롤레타리아트민주주의’가 현실 속에 나타났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넘고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과도기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설정되었고 그런 맥락에서 보면 민주주의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역사는 그 사회주의의체제의 붕괴로 이어졌고 지금 그것은 무늬만 남아 있다. 여전히 공식교리로서의 사회주의를 놓지 않고 있는 중국은 글로벌 신자유주의체제를 떠받치는 강력한 축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 지금 중국은 혁명이라는 상징 대신에 세계공황의 중요한 진원지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이런 변화된 상황 속에서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자본주의는 승리를 말하며 그 안팎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해소와 극복을 둘러싸고 전개된 수많은 토론과 실천은 이제 종착역에 이른 것이다. 아니 그것의 다른 한 면인 자본주의의 등장 및 기원을 둘러싸고 전개된 상이한 논의들 가운데 무엇이 적실한 것이었는지도 이제 판가름이 난 것이다. 자본주의는 억압되어 있던 “교역하고 거래하고 교환하려는 인간본성”이 이런저런 봉건적 장애물의 제거와 함께 자연스럽게 드러난 필연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에 반하는 모든 정치적 시도와 실천은 이제 한갓 봄날의 꿈일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 그런가. 시장과 상업이 일정 정도 성숙해지고 부가 쌓이면 자본주의는 자연스럽게 등장하는가. 자본주의 소유관계의 변화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과연 시장이 모든 사회관계를 자신의 영역 안에 배열, 배치시킬 수 있었을까.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그렇다’고 대답하며 그 역사성을 부정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걸음을 멈출 것이다. 만일 ‘아니다’라고 대답한다면, 민주주의는 다시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물론 ‘역사적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는 단순한 실패를 넘어 지금 민주주의운동을 제약하는 커다란 장애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의 실패가 자본주의사회관계의 제어와 극복을 회피하도록 정당화시켜주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 국가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우회하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따라서 ‘역사적 사회주의’와 ‘역사적 프롤레타리아트민주주의’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더 민감하게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반복하여 물어야 한다. 사회주의는 무엇일까, 왜 실패하였는가. 이 지점에서 다시 슘페터로 돌아가자. 이미 살펴본 대로 그는 자신의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대중이 대리자로서의 엘리트를 뽑는 행위 아니던가. 그리고 그가 사회주의에서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서의 그것보다 더 기만적일 수 있다고 진단한 것은 현실로 나타났다. 이른바 무오류의 당이 바로 그 대리자로 전화하여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지배의 실현, 즉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결속력을 의심하며 그것을 최소한의 절차에 가두어 두었던 이 보수학자는 진보에게 의도하지 않은 커다란 교훈을 남겨주었다. 그것은 사회주의와 ‘영도권을 둘러싼 엘리트들의 경쟁과 대중의 선택’을 핵심으로 하는 그의 민주주의가 결코 어울릴 수 없음을 알려준 것이다. 만일 자본주의가 ‘인간본성의 자연적 표현’이고 사회주의와 그의 민주주의가 어울릴 수 없는 것이라면, 선택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사회주의를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민주주의를 한정짓고 민주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단지 ‘경제’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정치 그 자체이다. 정치의 내재화테제가 자본주의사회에서 나타나는 ‘정치와 경제’, ‘국가와 사회’로의 형태분리를 ‘정치와 국가의 외적 자립’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라면, 그런 맥락에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스스로를 지양하고자 하기에 그 자체가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이고 따라서 꼬뮌주의이다. 정치인 것이다. 그렇기에 거기에서 대중은 영도권을 둘러싸고 경쟁하는 엘리트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조직하고 외치고 요구하며 결정해야 한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보비오(N. Bobbio)가 “사회주의가 어렵다면 민주주의는 더 어렵다.”고 한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물론 그의 주장은 루소가 언급하였듯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 실현’이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며 실현가능한 방안으로서 대의민주주의에 근거한 ‘자유사회주의’로의 실천을 위한 언술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최선을 쟁취하려는 것에 대해 환상을 가지지 않는 것이, 다른 한편 가장 나쁜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자’라는 그의 조언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최선과 최악의 사이 어디쯤에 존재할 그 ‘현실의 민주주의’는 ‘자기지배를 위한 현실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결과이자 해소, 극복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즉 민주주의는 미리 어떤 양극의 경계를 설정해두고 그것들 사이에서 ‘중도’, 혹은 ‘제3의 길’을 찾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다만 그것들은 가능한 결과들, 즉 ‘현실의 민주주의’ 중 특정한 것에 대해 사후에 이름표를 붙이고 긍정적 가치를 부여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는 대당으로 놓고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사회주의가 어렵다면 그것은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고 빈곤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그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 된 이유가 대리주의에 있었음을 밝힌 슘페터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그의 민주주의와 철저히 단절해야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4. ‘진부한 것’에 대한 보충 질문

1) ‘운동(정치)’와 ‘제도정치’의 관계

진보진영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문제 가운데 하나가 운동과 제도정치(정당)의 관계이다.
현대사회에서 정당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상이한 견해들의 존재하지만, 제도정치는 결코 민주주의와 동일시될 수 없다. 부언하자면 거기에 그 어떤 수식을 붙이더라도 그것은 진보정치와 무관하며 보수정치(학)가 지니고 있는 핵심의 변주일 뿐이다.
무엇보다 거기에는 다양한 영역에 산재해 있는 주권자, 아니 대중이 자기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을 왜소하게 만들거나 부정하는 혐의가 깔려 있다. 그 목소리와 행동을 정치, 민주주의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그리하여 이른바 제도정치의 스크린을 통과해야만 공적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으로 판정한다. 따라서 ‘사적인 것’으로서의 대중의 역동성’은 제도정치 앞에 다다르면 발걸음을 멈추고 작아진다. 왜냐하면 법, 제도가 설정한 범위를 넘나드는 그들의 목소리와 행동은 정치, 민주주의 그 자체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한 것’, 훈육의 대상으로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 주권자인 대중이 선거 때를 제외하면 항상 노예로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각인되어 있다. 지금 청계천, 시청 등 도심 여기저기에서 촛불을 들고 미국산소고기수입에 항의하는 대중의 목소리와 행동을 두고 ‘정치집회’라고 비판하며 그들을 막고, 가두는 행태들은 이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정치, 근대 이후 그것의 핵심이 된 민주주의, 따라서 권력이 국가와 제도정치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것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비대칭적인 사회관계들에 내재되어 작동되고 있다는 내재화론은 이미 공론이 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제도정치’는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정치의 한 부분이며 이것은 선거와 민주주의가 동일시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운동이 정치가 아니라면 무엇이 정치인가. 지금 이명박정권이 대중의 거리집회를 ‘문화공연’이라는 조건을 달아 승인하고자 하는 것 또한 이미 문화에 정치가 내재화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하면서 정치를 독점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결속력을 의심하면서 거기에 내재되어 있는 대중의 자발적이고 전복적인 성격을 제거하려는 보수정치(학)의 또 다른 행태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운동’과 ‘제도정치’를 대립시키는 것은 진보, 좌파와는 무관한 발상이다. 보수정치(학)가 제도정치를 민주주의로, 혹은 정치 그 자체로 승인하는 것에 대응하여 ‘운동’만을 민주주의, 정치로 말하는 것 또한 단지 양자를 전도시키는 것일 뿐 그것을 지양할 수 없다. 물론 대중의 자기지배실현과정으로서의 운동은 정치의 핵심인데, 무엇보다 거기에는 대중을 규율하고자 하는 제도정치와 달리 대중의 주체화를 위한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단순히 ‘제도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운동이 끊임없이 재구성된다는 전제 아래서만 그렇다. 즉 ‘제도 안이냐, 밖이냐’ 여부가 민주주의운동 아래에서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예외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기각시키지는 못한다.
이 지점에서 진부하지만,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제, 즉 ‘제도정치는 기존의 부르주아적 규칙과 절차를 수용하는 것이기에 체제 안으로 수렴된다.’는 ‘개량화테제’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부르주아적 이해가 각인된 기존의 룰과 절차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그렇다. 제도 안에 진입하는 순간 여러 이점이 반대급부로 제공되기에 그런 경향은 더욱 강화된다.
그런데 이러한 진부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렇다면 제도 밖의 운동(정치), 제도 외부의 정당은 변혁적인가. 이 점과 관련하여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제도화, 체제내화가 단지 제도정치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제도화를 기존의 사회관계를 수용하고 그것을 자연적 질서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오히려 제도정치의 밖, 이른바 시민사회의 얽히고설킨 관계들의 그물망이야말로 체제내화의 깊은 뿌리가 자리 잡고 있는 핵심영역이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언술처럼 일상적 삶과 경험에 뿌리를 둔 상식(common sense)과 맞물려 재생산되기에 단편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엉성한 듯하지만 매우 질기다. 상식은 ‘대중적 민속종교’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정치로의 진입 이전에 이미 진보정치는 체제내화의 온갖 덫에 걸려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핵심은 ‘제도냐 제도 밖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것들이 ‘자기지배의 실현’에 기여하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에 있다. 이른바 제도 외부의 정치이든, 제도정치이든 그것이 민주주의에 기여하고 있다면, 즉 대중이 그 원리를 학습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기제라면 그것을 ‘정치의 외부’로 설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제도정치는 대중의 외부에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이라는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고 여전히 투쟁의 대상이며 따라서 재구성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제도정치 속에서 결정된 것이 사회구성원 모두를 규정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리고 그 속에 대중적 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기회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미리 부정할 필요는 없다. 아니 기회가 없다면 만들려고 시도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도 안이냐. 밖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을 넘어서고자 하는 기획과 실천들이 담보되고 있는가 여부이다. 사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외견상 ‘개량화테제’는 제도정치만을 ‘공적인 정치’로 규정하는, 그것만을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보수정치(학)의 이분법적 문제설정을 첨예하게 비판하고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이분법의 범주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국가권력, 제도정치를 통해 문제의 근원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지 않지만, 그것으로 나아가는 도상에서 가장 강력한 장애물로 현존하는 그것을 무시하는 전략 또한 수용해서는 안 된다. 국가와 제도정치의 안팎에서(in and against) 민주주의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진지를 강화시키면서 정치의 지형을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것만이 그 희망을 보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지역정치와 풀뿌리민주주의, ‘규모와 수단’ 문제로의 회귀라는 역설

지역정치, 풀뿌리정치를 실현해야 민주주의가, 진보가 산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중앙정치와 지역정치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흔히 풀뿌리 지역정치를 주장하는 발상은 ‘더 많은 민주주의’로의 진전, 혹은 민주주의의 위기가 중앙정치의 반민주성, 혹은 패권정치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를 두 개의 영역으로 분리, 대립시키는 기존 정치세력들,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논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측면 또한 지니고 있다. 지난 2006년 지방선거에서 횡행했던 슬로건이 무엇이었던가. ‘중앙정권심판론’과 ‘지방정부심판론’이 아니었나.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발상이 민주주의 혹은 진보를 강조하는 논의와 운동에서도 일정하게 공유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역정치를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풀뿌리민주주의론’이 대표적이다. 물론 논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경향적으로 ‘풀뿌리민주주의론’과 그에 근거한 지역정치론은 기존의 중앙정치를 위임(mandated)정치로 규정하면서 지역주민의 자발성에 근거한 참여정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기존의 주류시민운동 또한 제도정치와 전문가주의에 매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풀뿌리대중운동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기존의 국가 혹은 중앙 중심의 제도정치와 주류시민운동의 제도화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지만, 이 발상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점을 내장하고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빈곤, 위기의 원인이 단지 중앙의 비민주적 패권정치 때문만이 아니라 그와 연결된 지역의 소(小) 패권적 정치들이 존재하기에 결과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시(지역: 인용자)의 사회적, 경제적 유력인사들이 국가전체의 권력구조와의 연관 속에서 연구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될 수 없으며 그것은 소규모의 권력구조에 지나지 않는다.”는 고전적 비판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특정한 사회체제는 국가와 시민사회, 이른바 ‘국가수준의 거시정치’와 ‘지역이라는 미시정치’의 내밀한 결합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 발상은 그 인식 여부와 무관하게 민주주의를 소규모의 지역공동체에 의해서만, 혹은 그것의 확장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공간의 문제, 그와 연결된 직접민주주의라는 수단의 문제로 대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즉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민주주의의 실현 문제를 ‘공간의 규모와 수단의 문제’로 대치시키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규모와 수단이라는 조건을 들며 ‘직접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대의민주주의’를 가장 현실성 있는 것으로 옹호하는 세력이 ‘풀뿌리민주주의론’이 그토록 비판하는 바로 그 중앙정치, 지역정치를 주도하는 사회정치세력들이라는 점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사고 틀 속에 갇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풀뿌리민주주의’가 소규모 공간에 정주하는 지역주민들의 직접참여를 아무리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러한 주장은 애초 민주주의가 중앙, 지역 할 것 없이 상이한 시공간에서 직간접의 다양한 수단을 통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이라는 점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민주주의는 그 공간의 규모와 무관하게 애초 ‘풀뿌리민주주의’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앙정치에 대한 반정립으로서의 지역정치 또한 동일성의 정치가 더욱 심각하게 작동되는 장소라는 점이다. 특히 사안이 미시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미치는 이해관계가 더 직접적이기에 그 사안의 처리과정과 결과에 매우 민감하고, 따라서 ‘중앙정치’보다 더한 이전투구의 장이 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역 또한 동질적인 그 어떤 삶의 공간이 아니라 비대칭적, 억압적, 배제적인 사회관계들의 복합적 구조로 구성되어 존재하며 따라서 거기에서의 정치 또한 다양한 모습으로 타자를 만들어내고 그들을 배제, 억압하면서 관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무언가 지역의 동질성을 미리 전제하는 선험적 논의들, 생산과 소비가 합치된 낭만주의적 소공동체주의에 근거하고 있는 풀뿌리운동의 모든 발상들은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작은 것은 아름답다.”라는 언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지역의 현실을 감추고 왜곡시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지배효과를 조장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오히려 작은 것이 더욱 심한 악취를 내기도 하고 또 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적 문제의식으로부터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빈곤, 위기의 원인이 국가, 중앙정치 등 지역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와 연결되어 작동하는 지역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국 단위의 ‘중앙정치’를 이른바 지역정치와 대당으로 설정하면서 제기되는 ‘민주주의와 지역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라는 우회적 질문은 ‘지금 지역의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며 그 장애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소,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좀 더 자기성찰적인 질문으로 대체될 필요가 있다. 특히 타국과 비교해 볼 때, 그 자체가 하나의 지역으로 간주될 수 있을 만큼 협소한 공간적 규모로 이미 ‘신자유주의 중앙정치’의 판단과 결정에 지역의 생산, 문화와 삶 자체가 긴밀히 포섭되어 있는 한국사회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진보의 재구성’을 위해 지역정치의 활성화를 화두로 내세우는 정치세력들이 지금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진보를 자임하는 ‘풀뿌리민주주의운동’이 넘어야 할 장애는 무엇인가. 그것도 여전히 ‘중앙정치’의 자유주의정치세력과 보수정치세력이 압도할 뿐만 아니라 그나마 기존의 지역운동들 또한 상당 정도 제도화되어 있는 조건들 속에서 말이다.

3) 환경‧생태운동, ‘잔여정치’를 넘어

지역과 풀뿌리민주주의만큼이나 환경, 생태문제는 이 시대 정치의 중심적인 코드이다. 어떤 사회정치세력이든지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진 것이 된 지 오래다. 물론 그 안에도 여러 가지 상이한 발상들이 자리 잡고 있지만 말이다.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그것이 ‘근대적 발상과 실천’ 이외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한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환경, 영성, 문화, 젠더와 섹슈얼리티 등 전통적으로 배제된 문제들을 정치의 영역으로 가져왔다고 말한다. 또한 그것은 자율정치, 매개정치, 전환의 정치, 차이의 정치, 상생의 정치, 풀뿌리정치, 삶의 정치, 소수자정치, 지구정치, 네트워크정치, 관계의 정치 등 수없이 많은 것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기도 한다. 일정 부분은 수긍할 수 있고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며 어느 것은 과도한 주장이다. 물론 이것이 환경 및 생태운동이 이룬 그 동안의 계몽적 성과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처럼 포괄적인 자기규정이 비판받을 일은 아니지만, 그것들을 실천하고자 할 경우, 그 사이에는 적지 않은 긴장과 모순, 대립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러한 가치들 사이의 관계가 여전히 불분명하고 대중적으로 공유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지만, 그것을 추진할 수 있는 가용자원 또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지하듯이 환경, 생태의 문제는 결국 인간에 의해 촉발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역사적 인간관계 때문에 발생한다. 만일 인간이 단순한 하나의 종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면 ‘환경재해, 생태파괴’ 등은 그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비대칭적 사회관계, 그 안에 내재된 권력관계들을 매개로 재생산되는 인간사회가 존재하기에 환경 및 생태문제는 그에 의해 재구성되며 그 문제의 심도 또한 양상을 달리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그 장애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환경, 생태 문제의 치유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지금 이 순간 지구를 넘어 우주마저 이윤의 도구로 삼는 자본주의가 있다. 그렇기에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대결하지 않는 이상 지속가능한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오히려 그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자본과 그것이 지배하는 시장의 주위에서, 그것이 부여하는 제한적인 틈새에서 결국 그것의 작동을 합리화시켜주는 도구로 기능할 가능성이 더 크다. 이것은 환경, 생태운동이 자본주의가 자신이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점을 선전하기 위해 구사하는 일종의 ‘구색 맞추기 정치’에 동원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환경, 생태운동이 이런 모습을 노출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런데 우려스러운 것은 환경, 생태운동의 발언이 양질의 측면에서 커지고 있음에도 과거에 대한 기억이 이 운동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점이다. 특히 ‘진보의 재구성’과 관련하여 더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음에도 ‘역사적 사회주의’의 그림자에 눌려 위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아쉬움이 존재한다.
문제는 자본주의는 지금 지배적인 현실권력으로 존재하는 반면, ‘역사적 사회주의’는 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그로부터 교훈을 끌어내는 것은 분명 ‘더불어 사는 미래’를 보듬어 가는데 있어서 수행해야 할 중요한 작업이지만, 운동(정치)의 대상이 지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실의 관계들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는 것 또한 더 더욱 중요하다. ‘과거의 기억’이 현실의 문제를 넘는 데 장애로 기능하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미 지적한 바대로 사회주의의 실패 원인에 주목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왜 그 이전에 환경, 생태주의에 영향을 미친 이른바 낭만주의적, 공상적 발상과 소공동체운동들이 실패하였는지 그 원인 또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두 유형의 역사적 실패로부터 배우면서 왜 지금 환경 및 생태담론이 중요한 코드로 등장하고 있는가를 숙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자본주의의 극단적 반동형태인 신자유주의가 일국적, 지구적 수준에서 대중의 삶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과 긴밀히 맞닿아 있다. 신자유주의는 공유(공)재의 종획(enclosure)을 통한 자본의 이해창출을 목적으로 환경 및 생태파괴를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명박정권이 추진하는 한반도대운하건설사업, 시장으로의 공기업방출을 통한 물사유화 등은 이것의 구체적 표현 아닌가.
환경, 생태운동이 근대의 가치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더욱 현실적인 운동이 되어야 한다. 아직도 ‘반자본주의’가 아니라 ‘비자본주의’를 제시하면서, 혹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역사적 사회주의’의 그림자에 눌려 자본을 우회하여 이른바 ‘제3의 길’을 통해 그 어떤 대안사회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환경, 생태운동의 본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근대가 뿌려 놓은 장애와 그늘에 놀라 그에 대비되는 이런저런 가치들을 모아 놓고 나열하는 것이 환경‧생태운동의 참모습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잔여의 정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외되고 주변으로 내몰리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잔여의 정치’로 표현되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환경, 생태운동에 내장된 ‘생동의 정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운동일수록 더욱 민주주의적이고 코뮌주의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것 아닐까.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공존’을 지적하면서도 자본주의와의 대결이 노동운동의 과제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을 하나의 단면으로 쪼개는, 따라서 환경‧생태운동의 발상이나 실천과는 전혀 융합할 수 없는 경제주의의 또 다른 표현 아닌가.


5. 진보의 재구성, ‘기나긴 혁명’(long revolution)

지금까지 식상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진 것은 이른바 진보의 재구성을 위해 어떤 발상과 실천이 필요한가를 곱씹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이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여기 진보의 재구성을 바라고 실천하는 세력들이 있다. 진보신당은 물론 한국사회당, 제도 밖의 노동자의 힘, 사회주의정치연합, 초록정치를 내거는 세력들이다. 각기 상이한 내용과 방식으로 정치를 전개해 오면서 서로 긴장, 대립하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였다. 지금 이들은 전체 운동의 지형변화를 염두에 두면서 각자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무엇이 문제였고 따라서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식의 성찰과 함께 향후 행보를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필요한 그 무엇이 더 이상 자신의 외부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반자본주의를 실천하는 노동운동의 외부에 환경‧생태운동이, 환경‧생태운동의 외부에 생명과 평화운동이, 생명과 평화운동의 외부에 페미니즘운동과 소수자운동이, 그리고 페미니즘운동과 소수자운동의 외부에 반자본주의 노동운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삶을 구성하고 있는, 착종되어 있는 모든 부면이다. 따라서 지금 서로를 부르는 이유가 기존의 ‘자신의 것’ 위에 그 무엇이 더해지면 잘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라면, 더 나아가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 다시 숙고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더 나아간다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반자본주의의 노동운동, 환경운동‧생태운동, 생명‧평화운동, 페미니즘운동, 소수자운동 등이 지금 자신들이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하는 영역에 대해 독점권을 말하고 여타의 것을 부차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스스로가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코뮌주의의 극복대상임을 선언하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이제 이런 맥락 위에서 ‘진보의 재구성’과 관련하여 몇 가지 지적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첫째,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논의의 목표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함께 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것은 이 논의가 산출할 수 있는 하나의 예상가능한 결과일 뿐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자리가 서로 내세우는 가치와 그것의 관계, 그리고 실천들이 각자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는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조직형식에 대한 논의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이러한 합의와 공유는 새로운 정당건설을 함께 하는 것을 포함하여 다차원의 연대를 가능케 할 진정한 토대가 될 것이다. 만일 이것이 확인, 공유되지 않는다면, 기존의 기계적 운동의 관성은 되풀이 될 것이고 대중의 역동성과 무관하게 진보운동은 지리멸렬한 상황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둘째, ‘진보의 재구성’은 상이한 부면의 사회관계들, 권력관계들의 재구성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이는 정치의 확장과 재구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보의 재구성’은 진보정당의 건설이라는 목표에 국한될 수 없으며 운동정치의 재편 또한 중요하게 고민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양자의 관계는 새로이 편제되어야 한다.
셋째, ‘진보의 재구성’을 둘러싼 논의는 지금 현실적인 정치적 역량과 무관하게 제3지대의 동등한 출발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 안에서 ‘지분나누기식의 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각자가 거둔 성과와 오류는 참고서로서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촉진제가 되어야 하지, 특정한 세력들이 더 많은 지분과 발언권을 차지하기 위한 자원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조직 보존’의 논리가 진보운동에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용인하는 것은 애초 ‘진보의 재구성’에 관심이 없었음을 확인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넷째, 따라서 과거 운동의 경험과 기억에 근거하여 특정세력을 배제하고 논의 자체를 왜곡시키는 것 또한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발목 잡아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가장 발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세력들, 즉 가장 민주주의적이고 코뮌주의에 입각해 있다고 생각하는 세력들이 스스로를 던지는 결단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제도 안이든 밖이든 불균등한 조건들 속에서 운동을 전개하는 세력들이 함께 연대하고자 할 때, 그런데 그것이 병목지점에 있을 때,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세력이 진정한 민주주의자이고 코뮌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자신을 던지지 않는 정치세력에게 진정성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진보의 재구성’은, 그것이 아무리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정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학습하고 삶을 탐색하는 ‘지식인들의 동호회’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균등한 대중 앞에 자신의 장점과 치부를 모두 드러내는 운동들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거리에서 다양한 파장과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는 대중의 목소리와 몸짓은 ‘진보의 재구성’을 재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중들은 그 속에서 자신들과 함께 할 정치세력이 누구인지 촉각을 세우고 있다. 그 현장에서 스스로를 크고 작은 운동의 지도자라고 믿는 사람들, 집단들이 거부되고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생동하는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 번 지나가면 당분간 다시 올 수 없을지도 모를 이 귀중한 계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논의는 가능한 신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것이 삶의 다면적 관계들을 변화시켜나가는 것을 자기 목표와 과제로 설정할 수밖에 없는 만큼, ‘기나긴 혁명’(long revolution)을 위한 진중한 첫걸음이 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누구를 중심으로 모이는가보다 무엇을 위해, 왜 모이는가가 더욱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지배적 흐름에 대항하여 대안적 삶의 모습이 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내 줄 수 있는 정치적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진보, 좌파, 코뮌주의를 내세우는 사회정치세력들은 대중 속에서 끊임없이 걸어야 한다. 자신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2008-06-20 16: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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