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생명과학·의학 연구자들은 인체연구윤리가 사회적으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견해를 같이 한다. 오늘날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관한 윤리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치료적, 비치료적 실험을 포함하여 인체와 관련된 모든 연구의 윤리를 포함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임상시험, 인간배아, 인간태아 적출물, 인간의 장기·혈액·체액·세포 등 인체구성물 연구, 인간유전체 연구, 인간집단유전학 연구 등이 포함되는데, 각각의 연구 분야는 고유한 윤리적 문제들을 포함한다. 그와 더불어 공통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인체 연구에 관련된 일반적인 윤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각 나라 및 지역 별로 윤리지침이 있으며 인체 연구에 대한 보편적인 국제적 윤리 선언과 강령도 있다. 이렇듯 인체연구윤리가 체계적으로 확립된 것은 인류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와 실험의 위험성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지만 인체연구윤리에 가장 큰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은 2차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강령을 채택한 일이다. 의사의 성실성이 핵심이던 히포크라테스 선서 이래 2000여년 만에 의학연구 대상자(피험자)들의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자발적인 동의(informed consent)’가 인체연구윤리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천명된 것이었다.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체제와 2차 대전을 배경으로 자행된 인체실험의 끔찍한 경험을 반성하는 과정에서 배태된 뉘른베르크 강령은 그 이후 인체연구윤리의 국제적인 기준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유전체 연구, 인간복제, 줄기세포연구 등 의학연구에 대한 윤리적, 사회적, 법적 논쟁이 더욱 가열되는 현실에서 인체 관련 의학연구에 관한 국제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1. 나치 독일의 인종위생학과 우생학

인체실험의 역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과거의 전쟁들과 달리 2차 세계대전에서는 과학과 의학이 전쟁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의학연구가 국가의 강력한 지원 아래 대규모로 조직화되었다.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모두 의학연구를 전쟁 수행의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고, 연구내용은 군인들의 질병 관리와 세균전 등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들 나라들은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연구 대상자들의 복지와 인권에 대해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정신병원과 감옥 등에서 수감자들에게 말라리아 병원체를 대량 투입하고 실험용 해독제를 주어 재발율과 부작용을 조사했다. 죄 없고 ‘정상적인’ 사람들도 군인으로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마당에 범죄자나 ‘미친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또한 의료인들은 자신들의 의학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전쟁에 활용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도록 독려되었다. 영국에서도 상황이 비슷하여 의학자들은 평상시 하던 연구를 중단하고, 국가에서 명령하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연구에 집중하였다.
독일과 일본 역시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의학지식과 기술을 얻기 위해 강제수용소의 수용인들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을 자행했다. 전쟁 승리를 목적으로 진행된 연구에는 세균전, 화학전에 관련된 생체실험과 압력, 추위 등 물리적 요인에 관련된 인체실험들이 있었다. 전쟁 수행을 위한 인체실험은 참전국들의 공통적인 모습이었지만, 나치 독일의 인체실험은 우생학에서 출발하여 인종말살에 이르는 특히 반인륜적인 범죄였다.
나치의 인체실험은 사회구성원 전체, 특히 의료인들의 도덕적으로 모호한 입장에서 출발하여 점차 미끄러운 경사길(slippery slope)을 거쳐 결국에는 엄청난 도덕적 재앙을 초래한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이다. 나치 독일의 ‘인종위생학’에 대한 이해 없이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반인륜적 범죄들의 근원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나치 독일은 ‘좋은 유전자’를 보존하고 ‘나쁜 유전자’를 소멸하기 위한 우생학을 국가의 보건정책으로 채택하였다. 다윈의 진화론과 유전학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번안한 나치의 우생학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 국가가 개입하여 나쁜 유전자는 제거하고 좋은 유전자만을 남긴다”는 이론이자 사회정책이다. 당시 많이 쓰였던 우생학적 방법은 국가공권력으로 정신병자, 부랑아, 정신박약아, 유전성질환자, 범법자들에게 강제로 불임시술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우생학을 가장 널리 잔인하게 사용한 나라는 독일이지만, 우생학의 선진국은 미국이었으며 나치 독일은 초기에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의 우생학 운동가 다이트는 1930년대에 인종 개량을 위한 강제 불임시술을 주장했고, 히틀러와 이에 대한 서신을 주고받았다. 미국은 1970년대까지도(!) 캘리포니아 주에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대규모 불임시술을 행했다. 독일에서 우생학에 가장 빨리, 가장 많이, 가장 열성적으로 호응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의료인이 많았다. 그들은 국가사회주의는 ‘응용생물학’이라고 칭송했으며 히틀러를 ‘독일의 의사’라고 예찬하였다. 히틀러는 그러한 의료인들에게 화답하였다. 유태인 의사들과 사회주의적인 의사들을 추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사 수가 크게 늘어났으며, 의사들의 봉급도 급속히 증가하여 다른 전문직종들을 능가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의학적 비유를 많이 사용했는데, 예컨대 유태인을 ‘독일국민의 암’이라고 표현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통치와 ‘이상’의 실현에 의사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변호사, 엔지니어, 건축가 없이도 일할 수 있지만, 그대들, 국가사회주의 의사들 없이는 한시도 일을 할 수 없다. 그대들이 나를 돕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실패할 것이다.　― 아돌프 히틀러

나치 독일의 우생학 정책의 1단계는 불임법이었다. 1933년 <유전적 질환이 있는 자손 방지를 위한 법>은　1907년의 미국 법을 본 딴 것이다. 이 법에 의해 독일의 정신병자, 간질환자, 장님, 귀머거리, 알코올 중독자 등 40만 명이 강제로 불임수술을 당했다. 나치 의사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열성인자 보유자도 포함하여 인구의 10-15%에게 강제 불임수술을 시행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치의 2단계 우생학 정책은 1939년에 시작된 안사술(安死術, euthanasia)이다. 나치는 정신병자, 불구자, 행려자 등 ‘무익한 식충들’을 굶겨 죽이자는 국가시책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나치의 논리는 ‘살 가치가 없는 인생’들이 사회의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1939년 히틀러가 안락사를 승인한 뒤　2년 동안 독일의 정신질환자 7만 명이 살해당했으며, 2차대전 전 기간을 통해 독일 정신병자들의 절반이 굶어죽었다.
3단계는 인종대학살이다. 1939년부터 가스에 의한 살해가 시작되었으며, 1941년부터는 안사술은 병원의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194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유태인 살해의 정당화 논리, 기술, 장비, 인력은 정신병환자에 대한 안사술에서 온 것이었다. 1941년 가을, 독일 전역의 정신병원의 가스실이 해체되고 그곳의 시설과 장비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몇 군데의 수용소로 집중되면서, 살해에 관여하던 의사, 간호사, 기술자들도 수용소로 이동하였다. “살 가치가 없는 인생들인 정신병자”들을 죽이던 논리에 근거하여 유태인, 동성애자, 공산주의자, 반나치주의자, 집시, 슬라브족, 일부 전쟁포로들이 가스로 살해당했다.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강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00만 명의 유태인이 인종청소라는 명목으로 나치에 의해 학살되었다. 이와 같은 안사술과 인종학살에 관여한 의료인은 강제동원이 아니라 많은 경우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의사들은 또한 강제수용소에서 ‘과학 발전’의 미명 아래 수감자들에 대해 대규모 인체실험을 자행하였다. 의사들이 수감자들을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보았다면 도저히 행할 수 없을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인체실험에는 당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의학자들부터 무명의 의사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료인들이 참여하였다. 그 가운데에도 멩겔레의 쌍둥이 실험은 특히 악명이 높았다.


2. 멩겔레의 쌍둥이 실험

의사이자 과학자로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갖게 된 멩겔레(Josef Mengele)가 수행한 실험은 나치 의사의 냉혈적 속성과 살인적인 잔인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멩겔레는 ‘과학자적’ 냉철함과 침착함으로 죽일 사람들을 가려냈으며, 병에 걸린 수용인들을 ‘위생을 위해’ 대거 가스실로 보냈고, 직접 여러 사람들 앞에서 살인하는 경우도 많았다. 32세에 아우슈비츠로 온 멩겔레는 수감자들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다. 멩겔레는 비밀리에 쌍둥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를 수행하였다. 70세의 오스트리아 노인 쌍둥이부터 어린이, 난쟁이 등 온갖 종류의 쌍둥이 약 250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수행하였다. 멩겔레 연구팀은 인류학 연구라는 미명 아래 측정 가능한 인체의 모든 부위를 측정·비교하였고, 혈액을 뽑아 검사하였다. 멩겔레는 특히 유전학 실험과 세균학 실험에 집중했는데, 실험대상 쌍둥이들을 부검을 하기 위해 죽이곤 했다. 멩겔레를 보조하였던 강제수용소 조수 나이스즐리는 멩겔레가 어떻게 14명의 집시쌍둥이를 죽였는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해부실 옆에는 일하는 방이 있었는데 14명의 집시쌍둥이들이 심하게 울며 대기하고 있었다. 멩겔레는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10cc와 5cc 주사기를 준비하였다. 한 상자에서는 에비팔, 다른 상자에서는 클로로포름을 꺼내어 수술대 위에 놓았다. 첫 번째 쌍둥이가 들어왔다. 14세 소녀였다. 멩겔레는 나에게 그 소녀의 옷을 벗기고 머리를 해부대 위에 올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소녀의 오른팔 정맥에 에비팔을 주입했다. 그 애가 잠들자 멩겔레는 좌심실을 만져 확인한 다음 10cc의 클로로포름을 주입하였다. 잠깐 움찔하더니 그 아이는 죽었고 멩겔레는 시체실로 데려갔다. 이런 방법으로 그날 밤 쌍둥이 14명을 모두 죽였다.

멩겔레는 세 쌍의 쌍둥이가 눈 색깔이 달라서 흥미로워 했다. 이들을 죽인 다음 안구와 기관들을 적출하여 ‘전쟁 물질-긴급’이라고 적은 뒤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 보냈다.
멩겔레의 쌍둥이 실험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에바 모제스-코르는 멩겔레의 비르케나우 실험실에서는 인간은 단지 과학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재료에 지나지 않았다고 회상하였다. 군인들은 모제스-코르 쌍둥이 자매를 가족과 분리시킨 뒤 발가벗기고 왼쪽 팔에 번호 문신을 새겼다. 멩겔레가 수행한 세균학 실험은 쌍둥이 중 하나에게 세균을 주입하여 죽으면 나머지 쌍둥이도 같이 죽여 부검을 실시하여 두 시체의 기관들을 비교하는 실험이었다. 에바는 세균을 주입받아 죽을 뻔했지만 살아남아 다시 실험실로 보내졌다.
에바가 수용되었던 막사에는 한살 반부터 13살까지의 쌍둥이들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멩겔레가 만든 일과표가 걸려 있었다. 쌍둥이들은 다섯 시에 기상하여 여섯 시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막사 밖에서 점호를 받았다. 죽은 쌍둥이들도 밖에 내어다 숫자를 세었다. 멩겔레는 수감자가 죽으면 실험재료가 없어졌다고 매우 화를 내곤 하였다. 점호 뒤에는 각종 실험, 측정과 X-선 촬영 등의 일과가 이어졌다. ‘연구자들’은 혈액을 뽑아가기도 하고 무엇인가 주입하기도 했다. 어느 쌍둥이들은 죽을 때까지 얼마만큼 혈액을 뽑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실험에 사용되어 하얗게 되어 쓰러지기도 했다. 그들은 일주일에 세 번씩 비르케나우에서 아우슈비츠까지 걸어가, 그곳의 큰 방에서 발가벗긴 채 실험대상이 되었다. 연구자들은 쌍둥이들 신체 각 부위를 측정하고, 다른 색깔들로 칠하고는 사진 찍고 기록했다. 19세난 소년 쌍둥이는 “소년을 소녀로 만들고 소녀를 소년으로 만들기 위한” 실험에서 혈액을 교차 수혈하는 데 사용되었다. 소년들은 거세되기도 했고, 수혈 반응을 보기 위한 실험에 쓰이기도 했다. 한 쌍의 집시 쌍둥이 소년들은 등이 서로 붙도록 꿰매진 뒤 다시 멩겔레의 실험실로 보내졌다. 멩겔레는 쌍둥이의 혈관과 기관들을 붙여 샴쌍둥이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 쌍둥이들은 극심한 고통 때문에 밤낮으로 울다가 상처에 괴저가 생겨 3일만에 죽었다. 멩겔레는 또한 7세난 소녀의 요도를 대장에 연결하는 실험을 포함해서 남성과 여성 비뇨생식기에 대한 실험도 많이 자행하였다.
에바는 쌍둥이 자매 미리암과 더불어 살아남았지만 그들은 평생 정신적, 신체적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에바는 인체를 이용하는 실험을 할 경우 과학자들은 자신에게도 똑같은 실험을 해서 피험자가 갖는 느낌을 갖는지 과학자들 스스로 확인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연구는 과학(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봉사하는 인간들로부터 절대로 자신들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한다. 에바는 국제사회와 각 나라가 인체실험을 통제할 법과 규범을 만들어야 한다고 절규하였다.


3. <뉘른베르크 강령>의 제정

1945년 10월, 전쟁범죄, 반평화범죄, 반인류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처벌하도록 하는 국제협약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 국제협약에 따라 인체실험에 관여한 독일 의사들과 과학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다. 이른바 ‘의사들에 대한 재판’ 또는 ‘의료사건’이라고 불린 이 재판은 공식적으로는 제1 군사재판소 제1 심리라고 한다.
1946년 10월 25일, 전쟁범죄위원회 위원장이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소에 23명의 피고를 기소하였고 11월 5일에는 피고인들에게 독일어로 번역된 기소장이 전달되었다. 11월 21일 군사재판소는 기소를 받아들였고 23명의 피고인은 ‘무죄’를 청원하였다. 1946년 12월 9일, 증거 제시와 함께 영어와 독일어로 심리가 시작되었다. 그 뒤 139번에 걸쳐 공판이 이루어졌고 1947년 8월 19일 판결이 내려졌다. 재판과정을 통해 1,471개의 문서와 11,538 페이지에 달하는 서류가 작성되었으며, 증인 85명의 증언, 관련 서류, 사진, 진술서, 심문서, 편지, 지도, 의무기록 등이 검토되었다. 피고인들의 죄상은 전쟁과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전쟁과 관련되지 않은 것도 있었기 때문에, 죄목은 전쟁범죄 및 반인류범죄였다.
기소위원회 위원장인 미 육군 중장 테일러는 첫 번째 공판 서두에 피고인 대부분이 잘 훈련된 의사이고 몇몇은 저명한 과학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수행한 일의 성격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으며 또한 자신들의 전문분야에서 도덕적이고 전문적인 판단을 누구보다도 잘 내릴 수 있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피고인 23명 가운데 20명이 의사였다. 이들이 저지른 죄상을 항목별로 열거한 뒤, 테일러는 이들의 행위가 히포크라테스 이래 의료윤리의 기본인 “무엇보다도 해를 끼치지 말라(primum non nocere)"를 어긴 비윤리적이고 반인류적인 것이었을 뿐 아니라, 순수하게 과학적 관점에서 보아도 이들의 실험이 비효율적이고 체계적이지 않고 비과학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 기소된 인체실험은 나치 의사들이 저질렀던 범죄와 인체실험을 모두 포괄한 것은 아니었다. 기소된 나치 의사들의 인체실험은 의사들에 의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살인과 만행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전쟁 중 살인과 인체실험에 간여했던 의사들 중에는 남아메리카로 도피한 멩겔레처럼 국제적인 체포망을 피한 사람들도 있고, 자살한 의사들도 있으며, 사면을 받고 계속 의학계에서 활동한 사람들도 있다.
인체실험의 적절한 기준은 뉘른베르크 재판 내내 제기되었던 주요한 주제였다. 판사들은 재판과정에서 나치 실험의 죄악성에 초점을 맞춤과 동시에 의학연구와 관련된 폭넓은 윤리적 문제들과 씨름했다. 재판부는 2차대전 중 의사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행해진 인체실험을 판단하기 위한 의학적 기준을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윤리, 1803년 영국 의사 토마스 퍼시벌이 만든 윤리강령, 미국 의사 윌리엄 버몬트의 1833년 윤리강령, 미국의사협회의 1847년 윤리강령, 1865년 프랑스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가 제안한 인체실험 윤리원칙, 그리고 1930년대의 독일의 인체실험에 대한 가이드라인 등을 참조하였다. 독일은 1931년 포괄적인 인체실험의 윤리원칙을 제정하였지만, 나치 의사들은 1931년에 만들어진 이 지침을 몰랐거나 아예 무시했던 것이다.
재판 내내 계속 제기된 “인체실험을 정당화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이 있었는가” “어떤 것이 보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피고 의사들은 인체실험 수행에 관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원리가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피고들이 전쟁포로들에 대한 인체실험에 자신들이 참여한 것을 정당화한 윤리적 논점과 근거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전쟁 및 국가비상사태에서 연구는 필수적이다. 민간인과 군인들의 생존이 인체실험에서 도출된 과학적, 의학적 지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상황은 극단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2. 범죄자들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관례이다. 피고들은 전 세계적으로 행해졌던 죄수에 대한 인체실험의 예를 인용했으며, 0특히 미국의 교도소에서 행해진 실험을 강조했다.
3. 인체실험에 동원된 죄수들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다. 인체실험에 사형수들을 참여시키는 것은 그들을 계속 살아 있게 해주고 처형을 막는다는 점에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최선의 봉사를 하는 것이다.
4. 실험대상자는 군 지휘관이 선정하거나 죄수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별 의사들은 실험대상 선발에 대해 책임이 없다.
5. 전쟁기간 중 모든 사회구성원은 전쟁 수행에 기여해야 한다. 이에는 군인, 민간인뿐 아니라 수감자도 포함된다.
6. 인체실험에 관련된 독일의사들은 단지 독일법을 따랐을 뿐이다.
7. 인체연구에 관해 보편적인 윤리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기준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랐다.(윤리상대주의) 피고측은 전세계적으로 행해졌던 인체실험에 관련된 논문 60여개를 인용했다. 이들 실험 중 많은 것이 연구대상자들의 자발적 동의를 얻지 않았고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과학발전을 위해 실험자료가 필요하며 그에 따라 연구가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8. 만일 의사들이 연구를 거부했다면 목숨이 위태롭거나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의사들이 실험을 하지 않았으면 기술이 미숙한 기사들이 수술이나 실험을 했을 것이고 그 경우 더 큰 피해가 초래되었을 것이다.
9. 국가가 인체실험을 결정했고 의사들은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었다.
10. 때로는 소수를 죽임으로써 다수를 살릴 수 있다면 덜 심각한 악을 감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피고측은, 실험이 유용했다는 사실은 나치의 인체실험에서 얻은 결과들을 미국과 영국이 대일본전쟁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아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11. 인체실험에 참여한다는 죄수들의 동의는 암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피험자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진술이 없었기 때문에 유효한 동의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12. 인체실험 없이는 과학과 의학이 발전할 수 없다.

이러한 피고들의 주장에 대해 검사측은 인체실험 수행에 관한 윤리적 기준에 대하여 논증하기 위해 두 명의 의학전문가 증인을 내세웠다. 검사측 증인인 알렉산더와 아이비는 전문가 증언을 통해 최종판결에 실린 뉘른베르크 강령에 포함된 윤리원칙에 대해 진술하였다. 판사들이 최종판결에 뉘른베르크 강령 10개항을 넣기로 결정한 것은 강령을 국제법 수준으로 끌어올려, 나치 실험과 같은 상황이 재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강령에 나타난 기준에 의거해서 피고인들을 단죄하지는 않았다. 이 강령을 당장 적용하면, 독일 의사들뿐 아니라 미국과 영국 등 참전국의 의사들과 과학자들이 수행한 수많은 비윤리적인 실험들이 모두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허용 가능한 의학실험>이라는 제목의 10개 조항을 발표했는데, 이 10개 조항이 뉘른베르크 강령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재판부는 서문에서 “인체실험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사회에 이익과 선을 가져다주며, 다른 방법이나 수단으로 마찬가지 결과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하지만, “(판사들) 모두는 도덕적, 윤리적, 법적 개념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특정한 기본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였다”라고 적시하였다. 즉, 이 강령은 이 재판의 판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허용 가능한 인체실험에 대한 견고한 기준과 가이드라인을 확립시키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뉘른베르크 강령은 처음부터 의료윤리 강령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자연법’에서 유추되어 법률적인 최종판결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졌다.

<뉘른베르크 강령>
1. 인체실험대상자의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자발적인 동의”는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이것은 실험대상자가 동의를 할 수 있는 법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어떠한 폭력, 사기, 기만, 협박, 술책의 요소가 개입되지 않고, 배후의 압박이나 강제가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상태이어야 하며, 이해와 분명한 지식에 근거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지식과 주관적 요소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후자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실험대상자가 내린 긍정적인 결정을 받아들이기 전에, 그에게 실험의 성격, 기간, 목적, 실험 방법 및 수단, 예상되는 불편 및 위험, 실험에 참여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건강 이상 등 영향에 대하여 알려야 한다. 동의의 질을 보장하기 위한 의무와 책임은 실험을 시작하고 지도하며 참여하는 연구자 개개인에게 있다. 이것은 타인에게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고서는 위임할 수 없는 개인적 의무이자 책임이다.
2. 연구는 사회의 선을 위하여 다른 방법이나 수단으로는 얻을 수 없는 가치 있는 결과를 낼만한 것이어야 하며, 무작위로 행해지거나 불필요한 연구이어서는 안 된다.
3. 연구는 동물실험 결과와 질병의 자연경과 또는 연구 중인 여러 문제에 대한 지식에 근거를 두고 계획되어야 하며, 예상되는 실험결과가 실험 수행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
4. 연구는 불필요한 모든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상해를 피하도록 수행되어야 한다.
5. 사망이나 불구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견할 만한 이유가 있는 실험의 경우에는 연구진 자신도 피험자로 참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행해서는 안 된다.
6. 실험에서 무릅써야 할 위험의 정도가 그 실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인도주의적 중요성보다 커서는 안 된다.
7. 손상과 장애, 사망 등 매우 적은 가능성까지를 대비해서 피험자를 보호하기 위한 적절한 준비와 적합한 설비를 갖추어야 한다.
8. 실험은 과학적으로 자격을 갖춘 사람만 수행하여야 한다. 실험에 관련되어 있거나 직접 수행하는 사람은 실험의 모든 단계에서 최고의 기술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9. 실험을 하는 도중이라도 피험자는 신체적, 정신적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실험을 지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실험을 끝낼 자유를 가진다.
10. 실험 과정에서, 실험을 주관하는 과학자는 자신에게 요청된 성실성, 우수한 기술과 주의 깊은 판단에 비추어, 실험을 계속하면 피험자에게 손상이나 불구, 또는 사망을 초래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으면 어떤 단계에서든지 실험을 중단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치 독일의 인체실험은 세계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인체실험을 자행했던 의사들은 과학적 업적으로 저명한 의사들도 있었고, 보건분야에서 행정적으로 기여를 많이 했기 때문에 잘 알려진 사람들도 있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의료의 역사상, 최대의 규모로 가장 잔인한 일을 의료인들이 자발적으로 과학의 이름 아래 자행했다는 점이다. 나치에 저항했던 소수의 가톨릭 및 사회주의적 의료인들을 제외하고 수많은 의료인들이 적극적,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나치 독일의 의술과 보건의료정책은 매우 근대적이고 선진적이었기에 더욱 심각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나치의 인체실험이 남긴 교훈은 과학은 그 자체로 민주적이지도 비정치적이지도 선하지도 않으며 첨단과학과 이데올로기가 결합하면 매우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의학자, 과학자 개개인의 양식에 의학연구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허용 가능한 의학실험’의 원칙을 정하고 준수하는 일이 중요해진 것이다. 실험담당자의 자격이나 허용 가능한 의학연구 범위 등 여러 준수사항이 마련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원칙은 피실험자의 자발적 동의와 이를 위한 충분한 정보제공이다. 즉, 실험의 목적·성격·방법·수단 및 예기되는 위험 등에 대하여 피검자에게 충분히 알려 주고 난 다음의 자발적 동의가 인체실험의 ‘절대적’ 전제라는 것이다. 의사들의 침묵과 동조 가운데 수행되었던 의학연구의 영역에 사회의 공동이익 추구라는 가치보다 피험자의 복지와 인권이라는 가치가 더 우선하게 된 것이다.


4. 뉘른베르크 강령의 역사적 의의

의학연구윤리의 역사는 과학과 의학 발전의 미명 아래 의료인들이 행한 살인, 고문. 잔학행위를 단죄한 뉘른베르크 재판을 중심으로 뉘른베르크 이전 시기와 뉘른베르크 이후로 나눌 수 있다. 뉘른베르크 강령은 전세계적 차원에서 인체실험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윤리적, 법적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과학기술을 정당화하는 개인적, 사회적 가치는 무엇인가? 지식을 추구하기 위한 질문의 원천과 당위성은 무엇인가? 누가 연구내용을 결정하고 연구로부터 오는 이익을 결정하는가? 어떻게 책임성과 과실이 결정되는가? 규제나 통제가 필요하다면, 법의 차원에서 할 것인가, 윤리의 차원에서 할 것인가? 인체실험을 수행할 만한 전문적 권위를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연구자가 지켜야 할 목표, 관심, 이해, 판단, 자격의 기준, 역할 등은 무엇인가? 개인이나 사회의 이익을 위해 개인과 사회가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피험자에게 돌아갈 피해나 손상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피험자에게 가해진 손해는 어떻게 평가할 것이며, 치료적 실험과 비치료적 실험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체실험에서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연구윤리의 진작을 위한 의료전문가, 사설기관, 공공기관의 역할은 무엇인가? 소수 민족(집단), 감금된 사람, 어린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사람 등의 취약한 피험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안전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것인가? 죄수들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누가 연구과정을 감독할 것인가? 인체실험에서 일어나는 인권 유린을 사회가 어떻게 다룰 수 있을 것인가?
뉘른베르크 강령은 사상 최초로 국제적으로 채택된 의학연구윤리 강령으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2차대전 이후 개별 국가 수준에서, 또는 국제적 수준에서 마련된 윤리강령과 관련 법규들은 뉘른베르크 강령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강령은 피험자들의 인권 보호에 대한 과학자들의 책임을 명시한 것으로 그 효력은 점점 커져 왔다. 이 강령은 발표된 직후부터, 일반 대중과 전문가 사이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이후 인체실험 및 인권과 관련해서 채택된 문서들은 뉘른베르크 강령의 영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유엔의 <일반시민의 권리와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계약>이나 1947년 창설된 세계의사회의 <제네바 선언>에 뉘른베르크 강령의 정신이 스며 있으며 1954년 <인체실험에 관한 결의>도 마찬가지이다.
뉘른베르크 강령에 대한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제1항의 “인체실험대상자의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자발적인 동의는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는 가장 큰 기여를 한 원칙이면서 동시에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동의를 자발적으로 할 수 없는 비자격자나 어린이의 경우, 실험을 금지한다면, 이 부분의 연구가 줄어들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또한 죄수들에 대한 실험 금지도 엄격하게 적용하면 죄수들의 이익에 오히려 반대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리고 연구보조원이나 자선병원의 환자들과 같이 진정한 의미의 자발적 동의가 불가능한 사람도 존재한다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다는 것 역시 ① 실제로 실험을 진행하기까지 모든 위험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충분히 알린다는 것이 불가능하며 ② 실험 과정이나 내용이 너무 기술적이어서 모든 실험대상자들에게 완벽하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3항도 비판을 받았는데, 연구자가 항상 성공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실험의 정당화가 사전에 늘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5항은 의료인이 피험자로 참여하는 것으로 위험한 실험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64년 ‘뉘른베르크 실험원칙 재평가를 위한 미국의과학위원회’는 이 조항에 대해 “만일 실험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면, 즉 사람을 놓고 생각할 때 옳지 않은 실험이라면, 연구자가 피험자로 참여한다고 해서 그 실험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교정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6항 역시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주제넘게 평가하는 것”이라고 비판받았다.
뉘른베르크 강령은 언급된 조항에 대해서 뿐 아니라 언급해야 할 것을 빠뜨렸다고도 비판을 받았다. 강령은 건강한 피험자들에게 하는 실험과 환자들에게 하는 치료적 실험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한 실험을 시작하고, 지시하고, 계속 해나가는 모든 권한과 책임을 과학자 개인에게 부여하는 데 그쳐 그들 연구자의 행위를 심의하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한 지적처럼 뉘른베르크 강령은 연구자가 모든 필수적인 윤리적 고려를 다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였던 것이다.


5. <헬싱키 선언>

1953년부터 세계의사회는 인체실험 문제를 더욱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법률가들이 재판을 위해 만든 뉘른베르크 강령에서 더 나아가, 의사들이 스스로 전문적인 지침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점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더불어 “새로운 진단과 치료방법에 관련된 실험”과 “비치료적 실험”을 구분할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뉘른베르크 강령이 가지는 한계와 문제점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졌으며, 새롭게 추가되어야 할 원칙들도 논의되었다. 그 결과 1954년 세계의사회 제8차 총회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의 <인체실험에 관한 결의: 연구와 실험 종사자를 위한 원칙>이 채택되었다. ① 실험은 언제나 개개인에 대한 일반적인 존중의 원칙을 지키는, 자격을 갖춘 과학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② 의학실험의 결과는 항상 사리분별과 조심성을 가지고 발표하여야 한다. ③ 인체실험의 일차적 책임은 연구자에게 있다. ④ 건강한 피험자에 대한 실험에서 연구자는 충분히 정보를 제공한 뒤 자유의사에 의한 동의를 구하는 모든 절차를 취해야 한다. 환자가 피험자인 경우는 환자나 가까운 친지에게 동의를 구해야 한다. 연구자는 실험의 성격, 실험의 이유, 실험이 내포한 위험 등을 피험자나 피험자에 대해 법적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 ⑤ 대담한 수술이나 치료법은 오직 절박한 상태의 환자에게만 행해질 수 있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세계의사회 의료윤리위원회는 활동을 계속하여, 5개 조항을 수정하고 발전시켜서 <헬싱키 선언>을 발표하였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연구와 관련하여 의료인에게 지침이 되는 권고 사항을 담은 헬싱키 선언은 1964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의사회 제18차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헬싱키 선언의 어디에도 뉘른베르크 강령에 대한 명시적 언급은 없지만, 이 선언은 뉘른베르크 강령에 많은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었다.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헬싱키 선언이 ‘치료적 실험’과 ‘비치료적 실험’을 구분한 것이었다. 헬싱키 선언은 건강한 피험자에 대한 실험에서 지켜야 할 윤리적 원칙을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서도 준수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했다.
헬싱키 선언에 대한 주요한 개정은 1983년부터 1989년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 윤리성 심사를 위한 위원회에 대한 규정이 첨가되었다. 또한 동의 부적격자에 대해서는 법적 대리인의 동의만을 인정하도록 했다. 2000년 10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세계의사회 제52회 총회에 이르기까지 6차례에 걸쳐 개정된 헬싱키 선언(총 32개 조항)의 주요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생명의료연구는 일반적으로 승인된 과학 원칙에 따라야 하며, 적절히 시행된 실험·동물실험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2. 실험의 계획 및 시행은 국내법 규정에 따라 독립적인 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거쳐야 한다.
3. 자격 있는 유능한 과학자의 책임 하에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4. 연구 목적의 중요성은 위험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5. 피험자의 이익에 대한 고려를 과학 및 사회의 이익에 우선시해야 한다.
6. 신체의 완전성에 대한 권리,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야 한다.
7. 연구에 따른 위험이 잠재적 이익보다 크다고 판단할 때에는 연구를 중단해야 한다.
8. 연구결과를 발표할 때 의료진은 결과의 정확성을 유지하고, 이 선언에 규정된 원칙을 따라야 한다.
9. 연구 자체의 목적과 방법, 예견되는 이익과 내재하는 위험성, 그에 따르는 고통 등에 관하여 피험자에게 사전에 충분히 알려주어야 하며 또한 그들로부터 충분한 설명에 근거하여 자유로이 이루어진 동의를 받아야 한다.
10. 이때 동의는 그 연구에 참가하지 않고, 독립된 지위에 있는 의료인이 받아야 한다.
11. 법률상 무능력자에 대해서는 국내법에 따라 법적 대리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12. 연구자는 모든 재정적 이해관계를 윤리심사위원회와 잠재적 연구참여자에게 밝혀야 하며, 간행되는 논문에도 이를 명시해야 한다.
13. 새로운 치료의 유효성을 지지하지 않는 반대연구의 결과도 발표되어야 한다.
14. 학술잡지는 이 선언의 원칙을 준수하지 않는 보고서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

최초의 국제적 인체연구윤리 강령으로서 뉘른베르크 강령은 아직도 유효하며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나, 헬싱키 선언의 채택 이후 의학 및 생명과학 연구자들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전문 지침으로서 헬싱키 선언을 준수하게 되었다. 특히 전문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서는 헬싱키 선언의 원칙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에 헬싱키 선언은 각 나라와 연구기관에서 의학연구윤리 및 심의 지침을 만드는 데에 주요한 원칙 및 가이드라인으로 활용되고 있다.


6. 터스키기 매독 실험과 의학연구윤리

유감스럽게도 1964년의 헬싱키 선언은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비윤리적인 인체실험을 종결짓지는 못했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국가이자 선진국인 미국의 정부에 의해 가난한 미국 흑인 매독환자 600여명을 대상으로 병을 치료하지 않고 40년 동안 지속된 실험은 헬싱키 선언이 채택되고 있는 중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1972년 미국 언론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이 실험은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켜 의학연구윤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한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흑인들에 대한 비치료실험’이라고 하는 이 실험은 시행되었던 지명에서 유래한 ‘터스키기 매독 연구’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실험은 정부 공권력에 의한 인권 남용의 대명사로, 백인 정부에 의한 흑인 인종차별의 오명으로, 의학 발전의 미명 아래 자행된 비윤리적인 인체실험을 상징하는 것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터스키기 실험은 1929년 미국 공중보건국이 흑인들 가운데 매독이 얼마나 퍼져 있는지, 매독 환자들을 대규모로 치료할 수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오명으로 얼룩진 비치료실험이 치료연구에서 나왔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이 조사로 대규모 치료가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1929년의 경제 대공황으로 재정 압박이 커지게 되자 치료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3년 뒤, 이 조사에 참여했던 공중보건국 성병 담당책임자 클락은 조사 결과 앨라배마 지역의 흑인들 가운데 매독 환자가 많으며 이들의 99퍼센트가 치료를 받지 않았으므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든, 과학 연구를 위한 더할 나위 없는 기회”라며 실험계획을 세웠다. 실험의 목적은 치료하지 않은 매독이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1932년 당시에도 매독을 치료하지 않으면 심혈관질환과 정신질환이 잘 생기며, 조기 사망의 위험이 높아진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었다.
공중보건국은 실험대상을 모집할 때부터 치료할 계획이 없었다. 25세에서 60세 사이의 흑인 남성 중에 매독에 걸린 지 적어도 5년 이상 되고 치료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을 모집했다. 환자들을 건강인과 비교하기 위해 건강한 흑인 남성들도 대조군으로 모집되었다. 총 412명의 매독환자와 204명의 대조군이 장기실험 과정에 등록되었다. 백인 의사들이 상징하는 정부공권력에 대한 반감을 줄이고 농촌 흑인 환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유니스 리버스라는 흑인 간호사를 고용했다. 이 간호사는 1932년부터 1972년 이 연구가 끝날 때까지 40년 동안 계속 환자와 연구자들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 대부분 문맹인 흑인 환자들에게 백인 의사들은 그들이 ‘나쁜 피’라는 병에 걸려 있으며 정부에서 치료를 해 준다고 유인했다. 실험을 위해 정기적으로 혈액을 뽑고, 매독이 신경계에까지 퍼진 것을 확인하기 위해 척추에서 뇌척수액을 뽑는 검사까지 했지만, 환자들에게는 치료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험대상자들은 자신이 피험자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으며, 정부에서 무료로 건강검진과 치료를 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1933년 의사들은 매독을 치료하지 않으면 인체에 어떠한 손상이 생겨 사망에 이르는가를 알아내기 위해 사망한 피험자들을 부검하기로 결정했다. 의사들은 사체 소견과 비교하기 위해 살아있을 때부터 열심히 검사를 했고 기록을 남겼다. 지금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는 공중보건국 의사들이 주고받은 문서들은 당시 의사들이 이들 환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백인 엘리트 의사들은 흑인 피험자들은 무식하며 개인적인 삶의 의미가 그리 크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한 의사는 “환자들이 죽기 전까지는 이들에 대해 더 이상 흥미가 없다”라며 솔직한 심정을 내비쳤다. 한마디로 그들에게 피험자들은 살아있는 부검용 사체들이었던 것이다. 당시 보건부 장관도 직접 나서서 환자들의 부검을 부탁하는 공문을 터스키기 병원에 보낼 정도였다. 부검을 하게 되자 정부는 환자들을 이전보다 더 속여야 했고, 실험에 계속 참가하도록 지속적인 미끼를 제공해야 했다. 흑인 피험자들에게는 검사하는 날 따뜻한 음식과 교통수단이 제공되었고, 검사하고 난 뒤 농촌 벽지에 사는 이들이 읍내에 장을 보거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도록 교통 수단이 마련되었다. 또한 아스피린과 자양강장제, 가짜약 등이 지급되었다. 사체부검을 유도하기 위해 부검을 허용하는 사람에게 장례비 보조금으로 일인당 50 달러를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흑인 사회에서는 장례식이 중요한 의식이었으므로 이는 상당히 효과적인 유인책이 되었다.
이 연구는 1936년부터 시작하여 1973년까지 의학잡지에 정기적으로 보고되었다. “흑인 남성들에서 치료하지 않은 매독에 대한 관찰 결과”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논문들은 하나같이 매독을 치료하지 않으면 뇌신경계와 심혈관계에 얼마나 심각한 합병증을 유발하며 환자의 수명을 단축시키는가를 보고하는 것들이었다. 1943년 매독 치료에 효과적인 페니실린이 나온 뒤에도 피험자들을 치료하지 않고 병의 경과와 부검소견을 관찰만 했을 뿐인 이 실험에 관한 논문들이 미국의사협회를 포함하며 십여만명 이상의 의료인들에게 읽혀졌지만, 의사 사회 내에서는 아무도 이 연구의 윤리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학연구윤리는 이미 독일 의사들의 강제적 생체실험에 대한 전세계적인 비판을 거쳐 인류가 다시 과학의 이름 아래 인권유린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1946년 제정된 <뉘른베르크 강령>에서 분명하게 천명된 바 있었다. 즉, 피험자들이 인체실험에 대해 충분한 사전 정보를 제공받은 뒤 자발적으로 동의를 해야만 인체실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1964년 세계의사회는 헬싱키 선언을 채택하여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의학연구에 관한 엄격한 윤리지침을 마련하였다. 더욱이 1966년 하버드 의과대학의 헨리 비쳐가 미국의 저명한 의학기관 및 의학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인체실험 가운데 비윤리적이며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폭로한 이래, 같은 해 미국의 국립보건원은 국가의 지원을 받아 행해지는 의학실험은 반드시 동료들의 심의를 받도록 규정하는 지침서를 공포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연구윤리 지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터스키기 실험은 계속되고 있었다. 인체연구윤리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를 피험자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터스키기 실험에 동원된 흑인 환자들은 40년 동안 자신이 실험대상인지조차 몰랐던 것이다.
40년의 실험 기간 동안 공중보건국이 피험자들로 하여금 치료를 받지 못하도록 조치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1934년 공중보건국 의사인 본덜러는 실험 지역의 흑인 의사들을 만나 실험 협조를 부탁했다. 흑인 의사들은 피험자들의 명단과 이들이 치료를 받으러 올 경우에 치료하지 말고 공중보건국으로 되돌려 보낼 것을 당부하는 공문을 받았다. 또한 1940년대 앨라배마 보건소가 지역을 순회방문하며 성병을 치료하는 프로그램을 수행할 때 공중보건국은 보건소에게 터스키기 실험대상자들은 치료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또한 1941년 미군 당국이 2차대전을 위해 징집한 터스키기 지역 청년들에게 당장 매독 치료를 하라고 명령했을 때, 공중보건국은 256명의 이름을 건네며 이들은 치료에서 빼 줄 것을 요청했고, 군 당국은 이에 순응했다. 실험은 최후의 환자가 죽어 부검될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었으므로 1972년 7월 이 실험이 대중매체에 알려지기까지 실험은 계속되었고 부검 또한 지속되었다.
이 비윤리적 실험을 세상에 폭로한 것은 보건부에서 성병 관련 조사 임무를 맡았던 피터 벅스턴이다. 벅스턴은 1966년 이 실험에 대해 알게 되자, 보건부 산하 질병연구센터에 이 연구가 얼마나 심각한 윤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지 문제 제기를 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질병연구센터는 의사들만을 불러 모아 이 실험에 대해 검토하는 회의를 몇 차례 가졌다. 흑인민권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실험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 한명만이 실험을 중지하고 이들을 당장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회의록에 의하면, “이와 같은 연구를 할 기회는 다시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야 합니다”라고 결론지었다. 질병연구센터의 책임자는 벅스턴에게 의사들이 충분히 의학적 고려를 한 결과 이 실험은 잘못된 것이 없다는 답장을 보냈다. 보건부를 그만두고 법대에 진학한 벅스턴은 법대 교수들을 포함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이 실험을 알리며 대책을 모색했으나 이미 죽은 사람도 많고 사안이 오래되어 별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1972년 친구인 신문기자에게 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이는 곧 전국적으로 신문의 톱기사가 되었다.
터스키기 실험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자 1973년 봄에 실험은 중단되고 생존한 환자들은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터스키기 실험에 분노를 느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인체실험에 관한 청문회를 열었는데, 이 청문회는 인체실험을 전적으로 과학자, 의학자들의 개인적인 분별력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이 실험에 직접 개입했던 의사들은 끝까지 실험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실험이 시작될 당시는 좋은 치료제가 없었고, 페니실린이 나온 다음에도 그 약으로 효과를 보기에는 어차피 매독이 심각하게 진행되어 있는 상황이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또한 환자들은 가난하고 무지해서 치료를 잘 받지 못하고 죽어갈 사람들이지만, 실험에 참가함으로써 의학 발전에 기여하였고, 앞으로 흑인 매독환자들을 치료할 의사들을 크게 도왔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 흑인 환자들과 가족들은 정부와 관련 연구기관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생존자와 유족들은 총 1천만 달러의 보상을 받게 되었다. 더 나아가 1997년 5월 16일 클린턴 대통령은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백악관에 초청해서 공식적으로 그들에게 미 정부가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했다. 이 자리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터스키기 매독 연구가 흑인 말살정책이 아니냐며 분노를 표시한 흑인 국민들에게 20만 달러의 기금을 출연해서 터스키기 대학에 의료윤리연구소를 설립하여 흑인들로 하여금 의료윤리, 의학사를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터스키기 실험은 흑인들이 매독에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준 연구가 아니라 미국 정부와 의사 집단의 윤리의식이 매우 박약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이 실험이 매독에 관한 지식 발전에 기여한 바는 없지만, 역설적으로 생명의료윤리 발전에 기여한 바는 컸다. 1971년까지만 해도 의학연구를 심의하기 위한 특별위원회의 설립 안이 의회에 상정되었을 때, 의학연구에 무지한 일반인들이 의학에 대해 간섭하려 한다며 반발하던 의사들이 1972년 터스키기 실험이 폭로된 이후에는 더 이상 반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인체실험에 대한 윤리적 자각이 높아지면서 여론은 제도적으로 의학연구의 윤리성을 심사하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필요에 대해 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마침내 미국 의회는 1973년 ‘생의학 및 행동과학 연구 실험대상자의 보호를 위한 국가위원회’를 설립했다. 일반시민과 여러 전문분야(의학, 법학, 윤리학, 신학, 생물학, 물리학, 사회과학, 철학, 인문학, 보건행정, 정부, 사회사업)를 대표한 11인의 위원 중 의학 부문은 다섯 명을 넘지 않도록 한 조항을 보면 의학 부문 이외의 참여를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가장 피해 받기 쉬운 사회적 약자들인 죄수, 정신지체자, 어린이, 시설아동들을 인체실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이 논의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윤리학자 램지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후 의학연구윤리의 발전에 시사하는 바가 컸다. “아무리 연구의 의도가 좋다고 할지라도 자발적 동의와 동료들의 심의를 꼭 거치도록 해야 한다. 어떠한 사람도 동의 없이 남에게 자신의 신체를 실험하게 할 만큼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7. 연구윤리심의위원회의 정착

헬싱키 선언 등 국제적인 지침 외에도 1960년대 후반 이후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과학자 사회 외부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윤리위원회에서 실험에 대한 피험자의 자발적 동의, 연구의 윤리성, 안전성, 과학성에 대한 사전 심의를 제도화하여 법률로 정착시켰다. 미국에서는 관련 연방정부 기관에서 이에 대한 법령과 지침을 마련하여 시행하고 있으며, 유럽은 유럽의회가 이러한 역할을 맡고 있다. 미국에서는 기관연구심의위원회(Institutional Review Board, IRB)라는 이름으로 정착이 되어 기관 내에 심의기구를 운영하고 있으며, 유럽에서는 연구윤리심의위원회(Research Ethics Committee/Boards)라는 이름으로 지역별로 심의를 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대한 기관연구심의위원회의 심의는 1968년 국립보건원의 연구지원 체계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즉 국립보건원은 미국 정부가 지원하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의 윤리적 심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각 연구기관에 기관연구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연구윤리에 관한 심의를 권유하였으나 초기에는 제도의 정착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2년 터스키기 매독 실험이 언론에 폭로되어 의학연구윤리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각되자 비로소 1974년 <국가연구법>을 제정하여 기관연구심의위원회의 심의와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를 의무화하게 되었다. 그 뒤 의학연구윤리에 관한 사항을 보건부 산하의 인체실험보호국에서 담당토록 하여 기관연구윤리심의위원회 제도를 정착시켜 나갔다.


8. 우리나라의 의학·생명과학 연구와 인체연구윤리
“생명공학 KOREA 세계가 주목” 최근 들어 이러한 제목의 기사가 우리나라 언론에 빈번히 실리고 있다.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국제적인 과학 저널에 우리나라 과학자의 논문이 잇달아 게재돼 세계 과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으며 “특히 한국 생명과학의 막강한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다”라는 것이다. 기사는 또 미국에 등록된 우리나라 생명공학 특허 역시 2000년 이후 거의 두 배로 늘어나 우리나라 생명과학의 앞날이 밝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생명과학이 앞으로 엄청난 성과를 거둘지 장담할 수 없지만 도약대 위에 올라선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생명과학이 이 정도까지 발전한 것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여건에서 묵묵히 연구실을 지켜온 수많은 선배 과학자들과 지원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난치병을 치료하고 산업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생명과학·의학 분야가 줄기세포 한 가지인 것은 전혀 아니다. 줄기세포만 강조하는 것은 사실의 엄청난 왜곡이고 연구자들의 의욕을 꺾는 행위다. 성체줄기세포는 몇 가지 질병에서 동물실험 단계를 지나 임상시험을 하고 있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다. 배아줄기세포는 가야 할 길이 더욱 멀다. 반환점을 돈 것이 아니라 출발선을 떠난 것이다. 1998년 세계 최초로 배아줄기세포를 얻어낸 미국의 제임스 톰슨은 아예 환자 치료에 쓰일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필수적인 동물실험조차 거치지 않은 채 벌써 환자 등록을 받기 시작한 데에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국가가 생명과학에 지나치게 개입해 왔기 때문이다. 국가는 과학을 지원하되 좌지우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 과학 발전의 방향은 전문가와 시민사회에 맡겨야 한다. 사상과 이념이 국가이데올로기가 될 때의 폐해를 우리는 나라 안팎에서 수없이 보아왔다. 과학이 ‘국가과학’이 될 때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예만 들자. 스탈린은 유전학에도 개입하여 통치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획득형질은 유전한다”라는 뤼센코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다른 학설은 모두 이단시하였다. 그 결과 학문의 자유를 잃은 소련의 유전학은 퇴보할 수밖에 없었고 소련 과학(자)은 온통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로 민주화를 이룬 대한민국을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 비교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생명과학 분야에서는 그럴 위험이 없지 않다. 국가기구로부터 가장 자유로워야 할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조차 국가가 장악하려는 모습만 보아도 우려를 떨쳐낼 수 없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생명과학의 메카가 되려면 이 점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치의 인체실험을 단죄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래 인체를 이용하는 연구와 시술에 대해서 엄격한 감시 절차가 마련되었으며 생명과학의 발전에 따라 더욱 정교해졌다. 그에 따라 연구자는 연구계획부터 연구를 마칠 때까지 소속 연구기관에 설치된 기관연구심의위원회(IRB)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또 연구자는 신체 전부 또는 난자 등 일부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제공을 강요해서 안되고 금전 등의 대가를 주어서도 안 된다. 이런 것은 어떤 명분이나 핑계도 통하지 않는 철칙이고 오래 전부터 ‘글로벌 스탠다드’이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인체연구윤리의 철칙과 글로벌 스탠다드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생명공학 KOREA”를 세계가 주목한다는 것은 언제든지 허점만 보이면 “사다리 걷어차기”를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위기가 기회이듯이 기회는 위기이기도 하다. 생명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생명의 고귀함 때문이지만, 사다리 걷어차기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도약대 위에 올라선 지금이 연구자, 시민사회, 국가기구가 제 몫을 다하여야 할 때이다.