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사회가 새로운 정치 시대로 접어들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십년간의 중도우파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보수우파 수중으로 정치권력이 돌아갔다. 청계천 복원을 등에 업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 개인으로서는 마침내 ‘청계천에서 용이 나는’ 신화를 이루었지만 ‘선진화’를 기치로 내세운 이명박 정부 시기는 이전부터 예상했던 대로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재벌을 위시하여 가진 자 위주의 경제 및 사회 정책이 추진되면서, 사회적 양극화는 더욱 심하게 초래될 것이다. 경제를 살려달라는 기대로 이명박에게 표를 찍었던 국민들 대다수는 이전보다 더 어려운 처지로 내몰리게 될 것이며,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직접 체험하게 될 것이다.
보수우파 세력의 집권과 함께 시작되는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좌파에게는 헤쳐 나가야 할 수많은 새로운 과업들이 부과되고 있다. 사회적 갈등은 더욱 증폭될 것이고, 대중들의 사회적 불만이 도처에서 터져 나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좌파는 대중 투쟁에 함께 동참하고 투쟁하면서 사회정치세력으로서 그 입지를 넓혀 나가야 할 것이고, 대중적 좌파 정치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사회적 과제를 떠맡기에는 아직 한국의 좌파는 제대로 태세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제도권 의회정치로의 정치세력화를 시도한 민주노동당은 자신에게 주어졌던 민중의 지지를 정치적 세력기반의 확대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당이 분열되면서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위기적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제도권 밖에서 현장 운동정치를 추구해온 좌파 세력들도 변혁적 진보정당의 건설을 시도하고 있으나, 여전히 80년대의 정치조직론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며,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를 견인해 갈 좌파 정치의 새로운 그림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런 식의 변혁적 좌파정당의 건설 노력은 결국 기존에 흩어져 있던 좌파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결집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모르나, 이 울타리를 넘어 민중의 지지에 기반을 둔 대중적 정치세력으로의 확대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현대 정치의 본질은 대중의 지지를 어떻게 이끌어내는가에 있다. 20세기 초의 레닌의 전위전당론도 당시의 조건 속에서 광범위한 러시아 인민의 정치적 지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기에 가능했다. 21세기 좌파의 정치는 현재의 조건을 숙고하여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강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20세기 변혁적 좌파들에게 거의 금기가 되어온 정치적 공리들부터 재고해야 한다. 사민주의와 의회정치에 대한 태도와 관계를 다시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변혁적 전망을 포기하고 체제 내에서의 개량을 추구한다고 해서 사민주의를 경원시할 것이 아니라, 우파에 대해서 좌파의 정치적 지지를 확대시킬 수 있는 차원에서, 필요하다면 서로 협력하는 탄력적인 관계를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의회정치가 20세기에 부르주아 세력이 대중을 자신의 지배체제 안에 포섭하는 정치적 지배장치로 전락되었지만, 포섭된 대중들이 의회정치의 정치적 정당성을 승인하는 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하는 정치적 관점에서 의회정치를 외면만 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를 넘어서 대안을 추구하는 변혁적 정치도 대중의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중의 지지를 확보해 나가기 위해서 좌파의 정치는 의회정치와 운동정치의 양 정치공간을 횡단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현재 좌파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러 정치적 시도들이 신자유주의의 본격화에 의해 분출될 대중의 사회적 불만과 저항을 좌파의 정치적 지지 기반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35호 특집은 한국에 이름은 알려져 있지만, 앞으로 좀 더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한 서구 좌파 이론가들의 사상을 소개하는 자리로 꾸렸다. 이번 호에는 뤼스 이리가레, 휄릭스 가타리, 알랭 바디우, 슬라보이 지젝, 필리페 반 빠레이스, 마이클 레보위츠의 사상을 소개하는 글을 실었다. 이외에도 다나 헤러웨이, 데이비드 하비, 프레데릭 제임슨, 테리 이글턴, 쟈크 비데, 쟈크 랑시에르, 빠올로 비르노, 레이몬드 윌리암스, 가라타니 고진 등에 대한 글도 기획하였으나, 세계화 시대의 무한경쟁 속에서 바쁘게 살아야만 하는 필자들의 사정으로 실리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에 여건이 되는 데로 개별적으로라도 실을 것이다.
뤼스 이리가레에 관한 글은 필자 황주영의 석사학위논문을 요약한 글로 이리가레의 여성주의 철학 사상의 핵심적인 부분을 잘 정리해 주고 있다. 가타리에 관한 글은 요즘 들뢰즈로부터 가타리의 이론적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는 윤수종이 가타리의 생태학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의 비판자로 국내에 알려져 온 바디우에 관한 글은 바디우의 제자인 서용순이 집필하였다. 서용순의 글에서는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을 넘어 철학자 바디우 자신의 사상이 일목요연하게 소개되고 있다. 지젝에 관한 글인 󰡔대상 Ž󰡕는 지젝의 한국어 번역을 주도해 온 이성민이 집필하였다. 이데올로기 문제와 헤겔과 맑스, 레닌을 새롭게 살려내려고 시도하고 있는 지젝의 사상이 소개되고 있다. 아마도 이번에 소개되는 6인의 사상가 중에서 국내에서는 가장 덜 알려져 있을 빠레이스에 관한 글은 요즘 21세기 사회주의의 대안적 전망에 몰두하고 있는 곽노완이 썼다. 최근 유럽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기본소득’과 ‘사회연대소득’ 논의를 21세기 사회주의의 대안적 전망으로 제시하고 있는 곽노완은 기본소득론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빠레이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이로부터 자신의 발전된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레보위츠에 관한 글은 국제적인 좌파 운동에 관심을 기울여온 원영수가 집필하였다. 원영수는 최근 사회주의의 새로운 현실적 대안으로 전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베네주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에 21세기 사회주의혁명으로의 성장과 전화를 위한 이론적-정책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는 레보위츠의 사상을 볼리바리안 혁명의 실천 과정과 연관시켜서 소개해 주고 있다.
특집에 이어 정세에서는 물사유화 정책에 대해서 송유나가 다루었다. 물자원을 사유화하려는 자본의 이윤 욕구에 의해 추동되고 있는 한국의 물산업 육성정책을 고발하고, 물사유화가 가져올 사회적 폐해에 대해 파헤치고 있다. 발언대에는 요즘 한창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동대문운동장 철거문제가 올라왔다. 빈민연합의 최인기는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에서 드러나고 있는 ‘신개발주의’의 허구성과 반민중성을 고발하고 있다.
일반논문으로는 가출 청소년/청소년(추주희), 환경(김민정), 거버넌스(황진태)에 관한 글 세편이 실렸다. 논문 모두가 좌파의 시야를 확대하는 새로운 주제나 새로운 시각을 다루고 있는 글들로서 글을 써준 필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앞으로도 이런 참신한 주제들에 관한 글들이 많이 투고될 수 있기를 바란다.
서평에서는 이현재의 책, 󰡔여성의 정체성-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연효숙), 김영수의 책, 󰡔과거사 청산, ‘민주화’를 넘어 ‘사회화’로󰡕(김현태), 그리고 󰡔진보평론󰡕을 중심으로 전개된 정보재가치논쟁에 관한 글들을 묶어 출판한 󰡔정보재가치논쟁󰡕을 다루었다. 󰡔정보재가치논쟁󰡕에 대한 조원희의 서평은 서평이라기보다는 논쟁의 연속에 가까우며, 논쟁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명쾌하고도 비교적 재밌게 다루고 있다.
이번 35호는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글이 새로운 사상과 사건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정보적 성격이 강한 글들로 구성되게 되었다. 바쁜 일정 중에도 옥고를 써주신 필자 제위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3.

󰡔진보평론󰡕이 35호를 내기에 이르렀다. 1999년 가을 창간호를 발간한 이래로 8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8년 이상의 시간을 지속해 온 것만으로도 좌파의 잡지로서는 대단한 기록이다. 솔직히 ‘지속해’ 왔다는 것보다 ‘버텨왔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지도 모른다. 그동안 재정적인 문제, 󰡔진보평론󰡕의 편집방향에 대한 설왕설래, 독자들의 무관심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리 편집인들은 ‘그날’이 올 때까지 그 누군가는 자리를 지켜야한다는 일념으로 버텨왔다. 앞으로도 󰡔진보평론󰡕은 ‘그날’을 맞이하게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물론 󰡔진보평론󰡕은 더 신선하고 나은 내용들을 발굴하여 회원과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의제의 생산을 위해 배전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며, 이를 위해 젊은 연구자들이 새로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토록 할 것이다. 앞으로 󰡔진보평론󰡕은 회원과 독자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갈 것이며, 회원과 독자 제위의 애정과 관심을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